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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는 천칭이 기울길 기다리지 않는다-41화 (4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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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4. 천사는 누굴 위해 기도를 올리는가

「선생님, 저는 천국에 가고 싶은 게 아니에요.

선생님과 함께 지금 생을 살고 싶을 뿐이죠.

하지만 두 분께선 제가 사후에 행복해질 수 있도록 지금 죽으라고 하시는군요.」

데미안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부스러질 정도로 오래된 종이를 바라보다가 두 눈을 깊이 내리감았다.

「선생님, 전 누군가에게 순애를 바치는 게 비정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두 분께선 절 정상으로 만들기 위해 제 몸을 유린하려 하시는군요.」

오래된 종이를 조심스럽게 서랍 안에 넣은 데미안은 세수를 마친 뒤 돌아와 흡사 상복과도 같은 검은 수단을 걸쳐 입기 시작했다.

「선생님, 저는 우리가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죄를 지은 건 오직 저뿐이죠.

전 이제 신을 사랑하지 않으니까요.」

까득. 까득.

좁은 단춧구멍 안에 검은 단추를 끼워 넣은 뒤 데미안은 촛대를 들고 예배실로 향했다.

「선생님.

제 사랑은 오로지 당신 안에만 있어요.

이제 저의 신은 그분이 아니라 당신이세요.

그러니 선생님. 나의 신이시여.

제발 저를 용서하지 마세요.」

아직 해가 뜨지 않았기에 회랑에는 시커먼 어둠만이 자욱했다.

「이제 제 영혼은 신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겠지만, 그거야말로 제가 바라는 바이니까요.

전 영원히 선생님 곁을 떠도는 원혼이 되고 싶어요.

설령 그 길이 제 영혼을 더럽히고 갈기갈기 찢어발기는 가시밭길이더라도 저는 제 영혼을 선생님께 바치고 싶어요.」

촛대를 예단 위에 올려놓은 뒤 데미안은 한 손으로 수단의 아랫단을 갈무리하고 바닥에 양 무릎을 꿇었다.

「선생님.

제 몸은 태워서 하늘에 날려 보내 주세요.

제가 어디에 있어도 당신을 볼 수 있도록.」

그와 자신을 잇듯이.

경건하게 양 손바닥을 맞대고 두 눈을 감았다.

「선생님, 아아, 데미안…….

나의 신이여…….

제발 저를 용서하지 마세요.」

그의 영혼이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창밖에서 들려왔다.

아무래도 소나기가 내릴 것 같았다.

“안녕, 미남 대천사님. 여전히 매일 기도를 올리는 모양이네?”

그림자 속에서 걸어 나온 건 반듯한 인상의 젊은 남자였다.

“기어이 천 년을 채우다니. 정말 대단하단 말이야?”

그의 등 뒤엔 검고 매끈한 날개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 정도 정성이면 지옥에 있다던 당신 연인도 말단 천사 자리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훅.

숨을 불어 촛불을 끈 남자는 천천히 데미안의 주위를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분께서 아무런 계시를 주시지 않는 걸 보면 역시나 그는 구원받을 수 없는 모양이야.”

천천히 허리를 굽힌 남자는 촛불을 끌 때와 마찬가지로 데미안의 뒷덜미에 차가운 숨을 훅 불었다.

하지만 두 눈을 굳게 감은 데미안은 미동조차 없었다.

“어쩌면 그는 당신 몰래 엄청난 죄를 지었던 게 아닐까?”

작게 키득거리면서 남자는 계속 데미안의 귓가에 속삭였다.

“자기 누이를 임신시켰다든지. 아버지를 강간했다든지?”

연극배우처럼 극적인 몸짓으로 허리를 쭉 편 남자가 크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아, 이제 동성애도 죄가 아니라지? 참 대단한 사람이야, 미남 대천사님은. 인간은 죄다 연약한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남자는 아무런 반응이 없는 데미안 때문에 지루한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정도로 마음이 고요하다면 병이야, 대천사님. 무릇 생명체라면 분노하고 좌절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하는 법이라고.”

남자는 엷은 미소까지 머금은 채 데미안의 바로 앞에 주저앉았다.

“정말로 당신이 걱정되어서 하는 말이야. 우리가 인연을 맺은 지도 2백 년이 다 되어 가잖아? 나도 얼마 전에 내면 무기에서 벗어났으니 우린 아주 잘 어울리는 대천사, 대악마 한 쌍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데미안이 긴 속눈썹을 들어 올리고 눈을 뜨자, 남자는 희열에 가득 찬 웃음을 지어 보였다.

“Eenip'ru vlo'ou, mouhtn. (그를 용서해 주십시오, 어머니)

Cline ies Bryns, mouhtn. (위대하시고 자애로우신 어머니)”

하지만 데미안의 검은 눈동자는 남자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먼 곳만을 응시하며 간절하게 기도할 따름이었다.

“Enomie ar'bn elonei des jia. (나의 아름다운 이를 긍휼히 여기소서)”

슬며시 미간을 일그러뜨린 남자는 도로 허리를 세운 채 데미안의 주위를 걷다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갑자기 아, 하고 운을 뗐다.

“그러고 보니 요새 예쁘장한 죄인하고 함께 다닌다는 소문이…… 크읏!”

쿠웅!

남자의 복부에 주먹을 꽂은 데미안이 저만치까지 날아간 그에게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뇌가 터진 새끼하고 말을 섞고 싶지 않아서 무시해 왔더니 얼쩡거리면 안 되는 사람조차 못 알아보는군.”

치렁거리는 수단의 아랫자락을 왼손으로 갈무리한 채 자리에서 일어난 데미안이 여전히 무심한 낯빛으로 상의 단추를 몇 개 끌러 냈다.

“눈알 대신 불알을 달고 다니는 모양이지. 어쩐지 네놈만 오면 역겨운 쉰내가 진동하더라니.”

무려 2백 년 만에 처음으로 돌아온 반응은, 아니, 폭언은 그의 아름답고 금욕적인 외모와 다르게 충격적일 정도로 저열했다.

“아아, 정말 무섭네. 이렇게까지 과민반응할 것까진 없잖아?”

하지만 남자는 피가 섞인 기침을 하면서도 키득거리고 웃었다.

이 무심하고 고고한 대천사가 무미건조한 눈동자로 절 바라본다는 사실만으로도 흥분되는 듯 남자는 금빛 창을 손에 든 채 데미안에게 달려들었다.

“그래도 당신이 상대해 주겠다면 사양하지 않겠다고!”

“넌 모기를 잡을 때 모기를 상대한다고 하는 모양이지?”

가볍게 고개를 옆으로 움직여 남자의 창끝을 피한 데미안이 황금빛으로 물든 오른 주먹을 재차 그의 복부에 꽂았다.

“참 좆밥만이 할 수 있는 쪽팔린 생각이야.”

남자가 나가떨어지기도 전에 무서운 속도로 달려간 데미안이 그의 뒷덜미를 움켜쥔 채 바닥에 세게 내리꽂았다.

쿠웅!

데미안이 재차 주먹을 내리꽂으려는 걸 보고 남자는 재빨리 몸을 굴려 피했지만, 그는 이미 만신창이였다.

“아, 알았어. 알겠다고. 그 영혼의 근처에는 얼씬거리지도 않겠다고 약, 콜록! 약속할, 콜록! 하지!”

뚜벅. 뚜벅.

데미안이 주먹을 거두기는커녕 오히려 구둣발에 힘을 실어 다가오자, 남자가 방어적으로 양손을 들어 보였다.

“난 전직 천사라고. 잊은 건 아니겠지? 고작 악인을 죽이는 것과 악마를 죽이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응?”

어색하게 입꼬리를 실룩거리던 남자가 갑자기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두 눈을 희번덕거렸다.

무어라 유혹해도.

무어라 도발해도.

무어라 회유해도.

무어라 비난해도.

2백 년 동안 반응이 없던 그가 갑자기 이렇게 과민반응한다는 건…….

“그 죄인이라는 게 설마…… 크윽!”

“대천사는 17명이나 되는데 대악마는 오직 한 명뿐이지.”

무표정한 얼굴로 남자의 목을 움켜쥔 데미안은 거칠게 발버둥 치는 그를 위로 들어 올렸다.

“그런데도 정말 어머니께서 형제 살해를 금지한다고 생각하나?”

“그, 그만. 형제여! 내가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다고!”

황금빛으로 번들거리는 손으로 남자의 가슴을 꿰뚫은 데미안은 그의 심장을 움켜쥔 뒤 그걸 그림자 너머로 내동댕이쳤다.

철퍽.

“형제라니. 아주 지랄을 하는군.”

부드러운 목소리와 달리 축 늘어진 남자의 몸을 바닥에 툭 내려놓는 데미안의 손길에선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왜 모기와 형제란 말인가.”

두 손을 깨끗이 정화한 뒤 다시 양손을 모은 데미안이 짧게 기도를 올렸다.

미카엘은 시말서라고 표현했지만, 실상은 단순 보고였다.

대악마를 자칭하면서 신이 얼마나 잔혹하고 변덕스러운지도 모르다니.

어머니께선 형제끼리 살해하시는 걸 금지하신다, 라는 말 자체가 선을 넘은 악마나 천사를 색출하기 위한 덫인지도 모르고.

‘그러니 죄다 내 손에 죽는 거지.’

끼이익.

조심스럽게 예배당 문이 열리자, 데미안이 손수건으로 손을 닦아 내고는 그것을 바닥에 버렸다.

“선생님?”

희미한 빛과 함께 미카엘이 예배당 안으로 들어서자, 두 손을 등 뒤에 감춘 데미안이 천천히 그를 향해 나아갔다.

“벌써 일어났나?”

“방금 이쪽에서 무언가 요란한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요. 제가 잘못 들은 건가요?”

데미안은 이대로 나가자는 듯 먼저 앞서 걸으며 답했다.

“아아, 쥐를 한 마리 잡았다네.”

데미안의 말투는 악마를 상대할 때와 달리 부드럽고 품위 있으면서도 다정했다.

“쥐요? 그럼 시체를 치워야 하지 않나요?”

엷은 미소를 머금은 데미안이 제 곁을 따라 걷는 미카엘을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며 말했다.

“내버려 둬도 되는 시체일세.”

“내버려 둬도 되는 시체가 있다고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린 미카엘이 어두컴컴한 예배당을 한 번 돌아보고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선생님은 가끔 이상한 말씀을 하시네요.”

“그보다 왜 이리 일찍 일어난 건가?”

데미안이 대놓고 화제를 돌린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미카엘은 굳이 그를 추궁하지 않았다. 여태껏 데미안이 그를 여러 번 봐줬으니 한 번 선심 쓰면서 어른스러운 면모를 보여 줄 기회였다.

“잠이 잘 오지 않아서요. 선생님은요?”

눈치 빠른 데미안이 살짝 고개를 까딱여 그에게 감사를 표하고는 미소 지었다.

“난 원래 이 시간에 새벽 기도를 올린다네.”

“불도 켜지 않고서요?”

오른손을 자기 왼가슴 위에 올린 데미안은 성직자라기보다 성기사에 어울릴 법한 위엄 있는 몸짓으로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가 들었다.

“내 안에 빛이 있으니 촛불이 필요하겠나.”

“아하…… 그렇군요.”

애매한 미소를 지어 보인 미카엘이 가볍게 조롱하듯이 말했다.

“선생님께선 인간 등불이시네요?”

데미안은 근사하게 웃음 짓고는 어둑어둑한 복도를 먼저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러니 내 뒤만 따라오면 되네.”

물끄러미 데미안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미카엘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정말 특이하신 분이라니까.”

우뚝.

데미안이 걸음을 멈추자, 그가 자신의 중얼거림을 들은 거라고 착각한 미카엘이 그의 낯빛을 살피며 물었다.

“어…… 선생님? 저한테 화나셨어요?”

누가 보면 데미안이 아주 쥐 잡듯이 잡는 줄 알겠다.

데미안은 단 한 번도 그에게 진심으로 화내 본 적이 없건만, 미카엘은 조금만 분위기가 달라져도 바로 그의 눈치를 보았다.

아직도 더 둥개둥개 얼러 주고 기어오르게 해 줘야 하나 보다.

“운동할 때 입을 만한 옷 좀 가지고 있나?”

데미안이 애정 어린 손길로 미카엘의 뺨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그 농염한 손길에 미카엘은 바로 긴장을 풀고 뜨겁게 녹아내렸다.

“운동, 할 때 입을 만한 옷이라니. 뭔가 선호하는 복장이라도 있으세요, 선생님?”

가슴이 맞닿을 정도로 데미안 앞에 바짝 붙어 선 미카엘이 구두 옆면으로 그의 구두를 슬슬 건드리며 말했다.

“저는 선생님의 수단도 무척 좋아하지만, 다음엔 중세 시대 성기사가 입을 만한 제복을 입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미카엘의 되바라진 요구에 데미안은 검은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말 그대로 운동복 말일세.”

“운동복이요?”

“그래. 오늘은 건전하게 땀을 좀 흘려 줘야겠네.”

이번엔 미카엘이 새파란 눈을 동그랗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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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원래 꽉 잡힌 물고기는 더 배 터지게 먹이를 줘서 둥글둥글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칫... 알겠습니다, 호로롤로롱 님.

제 찜 목록에서 도망가셨지만, 그래도 매편 제 곁으로 돌아와 주시니까 일단 그걸로 만족하겠습니다!

저도 늘 지켜보고 있어요... 아, 아니. 호로롤로롱 님의 행복한 삶을 늘 응원하고 있어요!

(단해의 저주[패시브] 평범한 말을 해도 이상하게 들린다)

선작해 주시고 추천 눌러 주시고 댓글 달아 주시는 모든 독자님들께도 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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