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사는 천칭이 기울길 기다리지 않는다-35화 (35/106)

35

3. 남 탓도 때론 도움이 된다

똑똑똑.

주섬주섬 옷매무시하던 미카엘은 긴장감과 안도감으로 가슴께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아, 2차전으로 가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데미안 님.”

문밖에서 들려온 건 유렐의 목소리였으니 말이다.

데미안 신부라는 호칭 대신 데미안 님이라고 부른 걸 보면 대천사에게 용무가 있는 모양이었다.

흘깃 돌아본 데미안은 그리 동요한 것처럼 보이지 않아서 미카엘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선생님, 알고 계셨어요? 아.”

당연히 알았겠지.

신전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부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다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다.

유렐이 1층 계단에 발을 올리기만 했어도 데미안은 바로 알아차렸을 거다.

“그런데 왜…….”

서두르지 않았느냐고 물으려다가 미카엘은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데미안이 당황한 얼굴로 허겁지겁 옷을 주워 입는 모습이 영 상상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온갖 변태적인 망상도 짜낼 수 있는 미카엘이지만, 그의 풍부한 상상력 속에서도 데미안은 겁을 먹거나 두려워하거나 안달복달하지 않았다.

그런 건 감히 상상해서도 안 되었다.

새파란 하늘을 뒤덮은 것이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을 간직한 바다이며 머리 위에서 철썩 파도가 치는 걸 상상하려 드는 것처럼 말이다.

더 깊이 떠올렸다간 공포감에 정신이 이상해질지도 몰랐다.

“미카엘.”

다행히 하늘은 무시무시한 바다가 아닌 고요한 푸른빛으로 덮여 있었고, 데미안이 불안한 낯빛으로 부랴부랴 옷을 입는 일도 없었다.

찢어진 셔츠를 느긋한 손길로 휴지통에 집어넣고 옷장 문을 연 데미안은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들어오라고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안으로 들어오지 않아.”

그렇게 겁먹을 필요는 없다고 말하는 대신, 이 관계를 죄악처럼 여길 필요는 없다고 말하는 대신, 데미안은 그에게 일러 주었다.

미카엘이 아주 단단한 성벽으로부터 보호받고 있다는 걸 말이다.

“저, 유렐에게 대답이라도 해 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여전히 미카엘은 문밖에서 그들을 기다릴 유렐을, 보이지도 않는 적을 힐끔거리며 초조해했다.

“저희가 여기에 있다는 걸 모르실 수도 있잖아요.”

“아니까 부르는 거라네.”

예사로운 답변은 데미안의 묘한 미소 탓인지 어딘가 유의미하게 들렸다.

“사람들은 기도할 때 거기에 당연히 신이 계실 거라고 생각하지 않나.”

아아, 역시 다른 의미가 숨겨진 답이었다.

데미안은 때때로 일상적인 대화 속에 교리의 진리 따위가 숨겨진 선문답을 미카엘과 주고받고는 했다.

하지만 그 선문답은 거의 항상 미카엘을 불만스럽게 했다.

“하지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고 해서 내가 반드시 대답해야만 하나?”

미카엘이 실제로는 연애 한번 해 본 적 없으면서 상상만으로 달곰한 연애 소설을 쓰는 소설가와 같았다면, 데미안은 온갖 치정 싸움을 현실의 법정에서 다뤄온 법관과 같았다.

데미안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부드럽고 온유했지만, 그것이 이룬 말은 지독하게 냉정했다.

“기다림은 날 찾아온 그들의 몫이지.”

“그런 건 불공평해요.”

미카엘은 자기가 사춘기 소년 같은 말투로 대꾸했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바로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늘 그랬듯이 그의 태도를 문제 삼지 않았다.

그는 그저 느릿느릿한 손길로 단정한 셔츠에 단추를 채우며 담담히 답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신께서도 그러시는걸.”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신성 모독이었다.

하지만 미카엘도 그 속에 숨겨진 뜻을 모르고 불공평하단 말을 입에 올린 건 아니었다.

신이라면 기도를 들어 줘야죠.

울면서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을 언제든 받아줘야죠.

미카엘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불만도 그거였다.

“자네 말대로 이 세상은 불공평하지. 애초에 신과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부터가 불공평한걸.”

“서, 선생님. 그런 말씀을 하시면…….”

미카엘은 저 위에 계신 누군가가 저희를 감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지 살짝 목소리를 낮추기까지 했다.

“우리가 행하는 선은 가진 자를, 높은 곳에 있는 자를, 강제로 끌어내려서 같은 위치에 세우는 게 아니라네.”

하지만 데미안은 거리낄 것이 없다는 듯 도리어 여유롭게 미소 짓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해서 없는 자가, 낮은 곳에 있는 자가, 무언가를 욕망하거나 평등을 꿈꾸는 걸 악이라고 하지도 않지.”

딱히 힘주어서 발음하는 것도 아닌데 귀에 안정감 있게 흘러드는 매끄러운 저음이 무척이나 듣기 좋았다.

“유리시아 신께선 능동적인 선을 추구하고, 수동적인 악은 굳이 처벌하지 않으신다네. 그 차이를 알겠나?”

미카엘은 꼭 숙제를 열심히 해 온 성실한 학생처럼 술술 대답했다.

“눈앞에서 죽어 가는 사람을 돕지 않는 건 죄이고, 협박당했거나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인 건 죄가 아니란 뜻이죠?”

능숙하게 바늘을 움직였던 것처럼, 채소를 썰고 볶았던 것처럼. 몸에 밴 듯한 경험이 미카엘의 입술을 움직였다.

“그 말대로라네. 이게 얼마나 위험한 사상인지 알겠나?”

“위험한 사상이라니. 그게 바로 유리시아 교리의 근간인데 그걸 부정하시면…….”

“신께서 살해에 정당성을 부여하신 것이지 않나.”

“법률에도 정당방위란 게 있어요.”

“정당방위는 수동적인 악이라 볼 수 없네. 그건 아예 죄악이라 불릴 수 없는 행위이니까.”

꼭 천사와 악마가 반대된 것만 같았다.

필사적으로 기존 체제를 보호하고 두둔하는 미카엘과 달리 데미안은 끝없이 의심하고 비판했으니까.

“한때 유리시아 신자들은 다른 종교를 배척하며 이교도들을 강제로 교화하려 했네.”

미카엘은 부지불식간에 제 가슴께를 꽉 움켜쥐었다.

이교도란 말이 꼭 차가운 송곳이 되어 심장을 쿡쿡 쑤시는 것만 같았다.

“종교적 이념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무지한 자들을 일깨우기 위해 고문과 살해에 앞장섰던 자들을 뭐라고 불렀는지 아나?”

미카엘이 생전에 이교도였던 걸까? 알 수 없었다. 그런 걸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성기사. 영예로운 신의 기사라고 불렀지.”

데미안의 검은 눈동자는 격정에 휩싸이지도, 불안함에 흔들리지도 않았다.

그는 여전히 깊고 차분한 눈으로 미카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수동적인 악행으로 인해 신벌을 받았을까?”

밭은 숨을 몰아쉰 건 오히려 미카엘 쪽이었다.

그는 죄책감에 물든 푸른 눈동자로 차마 데미안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더듬더듬 대답했다.

“받지…… 않았나 보군요…….”

커다랗고 따스한 손이 어깨를 감싸 쥐자, 미카엘은 본능적으로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게 데미안의 손이라는 걸 인지하고는 이내 몸에서 힘을 쭉 뺐다.

“유리시아 신께선 공정하시지 않고, 세상은 공평하지 않네.”

미카엘의 입가에 물컵을 갖다 댄 데미안은 그가 물을 조금 받아 마시자, 검지로 그의 젖은 입술을 닦아 주었다.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면, 교리에 대한 결벽증을 놓지 않는다면, 자네는 결코 속죄할 수 없을 걸세.”

아아, 어째서 데미안이 신을 모독하고 종교를 비판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미카엘을 위해서였다. 아니, 미카엘 때문이었다.

“……죄송해요, 선생님.”

고개를 떨군 미카엘이 속삭이듯이 말하자, 슬며시 눈가를 일그러뜨린 데미안이 평소의 그답지 않은 말투로 툭 뱉듯이 중얼거렸다.

“그 말은 이미 지긋지긋하게 들었어.”

흠칫 놀란 미카엘이 뒤늦게 고개를 들어 데미안의 모습을 찾았지만, 그는 이미 미카엘에게 뒷모습만을 보인 채 방문을 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방해했나요?”

유렐은 두 팔 가득 문서 다발을 안고 있었다.

그 종이로 쌓은 탑이 어찌나 높은지 유렐이 두 손을 아랫배 가까이에 대고 있는데도 꼭대기에 놓인 문서가 그녀의 코끝을 스칠 정도였다.

미카엘은 그녀를 기다리게 한 것에 미안함을 느끼면서 저도 모르게 데미안의 안색을 살폈다.

혹시 그 또한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다면 자기 때문에 이야기가 길어진 거라고 앞서 변명할 생각이었다.

“그에게 회계 자료를 받아 왔나 보군.”

하지만 유렐을 바라보는 데미안의 눈에선 죄책감이나 미안함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녀의 짐을 대신 받아 줄 생각도 없는지 그저 문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설 따름이었다.

“어, 제가…….”

미카엘이 두 손을 앞으로 내밀어 보이자, 심지어 그를 살짝 잡아당기기까지 했다.

“왜 굳이.”

저게 그녀가 해야 할 일이니 방해하지 말라는 투였다.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은 유렐이 따스한 눈빛으로 미카엘을 바라보며 말했다.

“미카엘은 정말 착하고 좋은 청년이에요.”

“그래. 변태지만 말이야.”

진한 웃음을 입가에 건 데미안이 가벼이 조롱하듯 말하자, 유렐이 작게 웃었다.

“그런가요? 정말 좋으시겠어요, 데미안 님.”

“… … ….”

왜 변태인 게 좋은 걸까. 알 수 없었다. 아니, 알고 싶지 않다는 게 더 정확했다.

천 살이 넘은 대천사도 오천 살이 넘는 천사를 이기진 못 하는지 데미안은 더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런데 우유 데워 드셨어요? 방 안에서 고소한 냄새가 나네요.”

유렐이 방 안을 둘러보며 말하자, 천 살짜리 천사도 이기지 못하는 한 살짜리 악마는 그저 얌전히 두 눈을 내리깔았다.

=============================

※ 조아라에 게시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에 의거 보호받고 있습니다 ※

※ 저작권자의 승인 없이 작품의 일부, 또는 전부를 복제, 전송, 배포 및 기타의 방법으로 이용할 경우,손해배상 청구를 포함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됩니다. (5년 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작품후기]

원고료 쿠폰 선물해 주신 NAEJUE 님께 감사드립니다.

선작해 주시고 추천 눌러 주시고 댓글 달아 주신 모든 분들께도 감사드려요!

행복한 추석 되시길!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