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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개와 악마는 부르지 않아도 된다
“일단 좀 진정하시고…….”
미카엘은 도움을 바라는 듯한 눈길로 유렐을 돌아보았지만, 그녀는 데미안이 하는 바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따름이었다.
‘젠장! 어째서 말리지 않는 거야! 저러다 선생님이 죄인이 되시면 어쩌려고!’
미카엘은 입술을 짓이겼다가 뱉으면서 재차 데미안을 만류했다.
“서, 선생님? 제 말은 듣고 계세요?”
“듣고 있는데.”
“그럼 일단 알렌 씨를 놔 주세요.”
“내가 왜.”
평소와 달리 부서진 어조로 말하는 데미안이 묘하게 낯설면서도 친숙했다.
미카엘은 그가 저런 말투를 사용하는 걸 본 적이 없지만…… 아니, 없었나?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면서 머릿속이 웅웅 울리기 시작했다.
「자랑스럽겠구나, 아들아.」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거만한 말투의 남자.
다정한 어조인데도 어딘가 역겹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비열한 쥐처럼 신경을 버걱버걱 갉아먹어 댔다.
「너의 기사가 이교도를 가장 많이 죽였으니.」
시커먼 분노와 새빨간 울분이 시큼한 위액이 된 것처럼 식도를 뜨겁게 태우고 위로 올라왔다.
“그만!!!!”
거칠게 고개를 가로저은 미카엘은 비틀거리면서 데미안 앞으로 걸어간 뒤 두 손으로 그의 팔을 꽈득 움켜쥐었다.
“당신이 나 때문에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는 게 싫다고!”
그런 짓을 하지 말았어야 했어.
저 하늘에 반짝이는 것을 감히 탐내는 게 아니었다고.
‘내 손이 그렇게 더러운 줄 알았다면, 내 품이 그렇게 시커먼 줄 알았다면, 그걸 소중히 품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그건 미카엘 탓에 더러워지고 말았다.
미카엘이 욕심을 냈기 때문에.
미카엘이 감히 바랐기 때문에.
“죄송해요…… 읏, 죄송해요…….”
고개를 떨군 미카엘이 누군지 모를 상대에게 잘못을 빌어 대자,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던 데미안이 바로 알렌을 내려 주고는 두 팔로 미카엘을 꽉 끌어안았다.
“미안하다.”
미카엘은 원망하듯 혹은 투정을 부리듯 이마로 데미안의 어깨를 퍽퍽 찍긴 했지만, 그의 팔을 놓지는 않았다.
“내가 미안해.”
데미안은 사시나무 떨듯이 오들오들 떠는 미카엘을 커다란 손으로 쓰다듬어 주고는 나직이 말했다.
“이제 그러지 않을 테니 날 용서해라.”
그 낯선 말투가 어딘지 모르게 친숙했다. 다정하면서도 무심한 어조가 어딘지 모르게 달갑게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순간 이성을 잃고 말았군.”
이마를 덮은 흑발을 한 손으로 쓸어 넘긴 데미안은 언제 싸늘한 무표정을 했느냐는 듯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알렌은 선악의 경계가 모호한 인간인 데다 자네를 모욕했으니 말이야.”
그는 아직도 긴장한 얼굴로 절 바라보는 미카엘을 안심시키고자 짐짓 장난스레 그의 콧등을 건드렸다.
“좀 죽여도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네.”
좀 죽인다는 게 무슨 뜻이죠? 살해에도 정도가 있는 건가요? 그럼 아주 죽이면 어떻게 되는데요?
머릿속에 아주 많은 생각이 차올랐지만, 미카엘은 애써 눈앞의 현실만 보려 했다.
“혹시 그 이성을 잃은 상태라는 게 제 안전에 위협이 될 수도 있나요?”
미간에 힘을 준 미카엘이 뾰족한 어조로 묻자, 데미안이 재미있다는 듯 크게 웃었다.
“내가 자네에게? 그럴 일은 절대로 없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세상을 멸망시키려 드는 대악마처럼 보였는데 시원스럽게 웃는 얼굴이 무척이나 선하고 맑아 보였다.
“유리시아 신께 맹세코.”
미카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데미안은 흡사 기사가 군주에게 충성을 맹세하듯 그의 손등, 정확히는 군주의 반지가 자리해야 할 곳에 입을 맞췄다.
“나는 자네의 영예와 안위를 위협하는 짓은 하지 않겠네.”
이 모습을 어딘가에서 본 것만 같은데.
강인하고 늠름하면서도 아름답고 고결한 남자를…… 그러니까 명화 속에서 봤던가?
“알렌. 자네는 한번 악마의 눈에 들었으니 계속 안 좋은 충동에 사로잡히게 될 거라네.”
미카엘이 지난 기억을 더듬어 보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난 데미안이 묵직한 힘을 실어 알렌의 어깨를 짚었다.
“성심껏 기도하고 선하게 살게. 그것만이 자네가 악마의 손안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니.”
데미안이 알렌에게서 손을 거두자, 미카엘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손을 손수건으로 싹싹 닦아 냈다.
데미안은 그를 떨떠름한 얼굴로 바라보았지만,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고개만 한번 끄덕이고 말았다.
그래. 하고 싶으면 해야지.
“자네는 다른 지부로 이동시키겠네.”
“그, 그러면 누가 절 지켜 주죠?”
“자네 자신이 지켜야지. 우리는 함께 있지 않은 편이 낫네.”
두 사람이 우리라는 말로 엮인 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미카엘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정말로 사소한 것에도 질투를 느끼는 남자였다.
‘자네와 나, 라고 떼어서 말할 걸 그랬나.’
눈치가 빠른 데미안은 짧은 반성을 하고는 미카엘을 달래듯 그의 등을 가벼이 쓰다듬어 주었다.
“내가 곁에 있으면 자네는 더욱 악마의 유혹에 흔들리게 될 거라네. 그러니 마음을 다잡고 자기 자신을 지켜내게.”
“알겠……습니다.”
힘겹게 대답하는 알렌이 미덥지 않아 보였는지 데미안이 쐐기를 박듯이 말을 덧붙였다.
“내 손으로 자네를 죽이게 하지 말게.”
그 충격적인 선언에 알렌은 일순 눈가를 일그러뜨렸지만, 이내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예. 데미안 신부님을 괴롭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데미안은 그를 따라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미카엘은 이번엔 조바심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이 대천사가 생각보다 다정하지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난 딱히 인간을 죽이는 데 괴로움을 느끼진 않는다네.”
데미안은 모래로 만든 버석버석한 칼로 알렌의 심장을 다시 한 번 더 난도질하고는 뒤로 돌아섰다.
“인간들은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
악의조차 담기지 않은 무관심한 말은 오히려 분노에 찬 시선보다 더 잔혹해서 알렌은 손톱만 한 희망조차 잃어버린 채 고개를 떨궜다.
“유렐, 난 신전 바깥 좀 확인해 보고 와야겠네.”
“네. 데미안 신부님.”
데미안이 앞서 걷자, 미카엘이 바로 그의 곁을 졸랑졸랑 따라 걸었다.
“선생님은 은근히 매정한 구석이 있어요.”
“알렌에 대한 이야기인가?”
미카엘이 고개를 끄덕이자, 데미안은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
“그는 현재 선인도, 악인도 아니니 내가 다정히 대할 필요가 있나.”
“그럼 저한테는 왜 다정하세요? 저는 선한 사람도 아닐뿐더러 악마인데요.”
데미안은 빙긋 웃었다.
여태까지 꾸욱 억누르고 있었으니 한 번쯤은 저질러도 되지 않을까?
자꾸 옛 기억을 떠올렸더니 짓궂은 충동에 휩싸였다.
애초에 데미안은 너그럽고 온화한 성미도 아니었다.
“그야 자네가 귀여우니까 그렇지.”
두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던 미카엘이 점점 험악한 얼굴을 하기 전 데미안이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오늘따라 풀벌레 소리가 시끄러운 걸 보니 비가 올지도 모르겠군.”
“데미안! 내가 분명…….”
“다음에 이야기하지. 바깥을 살피고 난 다음엔 서둘러서 예배 준비를 해야 하니 말이야.”
미카엘은 그저 자신이 어려서 데미안이 절 귀여워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듯하지만, 그의 생각은 틀렸다.
아마 미카엘이 할아버지가 되어도 데미안의 눈엔 그가 귀여워 보일 테니.
원래 스승에겐 첫 번째 제자가 특별한 법이었다.
“내가 어린애 취급 좀 하지 말라고…….”
“기다리게.”
신전 문을 열자마자, 우뚝 걸음을 멈춘 데미안이 손바닥으로 미카엘의 두 눈을 덮었다.
“선생님?”
“벌레가 있군.”
신전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웬 젊은 여자가 서서 그들을 흥미로운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미카엘을.
고개를 돌려 멀리 떨어진 건물을 바라보자, 그곳에도 어떤 젊은 남자가 서서 가만히 미카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둘이 아니었다.
어느새 신전 주위를 열댓 명이 넘는 젊은 사람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날벌레를 잡지 않는 이유는 손이 더러워지는 게 귀찮아서이지, 그걸 잡을 만한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네.”
데미안은 피로한 얼굴로 낮게 중얼거리고는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걸 알고도 이렇게 나오는 건 아니겠지.”
데미안이 형형이 빛나는 금빛 눈동자로 노려보자, 미카엘을 지켜보던 젊은 사람들은 빠르게 모습을 감췄다.
슬며시 미간을 좁힌 데미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개와 악마는 부르지 않아도 온다더니.’
하리엘을 만나야만 했다.
저 날벌레 같은 이들이 소중한 이를 따끔하게 깨물기라도 하는 날엔 이 도시 전체를 엎어 버리고 싶어질 테니까.
“선생님, 방금 저한테 하신 말씀이었어요?”
비로소 미카엘의 얼굴에서 손바닥을 떼어 낸 데미안이 언제 차가운 낯빛을 했느냐는 듯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벌레한테 한 말이었네.”
“아하. 선생님은 벌레하고도 대화를 나누실 수 있나 보군요. 저도 한번 벌레들의 대화를 들어 보고 싶네요.”
데미안은 금욕적이면서도 품위 있어 보이는 외모를 하고서 태연히 말했다.
“왼쪽 풀숲에 있는 귀뚜라미가 오늘 밤 자신과 실컷 섹스할 암컷 귀뚜라미를 찾는다는군. 더듬이로 정성껏 애무도 해 주겠다는데.”
“아, 생각이 바뀌었어요. 벌레와는 이대로 잘 모르는 사이로 지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미카엘이 바로 말을 바꾸자, 데미안은 조용히 웃고는 그의 밝은 금발을 유의미한 손길로 쓰다듬었다.
“그래. 나 역시 그리 생각하네.”
그 무겁게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가 자애로우면서도 잔혹한 신을 떠올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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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이걸로 챕터 2가 끝났습니다!
<챕터 3. 남탓도 때론 도움이 된다>로 찾아 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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