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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남 탓도 때론 도움이 된다
“그런데 제가 검을 다룰 줄 안다는 건 어떻게 아셨죠?”
“보면 알지.”
“어떻게요?”
데미안은 귀를 간질이는 부드럽고 따스한 미카엘의 뺨에 살짝 입술을 갖다 대고는 미소 지었다.
“한쪽으로 쏠리지 않게 좌우 균형을 잘 맞춘 근육이라든지, 중심을 잘 맞춘 걸음걸이라든지, 발바닥에 체중을 싣는 방식이라든지, 팔 근육의 형태나 손마디에 붙은 굳은살의 위치라든지.”
그런 걸 물은 게 아니었는데.
미카엘은 불만스럽게 눈썹을 치켜세웠지만, 어쨌거나 데미안은 답을 했기에 더는 그를 물어뜯을 구실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미카엘은 다른 걸 물었다.
“폼멜 바닥에 무슨 문양이 새겨져 있던데요.”
두 눈을 내리뜬 데미안은 표정이 사라진 얼굴로 답했다.
“이젠 존재하지 않는 왕가의 문양이라네.”
“혹시 선생님의…….”
“그래. 주군께서 몸을 담으셨던 가문의 문양이지.”
내 주군이라니.
무의식중에 이를 악물었는지 잇몸이 다 욱신거렸다.
그가 수백 년 전의 사람이며 이미 죽어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누군가 데미안을 자기 기사로 소유했을 거라 생각하자, 살의가 치밀어 올랐다.
“나의 주군, 이라고는 하지 않았네.”
무의식중에 입 밖으로 말했나 보다.
데미안은 삐쭉 튀어나온 미카엘의 입술을 검지와 중지로 가볍게 꼬집고는 웃음 지었다.
“내가 ‘나의’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사람은 단 한 명 뿐일세. 그게 누구라고 생각하지?”
“저요.”
미카엘이 도로 착하고 성실한 제자로 돌아와 싹싹하게 대답하자, 데미안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꼭 새끼 고양이의 흥미를 끌듯이 검지와 엄지로 연신 미카엘의 뺨을, 턱을, 귀를 가볍게 꼬집으며 물었다.
“자네에게 소중한 존재는 나인가, 아니면 악마인가?”
“선생님이요.”
“그렇다면 악마가 자네에게 접근해 이상야릇한 말로 현혹하려 해도 날 선택하겠군?”
“당연하죠.”
꼭 낯선 사람을 따라가면 안 된다고 유아를 어르는 것 같네.
유렐은 속으로 생각했지만, 미카엘은 좌우로 움직이는 손만 따라가느라 위화감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저렇게 대놓고 어린애 취급을 하는데 참.
“천사나 악마는 일반 무기로는 그리 큰 피해를 줄 수 없다네. 내가 기관총에 맞고도 멀쩡했던 걸 기억하지?”
“아, 네.”
미카엘은 부두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다가 문득 든 의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그러면 저도 총에 맞아도 멀쩡한 거 아닌가요?”
누군가 자신에게 총을 쏘자마자, 데미안이 바로 달려와 몸으로 감싸 주지 않았나?
데미안은 아주 잠시 멈칫했지만, 빠르게 유렐과 눈빛을 교환하고는 대답했다.
“아무 피해가 아니라 큰 피해라고 말했네. 게다가 자네와 나는 내구력이 다르지 않은가.”
“아주 달라요?”
“아주 다르지. 그리고 난 자네가 다치는 걸 원하지 않네.”
“하지만 선생님께서 절 치료해 주시면 되잖아요.”
“미카엘.”
데미안이 더는 교섭할 여지가 없다는 투로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자네가 다치면…….”
“화내실 거예요? 아니면 우실 거예요?”
미카엘이 당돌하게 묻자, 살며시 눈썹을 찌푸린 데미안이 일그러진 웃음을 입가에 단 채 답했다.
“크게 상처받을 것 같네.”
“다치지 않을게요, 선생님.”
미카엘은 그가 이미 상처받기라도 한 양 안절부절못하면서 데미안을 두 팔로 꼭 끌어안았다.
“절대로 다치지 않을게요.”
“그래.”
그 대답을 들은 뒤에야 데미안은 그에게 금빛의 장검을 건넸다.
앞으로 미카엘이 원할 때 언제든 그 무기를 꺼내서 쓸 수 있을 거라고. 누군가 그에게 덤벼들면 상대를 가리지 말고 일단 신기를 꺼내 죽이라고.
데미안은 온화한 낯빛과 달리 냉담한 말로 충고했다.
“그러다 제가 죽이면 안 되는 사람을 죽이면요? 신께서 형제끼리 죽이는 걸 금지하셨다면서요.”
“내가 가서 되살리겠네.”
“하지만 그 사람이 선생님 같은 대천사라면요? 무척이나 높은 사람이라면요?”
“미카엘. 예외란 없어.”
데미안은 다정하게 미소 짓고는 차갑게 말했다.
“설령 신께서 강림하셨더라도 자네에게 무기를 겨누면 죽이란 말일세.”
말없이 두 눈만 깜빡거리던 미카엘이 뒤늦게 눈동자를 굴려 유렐의 안색을 살폈다.
그녀는 이미 한숨을 내쉬면서 자기 이마를 짚고 있었다.
“나와 약속했지? 절대로 다치지 않겠다고.”
“어…… 네에.”
“대천사 급으로 강한 자라면 자네가 속도로 따라잡지 못할 걸세.”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날 밤 데미안은 단 1분 만에 3백여 명을 죽였지만, 누가 살해되는 장면을 목격한 건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이런 비유는 좀 그렇지만, 눈앞에서 싹 모습을 감춘 모기처럼 그의 움직임을 눈으로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틈을 주지 말고 먼저 찌르고 보란 말이네. 뒷수습은 내가 해 줄 테니.”
와, 진짜 막 나가시네.
미카엘은 괜히 유렐에게 다 미안해졌다.
하지만 그가 왜 그렇게 자신을 과잉보호하는지 알 것 같았기에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데미안 앞에선 인간이고 악마고 죄다 물렁물렁한 젤라틴 같았다.
그 말은 다른 대천사 앞에서 미카엘 또한 젤라틴 같을 거란 뜻이었다.
“저, 데미안 님. 미카엘이 신기를 다룰 수 있게 되었다 해도 실전 경험도 없이 악마들을 상대하긴 어렵지 않을까요.”
유렐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을 꺼내자, 데미안이 그녀를 바라보며 답했다.
“안 그래도 제브에게 그를 도우라 일렀네.”
“제브…… 응? 제브가 누구죠?”
유렐도 그의 이름을 몰랐나?
선한 인간이 아닌 자에겐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는 데미안과 달리 유렐은 평범하게 보통 인간과도 교류했기에 같은 천사는 더욱 챙겨 줄 줄 알았는데.
미카엘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데미안이 껄끄러운 낯빛으로 말을 꺼냈다.
“왜, 내가 개라고 부르는…….”
“아아, 응징의 천사장이요. 드디어 그에게 이름을 붙여 주신 건가요?”
그냥 데미안이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아서 몰랐던 것 같다.
그 덕분에 데미안의 고개는 한층 더 아래로 내려갔다.
“……아니, 이미 이름이 있더군.”
“세상에.”
그런데 한 번도 이름을 안 부르셨던 거예요? 아니, 그에게 이름이 있는지도 모르셨던 거예요? 그가 데미안 님을 얼마나 잘 따르는데. 그 어린것이 안쓰럽진 않으셨어요? 그렇게 존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데 정말 일말의 정도 느껴지지 않으셨어요? 아무리 그가 천사 태생이 아니라고 해도 세상 모든 남자와 여자가 데미안 님에게 반하진 않아요. ‘내가 조금만 다정하게 대해 주면 바로 나에게 반하겠지?’라는 우려가 정말로 놀라워요. 뭐, 상당수가 반할 거라는 건 알지만요. 그래요. 마음 편하게 친절도 베풀지 못할 정도로 미남이신 게 죄죠. 어머니께서 잘못하셨네요.
참으로 많은 의미가 담긴 ‘세상에’였다.
“데미안 님, 그와 알고 지낸 지 2백 년이 넘지 않으셨나요?”
“그렇게 오래 알고 지내셨다니.”
미카엘이 두 손으로 꼭 데미안의 팔을 붙들면서 해사하게 웃었다.
“선생님께서 그 사람을 다정하게 이름으로 부르셨다면 제가 엄청나게 질투했을지도 모르겠어요.”
“세상에.”
저걸 감싸려고 들다니. 심지어 어머니께서도 저분의 무심함을 두둔하진 않으시는데. 미카엘, 당신의 튼튼한 선생님보다 그 어린 천사가 더 안쓰럽지 않나요? 그는 2백 년 넘게 개라고 불렸는데요. 그게 당신의 질투를 막기 위함이라고 주장할 셈인가요? 그건 오명을 뒤집어쓰는 수준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하지만 당신이 그걸로 만족한다면, 그래요. 둘이 참 잘 만난 것 같네요.
참으로 많은 의미가 담긴 ‘세상에’였다.
“신령들에게 하리엘의 위치를 알아봐 달라고 했으니 그들이 돌아오면 신전을 비울지도 모르겠네.”
“얼마나요?”
“글쎄. 길어야 사나흘이겠지.”
“사나흘이라고요!”
미카엘은 그가 절 영영 떠나 버리겠단 말을 듣기라도 한 양 충격받은 얼굴로 데미안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바로 돌아오실 수 있는 거 아니었어요?”
“미카엘.”
“저녁때까진 집에 오실 수 있는 거 아니었냐고요!”
미카엘의 새파란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자, 데미안은 난감한 얼굴을 하면서도 대답했다.
“미카엘. 난 자네의 일방적인 선언에 그러겠다고 대답한 기억이 없는데.”
슬며시 미간을 구긴 미카엘은 두 사람이 나누었던 대화를 반추해 보고는 젠장, 하고 욕설을 뱉었다.
그러고 보니 데미안은 그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미끈한 뱀처럼 대화에서 슥 빠져나갔을 뿐.
“데미안 님의 신력이라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반나절 만에 다녀오실 수 있지 않나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아군을 발견한 미카엘이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홱 고개를 꺾어 유렐과 데미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데미안은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말라는 눈초리로 유렐을 노려보았지만, 미카엘이 옆에서 선생님, 하고 부르자 엄한 눈빛을 거두었다.
“그게 사실인가요?”
자길 물어뜯어 대는 새끼 고양이를 난처한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고개만 뒤로 빼는 유순한 대형견처럼 데미안은 제게 달려드는 미카엘에게서 슬쩍 고개만 뒤로 뺐다.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그럼 왜 3일이나 걸릴 수도 있다고 하신 거예요? 그 남은 시간 동안 대체 뭘 하시려고요?”
사나흘이라고 말했으니 4일이 될 수도 있는 건데 그걸 또 하루 깎아 버리는 게 참 웃겼다.
“정말로 제가 당신을 믿어도 되는 건가요? 선생님.”
데미안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의 말을 콱 잡아챈 미카엘이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다.
“그건 제가 보증할 수 있어요, 미카엘.”
살며시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유렐이 바짝 독이 오른 미카엘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손으로 쥐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전 데미안 님처럼 신실하신 분은 본 적이 없어요.”
유렐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데미안을 한 번 돌아보고는 한숨을 섞어 말했다.
“미카엘, 당신도…… 언젠가 알게 될 거예요.”
신의 응답만을 기다리는 간절한 신도처럼 데미안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미카엘에게 유렐은 살짝 짓궂은 웃음까지 지어 보였다.
“그때 가서 울면서 후회하지 말고 의심을 거두세요. 죄송하다고 사과도 드리고요.”
유렐의 유의미한 말이 어쩐지 피할 수 없는 예언처럼 느껴졌기에 미카엘은 고개를 떨구면서 데미안에게 사과했다.
“죄송해요.”
“그래. 괜찮네.”
데미안은 늘 그랬듯이 그를 너무나도 쉽게 용서해 주었다.
“하리엘이 현재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다르네. 그가 너무 멀리 있다면 한 번에 많은 신력을 사용하게 되니 신력을 회복해 가며 천천히 다녀오겠단 뜻이었네.”
“한 마디로 하루 만에 다녀오실 수 있단 이야기잖아요.”
미카엘이 참지 못하고 불만을 터트리자, 데미안이 애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가 미카엘을 어르기 전에 유렐이 먼저 입을 열었다.
“데미안 님께서 적정 신력을 유지하시려는 이유가 혹여 블람을 경계해서인가요?”
“그래. 그분이 나의 미카엘에게 관심을 두지 않으실 리 없으니.”
블람? 왜 갑자기 그 신 이야기가 나오지?
데미안은 의아한 눈으로 절 바라보는 미카엘을 조심스러운 손길로 쓰다듬으며 빙긋 웃었다.
“아무리 나라 해도 신과 싸울 땐 상당한 양의 신력을 쏟아부어야만 하거든.”
아, 진짜로 신하고도 싸우시는 분이었구나. 난 정말로 봐주시는 거였어.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되도록 빨리 돌아오시고요.”
두 눈을 내리뜬 미카엘은 미련을 버리지 못해 데미안의 옷자락을 꽉 쥐면서도 고분고분한 태도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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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거의 매편 꾸준히 댓글을 남기며 천천기기에 많은 애정을 보내 주고 계신 분이 있어요.
나중에 이북을 출간하게 되면 이북 쿠폰을 보내드리고 싶어서 9월 1일에 쪽지를 보내드렸지요.
하지만 그 쪽지가 너무 장문이어서 집착광공의 스멜을 느끼고 두려워지신 걸까요?
아니면 쪽지에 "그러니 꼭 답신 부탁드릴게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음. 마지막 말은 좀 뺄까요? 꼭 집착스토커공 같네요..." 따위의 망발을 집어 넣어서 위험을 감지하신 걸까요.
고작 22편 올려놓고 이북 쿠폰을 보내주겠다는 놈이 배추 씨앗을 심으면서 "언제 한 번 같이 김칫국 마셔요." 하고 플러팅하는 미친놈처럼 보여서 주저하신 걸까요.
쿠폰을 보낼 수 있도록 이메일 주소를 보내 달라면서, 이메일 주소는 쿠폰 누락이 잦으니 핸드폰 번호를 알려 주시면 더욱 좋다는 말이, 은근슬쩍 작업을 거는 것처럼 보여서 못 본 척하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거란 생각이 드셨기 때문일까요.
그분께선 집착광공의 마수에 걸려 들었단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아방수처럼 여전히 해맑게 매편 댓글 출첵을 하고 계시지만, 제 쪽지를 열어 봐 주시진 않네요...
이 사연의 주인공이신 호로롤로롱 님을 모십니다!
***
혹여 작품 후기를 안 읽으실까 봐 본문에 올렸습니다.
다른 독자님들께 사과 말씀을 올립니다.
호로롤로롱 님께서 확인했다는 의미로 삐삐를 쳐 주시면 위 내용은 바로 작품 후기로 옮길게요.
그래도 저 오래 기다렸어요. 그렇죠?
아니, 시발. 위에 말이 왜 이렇게 께름칙하게 들리지?
그런 의미 아닙니다.
그냥 기다렸다는 뜻인데 야마가 돈 광공처럼 보일 뿐이에요.
저는 다정공입니다.
히... (예쁜 짓을 할 줄 몰라서 그냥 대충 괄호 안에 애교라고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