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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는 천칭이 기울길 기다리지 않는다-36화 (36/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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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남 탓도 때론 도움이 된다

유렐은 두 사람을 늘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면서도 이따금 결혼을 종용하듯 네 번째 손가락을 힐끔거려 댔기에 둘은 내심 그녀를 불편한 친척 어른처럼 여겼다.

아직 그럴 때가 아니건만, 성질이 급한 맹약의 천사는 두 사람이 잠자리도 같이했으니 일단 맹약을 나눴으면 하고 바라는 것 같았다.

데미안은 결혼이란 말만 들어도 안색이 새파래지는 미카엘을 위해 그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하려다가 관두었다.

그가 아예 견디지 못할 정도로 심하게 압박을 받는다면 모를까.

입을 굳게 다물고 참을 수 있을 정도라면 어느 정도 과거와 연결된 단서에 노출되어야 한다는 게 데미안의 생각이었다.

너무 싸고만 돈다면 미카엘은 영영 심연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될 테니 말이다.

마음 같아서는 그가 준비될 때까지 몇백 년이고 느긋하게 기다려 주고 싶지만, 데미안에겐 시간이 얼마 없었다.

벌써 1년을 허비했으니 남은 건 이제 2년. 만일 그 안에 결착이 나지 않는다면…….

「나와 함께 도망가자.」

어쩌면 과거에 했던 말을 한 번 더 그에게 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내가 너 하나 지키지 못할까.」

이번에야말로 꼭 세상 끝까지 도망가자고.

데미안은 어린 연인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데미안 님. 이제 손님까지 계시니 저보다 전투에 능한 천사를 곁에 두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혹여 높은 탑이 무너질까 걱정되었는지 책상 위에 문서 다발을 세 개의 탑으로 나눠 올린 유렐이 눈짓으로 미카엘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제야 상념에서 벗어난 데미안이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시도 데미안을 풀어 두지 못하는 이가 그 잠깐 사이에 데미안이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궁금해서 미칠 것만 같다는 시선을 보내 왔지만, 데미안은 일부러 눈치가 없는 척 그 시선을 무시했다.

어차피 대답할 만한 말이라곤 네 생각이라는 것밖에 없기도 하고.

“이전까지는 미카엘이 늘 데미안 님과 함께 다녔지만, 이젠 따로 일도 다니잖아요?”

자기 이야기가 나오자, 비로소 날카로운 시선을 거둔 미카엘이 평소와 같은 낯짝으로 유렐을 바라보았다.

개구리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할 것만 같은 순한 도련님 같은 얼굴을, 그러니까 내숭을 떠는 얼굴을 말이다.

“제 신변이 걱정되시는 거라면 상담 일을 그만둬도 괜찮아요. 어차피 돈도 그쪽이 아니라 투자 쪽에서 벌고 있었으니까.”

비단 데미안뿐만 아니라 유렐 또한 요 근래 악마들이 미카엘에게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걸 느꼈기에 그녀는 내심 데미안이 그러라고 답하길 바랐다.

아마 악마들도 천 년 동안 그 누구도 꺾어 보지 못한 대천사의 유일한 약점이 그라는 걸 알게 된 것이리라.

심지어 미카엘은 자기 자신이 악마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에 그들이 동료 운운하며 접근한다면 순진하게 속아 넘어갈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심리학 연구는 잘 되어 가나?”

데미안은 그에 답하는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관심 있는 분야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미카엘은 살짝 안색을 밝혔다.

“네. 아주 흥미로운 분야예요. 역사가 오래되지 않은 학문이라 그런지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학설이 아직 적은 데다 학설의 변동도 너무 크고 위험한 임상 시험이 실제로 이뤄지고 있다는 게 윤리적으로도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도 있는데요. 제가 가장 의미 있게 읽은 책에서 그러더라고요. 심리학은 하나로 다룰 수 없는 광범위한 과학적 분야를 다루는 학문이며 생리학과 사회학을 동시에 다루기에 어느 한쪽에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자주 판도가 뒤집힐 수 있는 불완전한 학문이라고요. 심리 상담과 함께 다뤄져야 하는 약학 분야가 아직 균등하게 발전하지 않아서…….”

자신이 너무 흥분해서 지껄여 댔다고 생각했는지 미카엘이 애매하게 말꼬리를 흐렸다.

“……많은 환자들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게 안타까워요.”

데미안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후 기도하듯이 두 손을 마주 모았다. 이윽고 그의 손바닥 사이에서 길고 매끈한 장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럼 계속해야지.”

철컥.

미카엘은 그가 건네는 검을 얼떨결에 받아 들었다.

“더 많은 환자들을 구할 수 있을 때까지.”

짙은 선홍색의 가죽끈 위에 찬란한 금빛 실로 수를 놓은 검잡이. 어디에서 본 적이 있는 것만 같은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폼멜.

일전에 데미안이 빌려주었던 장검이었다.

“데미안 님, 설마 미카엘더러 악마와 싸우라는 건…….”

우려 섞인 목소리를 내는 유렐을 말끔히 무시한 채 데미안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 검의 이름은.”

“검에도 이름이 다 있나요?”

데미안은 순진한 얼굴로 묻는 미카엘을 지그시 들여다보면서 잔혹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인퀴지터(Inquisitor 이단심판관)라고 하네.”

차가운 심판관의 손아귀가 뒷머리를 잡아챈 것처럼 갑자기 소름이 돋으면서 온몸이 덜덜 떨려 왔다.

“내가 이교도들을 수없이 죽일 때 쓰인 검이지.”

그만 손가락에서 힘이 풀려 버렸는지 미카엘이 검잡이를 놓치자, 데미안이 그의 손등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두려운가, 미카엘?”

반강제로 미카엘의 손에 검을 들려 준 채 데미안은 그를 시험하는 듯한 부드러운 어조로 속삭였다.

“겁이 난다면 옷장 안에 들어가 있어도 괜찮네.”

그 다정한 저음이 너무나도 유혹적으로 들려서 오히려 두려움이 앞섰다.

“자네가 무릎 사이에 머리를 박고 있는 동안 내가 나가서 모든 적들을 처리하고 돌아올 테니.”

축축한 가죽의 감촉이 꼭 피에 젖은 사람 피부처럼 느껴졌다.

두 눈을 질끈 감자, 뻥 뚫린 검은 눈에서 피눈물을 질질 흘리며 우린 아무 죄도 짓지 않았다고 울부짖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나의 무력한 미카엘.”

신실한 대천사의 말이 굵은 쇠사슬이 되어 팔다리를 결박한 채 뒷머리를 난폭하게 찍어 누르자, 미카엘이 바닥에 쿠웅, 하고 양 무릎을 꿇었다.

마치 속박된 죄인처럼.

“자네 같은 순결한 자가 검을 쥘 필요는 없지. 아니 그런가?”

차가운 바닥에 이마를 박은 채 미카엘은 거대한 인간의 손가락에 눌린 미약한 벌레처럼 발버둥을 쳤다.

이제 그를 잠식한 건 두려움이 아니라 분노였다.

“순결하다고? 하, 나한테 뒤를 따먹힌 사람이 잘도 그딴 소리를 하네요.”

데미안은 타이트한 청바지 덕분에 더욱더 보기 좋아 보이는 미카엘의 탄탄한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쓱 쓸면서 빙긋 웃었다.

“여긴 순결하지 않나.”

철컹.

굵은 쇠사슬 하나를 끊어 낸 미카엘이 정색하면서 데미안의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

“감히 어딜 만지는 거지?”

그래. 나의 미카엘이라면 이래야지.

온순하게 뒤를 만져도 좋다고 허락하는 게 아니라 악을 쓰면서 덤벼들어야지.

그는 자기보다 커다랗고 육중한 기사들을 자기 발밑에 무릎 꿇린 채 그 뒷머리를 밟는 걸 좋아하는 어린애였다.

한마디로 시건방진 애새끼였다.

「죄, 읏…… 죄송해요…….」

지랄 맞은 교리가 그의 머리에 죄악이라는 말뚝을 박아 그의 머릿속을 곤죽으로 만들어 놓기 전만 해도 미카엘 또한 저 하늘에 반짝이는 것이었다.

「죄송해요, 선생님…… 죄, 읏, 죄송해요…….」

좆같은 종교가 그의 날개를 찢어발긴 뒤 그 깨끗한 등을 난도질해 놓기 전만 해도 미카엘 또한 저 하늘에 반짝이는 것이었다.

“자네 두 발로 서게.”

더러운 지상으로 추락해 버린 그의 왕을 다시 높은 자리에 올려놓기 위해 데미안은 그 앞에 머리를 숙여 보였다.

이걸 밟고 올라가라고.

더욱더 강한 욕망에 사로잡혀 고귀한 대천사를 범하고, 더욱더 이기적으로 굴면서 교만을 떨고, 더욱더 시건방진 웃음을 지으라고.

‘그래. 더 많은 죄를 지어라. 이제 내겐 널 심판하러 오는 자들을 모조리 도륙할 힘이 있으니.’

데미안은 더없이 다정한 눈빛으로 미카엘을 바라보면서 미소 지었다.

너 하나만 제자리로 되돌려 놓을 수 있다면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듯이.

“부축이 필요한가, 어린 도련님?”

뒤로 한 걸음 물러서던 데미안이 짐짓 무언가를 떠올린 듯 우아하게 한 손을 내밀어 보이자, 이를 악문 채 숨을 고르던 미카엘이 육중한 중력에 대항하듯 두 손으로 무릎을 짚은 채 천천히 머리를 들어 올렸다.

“그 잘생긴 얼굴을 구둣발로 짓밟아 버리기 전에 그 입 다무는 게 좋을 거야, 선생.”

빙긋 웃은 데미안은 왕의 명령을 받은 신하처럼 과장된 몸짓으로 허리를 숙여서 미카엘이 더욱 악에 북받치게 했다.

“한 살의 명에 따르겠네.”

“젠장! 내가 기어오르지 말라고 했지!”

마침내 모든 쇠사슬을 끊어 내고 자력으로 일어선 미카엘이 미지근한 땀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사나운 어조로 말했다.

“이 검은 제가 거둬 가도록 하죠. 당신이 이걸 가지고 또 시건방지게 굴지도 모르니.”

미카엘의 얌전한 가면만을 봐 온 유렐은 그 과격한 발언에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눈동자를 굴려 데미안의 안색을 살폈지만, 의외로 그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러도록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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