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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천사는 누굴 위해 기도를 올리는가
“제가 이상한 거겠죠.”
미카엘은 욱신거리는 뒤통수를 문지르다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힘없이 말했다.
“네. 제가 생각해도 제가 이상한 거 같아요…….”
미카엘에게 무르디무른 데미안은 결국 1분을 버티지 못하고 그의 뒷머리를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져 주었다.
“이미 몇 번이나 마셨는데도 자꾸만 목이 말라요. 선생님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아서 불안하고, 오늘이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아서 두려워요. 할 수 있을 때 죽을 만큼 해 놓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 것만 같아요.”
위태롭게 흔들리는 미카엘의 푸른 눈을 바라보던 데미안 또한 무겁게 가라앉은 검은 눈으로 바닥을 바라보았다.
“그래.”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데미안은 아주 잠시 과거와 현실이 헷갈리고는 했다.
내가 왕자의 침대 곁을 지키던 성기사인지, 아니면 미카엘 없이 살아가던 대천사인지.
어느 쪽이든 데미안의 기분을 좆같게 하는 건 매한가지였다.
미카엘은 일찌감치 데미안을 향한 연심을 자각했기에 유리시아의 가르침대로 오로지 그에게만 순애를 바쳤다.
하지만 그는 유일한 왕자였기에 많은 다회나 야회에 참석해야만 했고, 그때마다 여러 귀족 여성들을 에스코트해야만 했다.
귀족 여성들은 대부분 법도에 따라 예의 바르게 행동했지만, 그중엔 잘생긴 왕자와 먼저 몸을 연결한 후 차기 왕비 자리를 노리려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미카엘은 순애를 지키려 했기에 수많은 여성들의 유혹을 불쾌히 여겼다.
그쯤 미카엘의 어머니, 왕비는 아들이 그의 기사와 심상치 않은 관계라는 걸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당시 동성애는 죄악이었기에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 아들을 옳은 길로 인도하려 했다.
하지만 그건 아주 그릇된 방법이었다.
「선, 선생……선생님, 선…….」
늦은 밤 침실 문을 미친 듯이 두드린 미카엘이 문을 열자마자 제 품속으로 뛰어들었을 때만 해도 데미안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잠옷 차림이며 그나마도 단추를 몇 개나 끌러 내 하얀 몸을 드러내고 있다는 걸 알고 나서는 갑자기 피가 차갑게 식는 걸 느꼈다.
당시 미카엘의 나이는 스물두 살.
그가 죄악감에 가장 극심하게 뜯어먹혀 남은 영혼의 살점도 얼마 없던 시절이었다.
「누가 이랬지?」
성가신 강아지처럼 노골적으로 치대던 아이는, 경쾌하게 노래를 부르며 저 좀 봐 달라고 안달하던 소년은, 눈물을 흘리며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고백하던 청년은 이미 그의 안에서 말라 죽어 버린 지 오래였다.
지금의 미카엘이 자의로 이런 옷차림을 한 채 데미안을 한밤중에 찾아올 리 없었다.
「어, 어머니가 제 침실에…… 헐벗은 여자가……..」
결국 왕비가 택한 방법은 미카엘이 여성 경험이 없어서 야회에서 제대로 파트너를 에스코트하지 못하는 것 같으니 침실 교육을 해야겠다며 그의 침실에 창부를 밀어 넣는 거였다.
당시 왕족들은 어린 남자아이를 고급 창부에게 맡겨 잠자리하는 방법을 가르치기도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
데미안은 이를 악물어 애써 차분한 음성을 냈다.
분노로 눈앞이 시뻘겋게 물들었지만,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벌벌 떠는 이를 진정시키려면 먼저 그가 평정을 되찾아야만 했다.
「저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유리시아 신께 맹세코, 전 정말 그 사람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어요!」
미카엘은 눈앞에 있는 이가 심판관이라도 되는 양 데미안에게 처절하게 매달렸다.
「저를 믿으시죠, 선생님……?」
데미안은 눈물에 젖은 축축한 뺨을 손바닥으로 가만히 닦아 주며 그래 하고 답했다.
어떻게 믿지 않을 수 있을까.
이렇게 너덜너덜해져서, 새파랗게 질려서, 바로 죄를 고하러 달려오는 이를.
「난, 당신하고도 입 맞춘 적이 없는데…….」
그 말대로였다.
왕비는 미카엘이 여자하고 자고 나면 남자 따위는 잊어버릴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두 사람은 입맞춤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미카엘은 죄를 지을까 두려워했고, 데미안은 그가 죄악감 때문에 더 고통받게 될까 봐 두려워했으니까.
「전 그저…… 제 마음을 지키고 싶을 뿐이에요, 선생님…….」
데미안은 소리 없이 눈물을 떨어뜨리는 어린 연인을 그저 말없이 바라보았다.
깊은 신앙심도, 또렷한 도덕적 분별도 지니지 못한 데미안은 몸과 마음의 순결이라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누군가와 잠자리를 하더라도 깨끗하게 씻으면 되는 거 아닌가. 어째서 그 하룻밤의 행위로 인해 사람이 더러워질 수 있다는 건지.
데미안은 사람이 과음하고, 약물을 하고, 도박하고,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짓밟고, 거짓말을 할 때 더럽혀지는 거지, 누군가와 잠자리를 했다고 해서 더럽혀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데미안은 그에게 자기 생각을 말하는 대신 그저 기다렸다.
언젠가 미카엘이 저 빌어먹을 종교에 질려서 자기와 함께 먼 곳으로 떠나 실컷 비역질이나 하며 살자고 하면 그래, 하고 답할 생각으로.
「선생님, 제 곁에 계시나요?」
「그래.」
「피곤하실 텐데 죄송해요.」
「죄송하단 말은 이제 지긋지긋하다고 했을 텐데.」
「아, 그랬죠. 죄…… 아니, 감사해요.」
미카엘은 그 사건 이후로 혼자 잠드는 걸 무서워했기에 데미안이 늘 그의 침대 곁을 지켜 주었다.
어느 정도 심신이 안정된 뒤에 미카엘은 이제 방으로 돌아가서 편히 쉬어도 된다고 말했지만, 데미안은 그러지 않았다.
제 앞에서 소리 없이 울던 미카엘의 모습이 머릿속에 콱 박혀서 그에게도 그 사건이 트라우마로 남은 탓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하지 않은 채 그저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답했다.
미카엘은 연인이기 전에 제자였고, 제자이기 전에 존귀한 자였다.
그는 데미안과 동등한 존재가 되고 싶어 했지만, 데미안으로선 그에게 도저히 약한 모습을 보일 수가 없었다.
아마 미카엘도 그걸 은연중에 느꼈겠지. 그러니 지금의 미카엘이 어린애 취급을 질색하는 걸 테고.
「선생님, 전 정말…… 선생님께 감사해요…….」
넓은 궁궐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두 사람에게 같은 편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서로를 꼭 껴안고 날을 바짝 세운 채 주변을 경계하는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을 만나게 해 주신 유리시아께도…… 정말 감사해요…….」
미카엘이 이불 속에 숨어서 흐느끼는 소리를 낼 때면 데미안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눈물을 흘릴 수 없었다. 둘 다 비틀거릴 순 없었으니까. 누군가 한 명이라도 의연하게 서서 붙잡아 줘야만 했으니까.
참 세상사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왕자를 노려보던 데미안이, 이젠 왕자를 온몸으로 보호한 채 주변인들을 노려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나와 함께 도망가자.」
결국 그 말을 먼저 꺼낸 것도 데미안이었다. 그는 언제까지고 미카엘을 기다려 줄 생각이었지만, 상황이 너무 여의치 않았다.
「내가 너 하나 지키지 못할까.」
데미안은 자기가 말하면서도 말에서 확신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죽임당하거나 도망치거나 둘 중 하나였지만, 확률이 지나치게 한쪽으로 쏠린 도박이었다.
수많은 전쟁터에서도 의연했던 데미안이지만, 그는 두려움을 느꼈다.
죽는 게 두려운 게 아니었다.
기껏 존귀한 이를 데리고 도망쳐서는 그를 진창에 처박게 될까 봐 두려운 거였지.
아마 미카엘도 그 두려움을 느꼈으리라.
이번엔 자기가 똑바로 서서 붙잡아 주겠다는 듯 맑게 웃어 보이기까지 한 걸 보면 말이다.
「네, 선생님. 가요.」
어딘가엔 분명 우리를 위한 낙원이 있을 거라고. 미카엘은 자신감 있게 말했다.
마치 꺼지기 전에 가장 강렬한 빛을 내는 불꽃처럼, 드물게도 그의 얼굴이 무척이나 밝아 보였다.
“옆에 있는 게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데미안은 아주 잠시 과거와 현실이 헷갈리고는 했다.
“너나 나나.”
내가 왕자의 침대 곁을 지키던 성기사인지, 아니면 미카엘 없이 살아가던 대천사인지.
“기다린 건 너무 오래인데 함께한 건 얼마 되지 않아서.”
하지만 둘 다 아니다. 이제 다 끝났어.
머리로는 그걸 알면서도 손으로는 자꾸 더듬어 현실을 확인하려 한다.
다리가 잘린 채로 수백 년을 살아오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생긴 다리를 매일 아침 만져 보는 것처럼.
익숙하게 짊어져 온 고통을 빨리 내던져야 하는데, 이제 마냥 즐거워하며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되는데, 그게 생각보다 쉽지가 않았다.
“시간만이 약이겠지.”
데미안의 평소 어조는 최선을 다해 부드럽게 말하는 느낌인데 지금은 적당히 차가우면서 무미건조했다.
“방금 저를 너라고 부르셨네요.”
미카엘이 가만히 지적하자, 데미안은 슥 눈썹을 올리며 물었다.
“싫은가?”
“아뇨. 앞으로도 그렇게 불러 주세요.”
미카엘은 그게 왠지 좋았다.
“선생님하고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들어요.”
이름조차 모르는, 옛날에 좋아했던 것 같은 음식을 먹은 것처럼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데미안은 그저 엷은 미소만 지어 보였다.
먼 옛날에도 데미안은 차기 왕인 그를 너, 라고 불렀었다.
그뿐이랴.
아주 지독한 말로 그를 매도하고, 욕에 가까운 비난을 퍼붓고, 짜증스러운 눈길을 보냈었다.
하지만 그건 미카엘의 영혼이 퀘룸보다 강하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내키면 그러도록 하지.”
결국 그날 기나긴 과정을 거쳐 두 사람은 물총의 총 용량 대신 한 번 장전했을 때 쏘는 탄창 양을 줄이는 데 합의했다.
데미안이 한 번 할 때마다 진이 빠지도록 하니 시작부터 한숨을 쉬게 된다고, 자신에게도 여유를 주면 얼마든지 먼저 원하게 될 거라고 하니 미카엘도 혹한 것 같았다.
그 후 데미안의 삶이 아주 여유로워졌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미카엘은 툭하면 자기가 계약 내용을 한 번 수정해 줬다면서 생색을 냈고, 계약 내용을 바꾸면 먼저 유혹해 주겠다고 하더니 왜 안 해 주느냐면서 찡찡거렸다.
그래도 한 끼에 20개씩 먹던 초콜릿을 아침 점심 저녁으로 대여섯 개씩 나눠 먹으니 훨씬 몸이 편했다.
예전엔 식탁 앞에만 앉아도 한숨이 나왔는데 이젠 제법 먹는 즐거움도 늘어서 미카엘의 바람대로 데미안이 먼저 요구하는 일도 늘었다.
무엇보다 잠들 필요가 없으니 심적으로 안정이 되었다.
미카엘이 늘 데미안과 몸으로 연결된 채 있고 싶어 하는 것처럼, 데미안은 늘 미카엘이 자신의 시야 속에 있어야 안심이 되었으니까.
하지만 서로가 일상 속에 녹아들게 되면 이 불안함도, 두려움도 사라지겠지.
미카엘이 병적으로 섹스를 요구하는 일도, 데미안이 잠드는 걸 두려워하는 일도 점차 줄어들다가 어디에나 있을 법한 연인들처럼 살아가게 되리라.
두 사람이 생전에 바랐던 대로.
죄인처럼 숨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으면서 밝은 하늘 아래에서 연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곳.
누군가에겐 아주 평범한 곳일지 몰라도 그곳이 그들이 꿈꾸던 낙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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