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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는 천칭이 기울길 기다리지 않는다-34화 (34/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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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남 탓도 때론 도움이 된다

“소문을 내야겠군요. 대천사 데미안 님이 순결한 절 꼬셔서 따먹었다고요.”

미카엘은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데미안의 단단한 아랫배를 지분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럼 당신은 1년이 아니라 제 영혼이 부서져서 없어질 때까지 절 책임지셔야만 할 거예요.”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고압적인 태도로 단언하는 미카엘을 바라보면서 데미안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이내 부드러운 음성으로 미카엘을 불렀다.

“이보게, 한 살.”

“한 살?! 선생님, 지금 저를 한 살이라고 부르신 거예요?!”

“고작 1년짜리 순결을 먹어 치웠다고 영혼이 부서져서 없어질 때까지 책임을 져야만 한다면.”

데미안은 한 살짜리 악마보다 더 농염한 손길로 미카엘의 아랫배를 꼬집듯이 주물렀다.

“천백 년짜리 순결을 먹어 치운 대가는 어떻게 치르려고?”

미카엘은 긴 속눈썹을 위아래로 열심히 팔랑거리다가 이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네요! 제가 선생님의 영혼을 책임져야겠네요!”

“그럴 필요까진 없네만.”

“선생님 영혼이 부서져서 없어질 때까지, 아니, 세상이 멸망할 때까지 오로지 선생님 한 사람만을 바라볼게요!”

난 부서질 예정이 없는데.

어색하게 미소 지은 데미안이 지나치게 흥분한 것처럼 보이는 미카엘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미카엘. 일단 물 한 잔 마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할까?”

“선생님도 그걸 원하시죠? 네?”

무참히 묵살되었지만, 어쨌든 시도는 해 봤다.

“왜냐하면, 그러면, 우린 서로밖에 모르는 상태로, 둘 다 순결하게 죽을 수 있잖아요? 선생님도 그런 걸 바라시죠?”

만일 데미안이 자살한 영혼이 죽음에 매료되거나 영원한 안식을 갈망하는 경향이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면, 그의 말을 듣고 혼란스러워했을 거다.

하지만 데미안은 장수한 데다 자연사까지 한 강인한 영혼이었다.

그는 또다시 함께 죽어달라고 매달리는 미카엘을 그저 차분하게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기만 했다.

“둘 다 순결하게 오래오래 함께하면 되지.”

미카엘은 불안한 영혼이었다.

간절하게 바라던 이를 마침내 손에 얻게 되어 행복의 꼭짓점을 맛보았으니 미카엘은 바닥으로 추락하기 전에 그와 함께 자멸해 버리길 바라는 듯했다.

그 마음을 아주 모르는 건 아니었으나 데미안은 집요한 영혼이었다.

애타게 그리워하던 이를 마침내 손에 얻게 되었으니 데미안은 세상이 멸망할 때까지 그와 함께 방탕한 행복을 맛보고 싶었다.

“선생님, 삶은 고통이에요. 그런데 왜 현명한 선생님께서 굳이 고난의 길에 머물고자 하시는 건가요?”

같이 죽자는 말을 참으로 고풍스럽게 하는군.

만일 눈앞에 산이 치솟는다면 밀어 버리면 되고, 발밑에 바다가 펼쳐진다면 말려서 없애 버리면 된다.

데미안에겐 그럴 만한 힘도 있으니 미카엘이 두려워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더러 지금 당장 안심하라고 윽박지를 수는 없었다. 그건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킬 테니 말이다.

지난 1년간 공들여 메마른 토양을 신뢰로 축축이 적셨으니 이제 데미안이 해야 할 일은 거기에 확신이란 씨앗을 심는 것뿐이었다.

그 어떤 어두운 길을 걷더라도, 그 어떤 험난한 길을 걷더라도, 이제 그 어떤 것도 감히 너를 해치지 못할 거라는 확신.

그러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했다.

“흐음.”

미약한 새싹을 당장 수확할 수는 없었기에 마지못해 데미안은 끝까지 숨겨 두었던 조커 카드를 꺼내 놓았다.

“죽으면 섹스도 못 할 텐데.”

두 눈을 동그랗게 뜬 미카엘은 죽고 싶지만 섹스는 하고 싶다는 모순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결국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조커 카드를 집어 들었다.

“당장 죽자는 말이 아니라…… 오래오래 살 필요까진 없지 않으냔 말이죠. 무엇보다 남자는 금방 질려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고 바람을 피우잖아요.”

“자네도 남자 아닌가.”

요새 애들은 저런 식으로 자기 욕을 하나?

데미안이 떨떠름하게 바라보는 가운데 미카엘은 인지도 높은 정치인처럼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만 같은 얼굴로 확언했다.

“저 자신은 믿을 수 있어요. 왜냐하면 저는 제 마음을 알고 있으니까요.”

세계 개 같은 논리 대회가 열린다면 단연코 우승을 차지하고도 남을 법한 논리였다.

역시 망언은 정치인이 하는 게 최고였다.

“알겠어요. 선생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아니,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미카엘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절 바라보는 데미안의 다리 사이 사이를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선생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눈을 돌릴 필요가 없으시도록 제가 최선을 다해서 여길 쥐어 짜내 볼게요.”

희열에 달뜬 미카엘의 목소리에선 새빨간 광기까지 느껴져서 데미안은 절로 등이 서늘해졌다.

‘어머니, 그를 건강한 몸으로 되돌려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데미안은 유리시아 신께 새삼스레 감사드렸다.

‘하지만 그걸 굳이 물총으로 개조할 필요까진 없지 않으셨을까요.’

동시에 원망하는 마음도 품었다.

“자네, 아까 목마르다고 하지 않았나?”

“그냥 물 대신 다른 걸 마셔도 될 것 같아요.”

제 다리 사이에 시선을 고정한 미카엘이 젖소 농장에서 일하는 성실하고 근면한 소년 같은 얼굴을 하자, 대천사가 그에게 나태를 권했다.

“진득거리는 걸 마시면 오히려 더 갈증이 날 테니 맑은 물을 마시는 게 어떤가?”

하지만 농장 소년은 신실하기 그지없어서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자꾸 뽑아내다 보면 점점 말간 물이 나올 거예요.”

이거 미친놈 아냐? 라고 데미안이 욕하지 않은 건 그가 관대한 사람이라서지, 미카엘이 미친놈이 아니라서가 아니었다.

“미카엘, 일해야지. 자네는 날 위해 매일 6시간 동안 노동하겠다고…… 계약했네.”

악마가 되길 원하는 순결한 영혼이 약속이란 말보다 계약이란 말을 더 선호하는 것 같았기에 데미안이 슬쩍 말을 바꿨다.

동시에 자괴감이 밀려왔다.

아, 내가 진짜로 한 살짜리와 연애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자네가 해야 할 일에 하나를 더 추가하지. 매일 소량씩이라도 내 신력을 취할 것.”

미카엘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데미안을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그게 절 천사로 만드는 과정이라든가…… 뭐 그런 건 아니죠?”

데미안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미카엘, 자네의 영혼이 아무리 깨끗하다 한들 속죄하지 않는다면 천사가 될 수 없다네.”

속죄.

스르르 빛을 잃은 푸른 눈동자가 힘없이 자기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전 제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조차 몰라요, 선생님. 그런데 제가 어떻게 속죄를 하겠어요.”

말을 해놓고 나서 미카엘은 아차 했다.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말투로 말하다니. 꼭 그러고 싶은데 그러질 못한다는 뜻 같지 않은가.

염치도 없지.

미카엘은 용서받아서는 안 되는 몸인데 말이다.

“그렇다면 잃어버린 기억을 떠올리는 게 먼저겠군.”

데미안은 그의 괘씸한 의도를 지레짐작하거나 야단치는 대신 미카엘에게 선택권을 넘겨주었다.

“자네는 그러고 싶나?”

“저요?”

“과거 기억을 떠올리는 게 불편해 보였는데.”

눈앞에 있는 대천사가 때때로 짓궂게 굴긴 해도 그가 진짜 어른처럼 느껴지는 건 아주 사소한 곳에서도 미카엘을 배려해 주기 때문일 거다.

“미카엘, 난 자네가 싫어하는 짓은 강요하지 않아.”

자존심 강한 미카엘이 혹여나 자길 얕본다고 생각할까 봐 힘들어 보인다고 말하는 대신 불편해 보인다고 표현한다든가.

미카엘이 고스란히 남긴 브로콜리를 보고 젊은 직원이 풋 웃고 지나간 뒤부터 그의 접시에서 브로콜리를 발견하면 자연스럽게 그걸 집어 자기 접시로 가져간다든가.

“하지만 자네가 그걸 원한다면 기꺼이 도울 거라네.”

미카엘은 의심이 심하고 경계심이 강했지만, 데미안만은 신뢰했다.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미카엘도 없었을 테니까.

홀로 길거리를 헤매던 미카엘을 주워 준 것도, 신전에 머물게 해 준 것도, 불안함에 떨던 그더러 자기 뒤를 따라와도 좋다고 해 준 것도 모두 데미안이었다.

그는 언제나 미카엘의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 주었다.

“만약 거기에…… 어마어마하게 더러운 게 있다면요?”

그렇기에 더욱 데미안에게만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

왜 신께 용서받아서는 안 되는 건지.

“선생님이 저한테 실망하실 수도 있어요…….”

미카엘이 고개를 떨구려 하자, 데미안이 그의 턱을 도로 부드러이 들어 올렸다.

“거기에 무엇이 있든 자네를 용서하겠네.”

“선생님은 제 밑바닥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시잖아요.”

데미안은 전문 상담가조차 손을 들고 물러날 정도로 신뢰감이 드는 목소리와 태도로 미카엘의 떨리는 손을 잡았다.

“나는 응보의 대천사이지 않나.”

커다란 손은 절로 안도감이 들던 단단한 품만큼이나 따스하고 안온했다.

“나쁜 놈 전문인이라고 할 수 있지.”

미카엘이 부지불식간에 웃음을 터트리자, 데미안이 그의 뺨을 다정히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럼 이제 내가 종아리까지 흘러내린 자네 정액을 닦아 내고 나서 바지를 입어도 되나?”

“어…… 아, 네에. 죄송해요.”

부랴부랴 손수건을 꺼내 든 미카엘이 체액으로 더럽혀진 다리 사이를 닦아 주자, 데미안이 온화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자네를 용서하겠네.”

난 이렇게 자네 같은 배려심 없는 씨발 새끼도 용서해 줄 수 있으니 이제 밑바닥을 보여 줘도 되겠다는 믿음이 들지? 라는 의미가 담긴 미소에 미카엘은 그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데미안도 함께 밑바닥을 보게 될 거라는 사실이 여전히 두렵긴 했지만, 그가 곁에 있어 준다고 생각하자 확실히 마음이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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