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사는 천칭이 기울길 기다리지 않는다-38화 (38/106)

38

3. 남 탓도 때론 도움이 된다

데미안의 마음이 아주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기에 유렐은 말없이 입술을 잘근거렸다.

지난 천 년간 데미안은 냉혹한 심판자일지언정 그 누구보다 어머니께 헌신적인 대천사였다.

그가 독실한 신자라거나 신앙심이 충만한 사람이라서가 아니었다.

그는 그저 지옥에 떨어진 어린 연인을 구원하기 위해 어머니 앞에 엎드리고 머리를 조아렸다.

유렐은 인간의 마음이 쉬이 변하며 그중에서도 연심은 칼로 얇디얇은 실을 끊어 내는 것만큼이나 쉽게 잘라 낼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유렐은 무려 4천 살이 넘었지만, 평생 서로만을 사랑하다가 죽은 연인들은 그사이 몇 번 보지도 못했으니까.

그리하여 데미안에게도 무척이나 회의적이었다.

안 그래도 인간 남성은 육체적인 자극에 약한데 데미안은 어머니의 안배로 성욕까지 고스란히 지니고 있었으니 그가 옛 연인을 잊고 새 출발을 염원하게 되더라도 유렐은 그에게 실망하지 않을 것 같았다.

데미안은 이미 옛 연인을 위한 도리를 다했다.

그는 무척이나 매혹적인 남자였지만, 제게 벌과 나비처럼 몰려드는 이들을 마다하고 수도원에 거의 자기 자신을 감금하다시피 한 채 평생 벽에 주먹질이나 하며 살았으니 말이다.

역사에 그가 맨손 격투술, 일명 권법이라 불리는 전투술을 창시한 괴짜로 남았다는 게 그저 우스울 따름이다.

데미안이 생전에 초상화 한 장만 남겼더라도 그에 대한 평가는 오로지 외모와 관련된 것만 남았을 텐데.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시는 건가요?」

데미안이 천사가 된 후 8백 년이 지났을 때 유렐이 그에게 물었다.

「어머니께선 단 한 번도 지옥에 떨어뜨린 영혼을 구원해 주신 적이 없으세요.」

데미안은 그 말을 듣고 분노하지도, 절망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벽에 주먹질해 댔던 것처럼 여상스럽게 기도를 올릴 따름이었다.

기도를 마친 후 그는 유렐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건 두고 봐야 알겠지.」

그날 유렐은 난생처음으로 인간의 집념에 두려움을 느꼈다.

하기야 인간은 이상한 곳에서 집념을 발휘하기도 했다.

신께서 그에게 어떠한 계시도 내려 주시지 않았는데 그저 그분이 날 이끌어 주실 거라 믿으며 묵묵히 순교하는 인간들이 그러했다.

데미안의 조용한 광기는 그것과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데미안 님은 정말 대단하시군요.」

결국 그는 천 년에 걸쳐 미카엘 몫의 죗값을 모두 치러 냈다. 어머니가 미카엘을 이 세계로 되돌려준 것이 그에 대한 답이었다.

이제 남은 건 지나치게 순결한 영혼이 자기 자신을 용서하게 만드는 것뿐이지만…….

그거야말로 가장 험난한 임무가 되리라.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될수록, 데미안을 향한 연심이 깊어질수록, 미카엘은 점점 더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게 될 테니까.

하지만 데미안이라면 또 한 번 해내겠지.

그는 천칭이 기울길 기다리는 천사가 아니었으니 그 위에 자기 몸을 올려서라도 미카엘을 높은 곳으로 이끌어 주리라.

만일 미카엘이 갈 수 있는 천국이 없다면 새로운 이상향을 자기 손으로 만들어 낼 만한 남자가 바로 데미안이었다.

그만큼 무서운 집념의 남자였다.

「이쪽은…… 내 소중한 객이라네. 부디 신경 써 주길 바라네.」

데미안이 길 잃고 헤매던 미카엘의 손을 잡고 신전 안으로 들어왔을 때 유렐은 어쩌면 그가 너무 기뻐서 미쳐 버릴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하지만 데미안은 거의 천백 년 만에 만나게 된 어린 연인을 눈앞에 두고도 무섭도록 침착했다.

그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보고 싶었다고 소리쳐서 미카엘을 놀라게 하는 대신 그에게 묘한 여지를 주면서도 몸을 뒤로 뺐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이미 자신의 것이라는 걸 모르는 미카엘은 완벽한 남신과도 같은 이를 손에 넣기 위해 안달복달했다.

그 근사한 남자가 밤낮으로 자신을 감시, 아니 과보호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채 미카엘은 길에서 ‘우연히’ 데미안과 만나기라도 하면 주인을 만난 개처럼 그에게 기쁘게 달려들었다.

미카엘을 향한 데미안의 마음은 이미 꽉 차서 더는 살 만한 호감도 없건만, 미카엘은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열심히 선물을 사다 바치고 꾸준히 술을 먹여 댔다.

술에 취하지도 않는 대천사가 살짝 비틀거리는 척을 하면 미카엘의 화사한 얼굴은 미약한 죄악감과 강한 흥분으로 발개졌다.

차라리 데미안이 손이 닿지 않는 아주 높은 곳에 있다면 모를까.

은근슬쩍 어깨 위에 손을 올려도, 손등을 어루만져도, 허리에 팔을 감아도, 뒤를 졸졸 따라다녀도 데미안이 거부하지 않자, 미카엘은 좋아서 몸부림을 치다가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아, 너무 좋아요. 당신은 정말 완벽한 남신이에요. 사랑해요. 제발 나의 것이 되어 주세요. 아니, 나를 당신의 것으로 해 주세요. 난 당신의 포로이니 아무거나 명령해 주세요. 당신을 떠나라는 명령만 말고요.’

수백 개의 별을 박아 넣은 것만 같은 푸른 눈동자가 감출 수 없는 연심을 뚝뚝 떨어뜨렸지만, 데미안은 지독하다 싶을 정도로 참을성 있게 미카엘을 길들였다.

객관적으로 놓고 보면 정말 안쓰러운 건 천백 년 넘게 그를 기다려 온 데미안인데, 침을 뚝뚝 떨어뜨리면서도 그의 눈치를 보며 기다리는 미카엘이 더 불쌍해 보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데미안이 먼저 몸을 내주는 대신 1년에 걸쳐 인간적인 신뢰감을 심어 준 건 정말 현명한 판단이었다.

데미안을 향한 욕구는 엄청나게 강렬한 주제에 미카엘의 연심은 꼭 어린애가 접은 종이배처럼 유치하면서도 연약했으니 말이다.

“걱정할 필요 없네. 미카엘은 나와 달리 진정으로 독실한 사람이니 그가 어머니께 무기를 겨눌 일은 없을 걸세.”

데미안은 천천히 숨을 고르며 머리를 들어 올리는 미카엘을 깊은 애정이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내가 4백 년에 걸쳐 해낸 일을 단 1년 만에 해내다니.”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심호흡을 하던 미카엘이 천천히 푸른 눈동자를 드러내며 두 발로 곧게 서자, 데미안이 그를 부드러이 안아 주었다.

“스승을 기쁘게 할 줄 아는 제자로군.”

땀에 젖어 척척해진 옷이 불쾌했지만, 미카엘은 무척이나 가벼워진 마음으로 데미안을 마주 끌어안았다.

“선생님께 귀염받고 싶은 제자라서요…….”

물에 빠진 사람처럼 필사적으로 붙잡는 게 아니라, 구원을 바라는 사람이 매달리듯이 붙잡는 게 아니라, 그저 두 발로 똑바로 선 두 사람이 마주 껴안는 듯한 포옹이었다.

“정작 귀여워해 주면 할퀼 거면서.”

“야옹.”

데미안은 장난스레 대꾸하는 미카엘을 애틋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나의 미카엘.”

“네, 선생님.”

“이미 몇 번이나 말했지만, 난 자네가 정말 존경할 만한 존재라고 생각하네.”

내면 무기 탓에 피가 철철 나는 곳을 따스한 말이 덮어 주자, 미카엘이 입술을 질끈 깨물면서 고개를 떨궜다.

하지만 빈말이 아니었다.

데미안은 그가 강한 영혼이라는 걸 단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

데미안이 기도하는 만큼 판결이 하루 유예되었지만, 그가 구원받는 걸 포기했다면 그 기도는 진작 쓸모없게 되었을 테니.

양자 모두가 동의해야만 가능한 유예였다.

그나마 데미안은 안락한 신전에서 기도를 올릴 수 있었지만, 미카엘은 기약도 없이 그저 지옥에서 기다려야만 했으니 더 고통스러웠으리라.

하지만 데미안이 내 마음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는 걸 기도로서 보내면, 미카엘은 당신이 그러하다면 나 또한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걸 하루 유예라는 화답으로 돌려보냈다.

한 사람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둘 다 미친 자였기에 악착같이 버티다가 마침내 손을 맞잡게 된 거였다.

“선생님. 아까 개자식이라고 욕해서 죄송해요.”

기분 좋은 안도감 속에서 숨을 고르던 미카엘이 두 눈을 내리뜬 채 사과했다.

“선생님이 이유도 없이 절 괴롭히실 만한 분이 아니라는 걸 잘 알면서…….”

응석을 부리듯이 데미안의 어깨에 뺨을 비벼 댄 미카엘이 자조적인 한숨을 섞어 말했다.

“전 왜 이렇게 성질이 급하고 못된 걸까요…….”

데미안은 다정한 손길로 그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원래 그런 새끼인 걸. 새삼스럽게.”

잠시 말이 없던 미카엘이 데미안의 어깨를 이로 꽉 깨문 채 입술이 눌린 소리를 냈다.

“선생님, 빈말로라도 괜찮다고 해주세요.”

“괜찮네.”

“용서한다고도 해 주세요.”

“용서하겠네.”

강제로 허락을 받아 낸 뒤에야 만족한 듯 미카엘은 완벽한 남신의 어깨를 입에서 뱉어 냈다.

“자네 외면 무기가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했나?”

“아마도 분노……인 거 같아요.”

데미안에게 화가 날 때마다 안쪽으로 향하던 칼날이 바깥으로 향한 걸 느꼈다.

정녕 이런 게 외면 무기가 되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무기의 정체성에 얽매이지 말게. 분노든, 투쟁심이든, 방어 본능이든, 응징이든, 징벌이든, 두뇌를 자극하는 전기 신호라는 건 변함이 없으니.”

미카엘이 뭘 걱정하는지 잘 알겠다는 듯 데미안이 먼저 말을 가로챘다.

“어떠한가. 남 탓도 때론 도움이 되지?”

데미안은 가벼이 웃고는 시무룩해진 미카엘을 위로해 주고자 그의 뺨에 쪼는 듯한 입맞춤을 했다.

=============================

※ 조아라에 게시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에 의거 보호받고 있습니다 ※

※ 저작권자의 승인 없이 작품의 일부, 또는 전부를 복제, 전송, 배포 및 기타의 방법으로 이용할 경우,손해배상 청구를 포함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됩니다. (5년 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작품후기]

청섬// 하.. 이거때문에 노블 결제했어요....ㅠ

아이코! 정말 감사합니다, 청섬 님ㅠㅠ

청섬 님처럼 사랑해 주시고 응원해 주시는 분들 덕분에 힘을 내서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정말 독자님들께 이런 말씀을 들을 때마다 이야기를 끝까지 잘 마무리해서 좋은 기억으로 남겨 드려야지, 하고 생각한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늘 잊지 않고 추천 눌러 주시고 또 힘내라고 응원 댓글 달아 주시는 모든 독자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