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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는 천칭이 기울길 기다리지 않는다-24화 (24/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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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개와 악마는 부르지 않아도 된다

    울컥 분노인지, 짜증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아, 그러고 보니 부엌을 빌려도 되느냐고 여쭤보지 않았네요.”

    남자는 웃으면서 사과하고는 부엌을 써도 되는지 물었다.

    알렌이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고개만 한 번 까딱이자, 그는 냉장고에서 꺼냈던 양배추와 당근, 양파와 오이 같은 걸 썰기 시작했다.

    부엌일이라고는 한 번도 해본 적 없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칼질이 제법 능숙한 점이 짜증 났다.

    “제가 예전에…… 아, 그러니까 그쪽 분이 오시기 전에 여길 너무 제 집처럼 당연하게 사용해서 양해를 구할 생각을 못했나 봐요.”

    남자가 자신이 이곳에 더 오래 머물렀다는 걸 과시하듯이 말하자, 알렌의 신경은 더욱더 날카로워졌다.

    실제로는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니었을지 몰라도 어쨌거나 알렌의 귀엔 그렇게 들렸다.

    “그쪽 분 눈에는 거슬리셨을 수도 있겠네요. 죄송해요.”

    그가 절 그저 ‘그쪽’이라고 부르는 것도 싫었다.

    알렌도 그를 겉으로나 속으로나 이름으로 부르고 있지 않지만 말이다.

    아, 생각해 보니 그가 이름으로 부르면 그것 나름대로 또 화가 났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허락까지 구해 놓고 저러는 건 짜증 나지 않나?

    무슨 시위하는 것도 아니고.

    허락을 구한 건 그가 아니라 데미안이었고, 알렌은 정말로 싫어 죽겠다는 얼굴로 어쩔 수 없이 수락하긴 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알렌은 저 남자만 보면 분노가 치밀었다는 거다.

    “혹시 땅콩 잼이 있나요?”

    알렌이 날을 세우고 있다는 걸 뻔히 알 텐데도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걸어 왔다.

    그 경계심 없는 태도도 열받았다.

    “우유에 땅콩 잼을 풀어서 소스로 뿌렸더니 선생님이 좋아하시더라구요.”

    “진짜 어이가 없네.”

    “……네?”

    “그분의 진짜 정체도 모르면서 몸을 섞고 있다고?”

    천진하게 새파란 눈을 깜빡거리는 꼴을 보고 있으려니 슬금슬금 살의가 치밀어 올랐다.

    “그분은 아무것도 드시지 않아. 그러니 네가 만든 쓰레기 따위를…….”

    “아, 선생님이 대천사란 건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선생님은 차나 식사도 하긴 하세요. 기호품처럼요.”

    남자는 살짝 당황한 듯했지만, 여전히 예의 바르면서도 정중한 말씨로 대답했다.

    그게 더 알렌을 분노하게 했다.

    질척거리던 시커먼 감정에 점점 스멀스멀 붉은 기가 번지기 시작했다.

    “네가 그분에 대해 뭘 알아!”

    아아, 죽여 버리고 싶다.

    손에 든 황금빛 성작으로 저자의 아름다운 얼굴을 콱 찍어서 피범벅으로 만들고 싶었다.

    “미안합니다. 제가 자리를 떠나는 게 좋겠군요. 마음이 가라앉으시면 그때 다시 이야기해요.”

    남자는 살짝 굳은 얼굴을 했지만, 빠르게 칼을 씻어 깊숙이 치워 놓고는 자리를 떠날 채비를 했다.

    스물하나 둘쯤 되어 보이는 어린 새끼가 성숙한 어른 남자인 척하는 꼴이 좆같아서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야! 어딜 가!”

    남자엔 관심이 좆도 없었는데 남색에 눈을 뜨게 한 데미안이 그 강건하고 섹시한 몸으로 저 부잣집 도련님을 따먹었을 거라고 생각하자, 더 열이 뻗쳤다.

    아니, 생각해 보니 데미안도 씨발 새끼였다.

    품위 있는 인격자인 척 온갖 비싼 척을 다 하더니 결국엔 어리고 예쁜 새끼가 좋다는 거 아니야?

    속물 같은 새끼.

    ‘아, 아냐. 데미안 신부님까지 욕할 필요는…… 나쁜 건 저 새끼라고!’

    정말? 그가 뭘 잘못했길래?

    데미안이나 미카엘이나 멀쩡한 성인이니 둘이 합의하에 관계를 가진 거라면 알렌이 무어라 간섭할 빌미 따위가 없었다.

    그러니 홧김에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진심이라기보다 애먼 시비에 가까웠다.

    “남창 같은 새끼.”

    저 부잣집 도련님이 돈이 궁해서 몸을 팔 리가 없다는 걸 잘 안다.

    오히려 그가 데미안에게 자발적으로 돈을 퍼붓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그건 나한테 한 말인가요. 아니면 선생님께 한 말인가요.”

    남자가 착 가라앉은 중저음으로 물었을 때 알렌은 저도 모르게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 말았다.

    실언이었다.

    그 말실수는 어쩌면 데미안 신부, 아니, 대천사를 향한 모욕이 될지도 몰랐다.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지? 아니,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했지?’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던 알렌은 남자가 자기 쪽으로 다가오자, 흠칫 겁먹은 얼굴을 했다.

    “왜 대답을 못 하지?”

    하도 곱고 예쁘게 생긴 탓에 언뜻 호리호리한 몸매라고 착각하기 쉽지만, 그는 보통 남자들보다 훨씬 크고 위압적인 체형이었다.

    데미안의 크고 두툼한 가슴이 하도 한눈에 띄는 데다 시선을 잡아끄는 구석이 있어서 상대적으로 그가 말랐다는 인상을 주는 것뿐이지, 실제로 두 사람은 키나 체격도 얼추 비슷했다.

    그런 남자가 바로 눈앞에 서자, 알렌은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 정도로 두려웠다.

    “대답해.”

    남자의 인상이 묘하게 돌변했다고 느낀 것도 그때였다.

    그는 가늘고 아름다운 손가락으로 알렌의 목을 움켜쥔 채 슬며시 눈썹을 치켜세웠다.

    “내 앞에서 데미안을 모욕한 거냐고 물었다.”

    화사하게 웃으면서 애교 있게 굴던 남자가 흡사 권위적인 위정자처럼 명령했다.

    그 모습이 흡사 어울리지 않는 광대 옷을 입고 어설프게 재롱을 부리던 이가 갑자기 그에게 걸맞은 군복을 입고 나타난 것처럼 보여서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아니, 군복이 아니라 그보다 더 화려한 제복이 어울릴 것만 같았다.

    예를 들면…….

    “어머나, 지금 뭐 하는 건가요?”

    긴 빗자루를 손에 든 유렐이 부엌 안으로 들어오자, 당황한 미카엘이 알렌의 멱살을 놓아 주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아, 이건…….”

    “손님 대접이 엉망이네요, 알렌 부제.”

    하지만 유렐은 미카엘에게 아무런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알렌 앞으로 향할 따름이었다.

    “당신 얼굴을 좀 봐요.”

    유렐은 대체 어디에서 가져온 건지 아기 몸통만 한 금색 거울을 가슴께까지 들어 올린 뒤 알렌의 눈앞에서 손가락을 딱딱 튕겼다.

    “지금 얼마나 추한 얼굴로 폭언을 퍼붓고 있는지 보라구요.”

    입을 앙다문 채 힐끔힐끔 미카엘의 눈치를 보던 알렌은 유렐이 반강제로 시선을 끌자, 어쩔 수 없이 그녀의 거울 속으로 눈을 돌렸다.

    “흐아악! 아, 아, 악마!”

    기겁하며 뒤로 물러나던 알렌이 자기 발에 걸려서 엉덩방아를 찧자 미카엘이 흠칫 놀라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응? 악마라니. 설마 내 얘기인가?’

    정체를 들킨 걸까.

    별로 숨길 마음도 없었지만, 그가 알게 됐다면 어쩔 수 없지.

    괜히 일으켜 줬다가 된통 욕만 먹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카엘은 손을 거두고 뒤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천사가 하나라고 들었는데 둘이었나?”

    카앙!

    나무 빗자루와 나무 지팡이가 맞부딪혔는데 금속끼리 부딪친 듯한 소리가 났다.

    나무 빗자루를 든 쪽은 당연히 유렐이었고, 나무 지팡이를 쥔 쪽은 어디에서 나타난 건지도 모를 처음 보는 남자였다.

    “흐허억!”

    겁에 질린 알렌은 바닥에 엎드린 채 두 손으로 자기 머리를 감싸고 있었는데 묘하게도 남자는 마치 알렌을 비호하듯 그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처음 뵙겠어요. 전 맹약의 천사 유르엘이라고 한답니다.”

    유렐이 놀란 얼굴을 한 미카엘을 향해 윙크를 하며 말했다.

    아아, 유르엘이었나!

    그녀는 흔히 유리시아 신도들이 언제 결혼하냐고 성화를 부리는 할머니로 비유하는 천사였다.

    유르엘은 신실한 마음으로 맹세한 이들을 가호하며 그녀에게 축복을 받은 이들은 영원히 헤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기실 유리엘은 부부뿐만 아니라 군신이나 의형제처럼 굳건한 맹약을 한 이들을 모두 수호하나 이제 왕정 국가는 몇 남지 않은 데다 의형제처럼 낯간지러운 말을 입에 올리는 이도 거의 없으니 필연적으로 그녀는 부부를 수호하는 천사로 남아 버렸다.

    ‘그래서 나와 데미안만 보면 결혼 이야기를 꺼냈던 거로군.’

    중년 여성으로 보여서 보통 신모인 줄 알았는데 천사라고 해서 다 젊어 보이는 건 아닌 모양이다.

    “나는 대악마 샤르티엘이다.”

    유렐이 제게 인사한 거라고 착각했는지 짙은 보랏빛 머리칼의 남자가 구불구불한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기며 거만한 태도로 마주 인사했다.

    ‘대악마라니…….’

    퍼뜩 불안해진 미카엘은 나무 빗자루를 손에 든 채 여전히 샤르티엘과 대치 중인 유렐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대천사인 데미안은 기관총에 수백 발을 맞고도 미동조차 없었을 뿐더러 주먹만 한 돌멩이 하나를 던져 차량을 완전히 박살 냈을 정도로 강했다.

    그가 뒤꿈치로 바닥을 쿵 두드린 것만으로도 넓은 반경의 지대가 주저앉고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굵은 선으로 갈라졌다.

    “유혹의 악마이지.”

    샤르티엘이 바로 말라비틀어진 가지로 보였다.

    유혹의 악마라니.

    바싹 마른 허연 팔을 덜렁거리고 있는 데다 갈비뼈가 보일 정도로 비루한 몸매를 한 것도 모자라 얼굴에는 생기라고는 전혀 없고 눈 밑은 시커멓게 죽은 놈이 유혹의 악마라고?

    감히 유혹이라는 말을 쓰려면 데미안 정도는 되어야지.

    가만히 숨만 쉬어도 모든 걸 갖다 바치고 싶어지는 그 남자 정도는 되어야지.

    저딴 놈에게 유혹되는 머저리가 있다는 게 그저 기가 찰 따름이었다.

    ‘아.’

    미카엘은 마른 가지에게 굴복한 머저리, 알렌을 찌푸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데미안을 좋아하는 것 같기에 취향이 정상적인 줄 알았더니 저딴 놈에게 넘어가?

    괜히 미카엘이 다 자존심이 상했다.

    알렌은 현재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지 그저 겁에 질린 얼굴로 벌벌 떨고만 있었지만.

    “이자는 내가 비호하고 있으니 더는 그에게 참견하지 말도록.”

    샤르티엘이란 악마가 한껏 거드름을 피우면서 턱을 치켜들었지만, 유렐은 인자해 보이는 얼굴 위에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을 따름이었다.

    “어머, 그럴 순 없죠. 여긴 명색에 신전인걸요.”

    어깨를 낮춘 유렐은 빠르게 빗자루를 휘두르며 그의 품속으로 파고 들었다.

    “초대받지 못한 손님은 나가 주셔야겠어요.”

    너무나도 가볍게 유렐의 빗자루를 피한 샤르티엘은 지팡이를 휘둘러서 유렐의 허리를 후려쳤다.

    캉!

    유렐은 빠르게 빗자루 각도를 바꿔 공격을 막긴 했지만, 급하게 튼 손목에 강한 충격이 전해지자 미간을 찌푸렸다.

    샤르티엘은 놓치지 않고 그녀를 거칠게 몰아붙였다.

    “보아하니 전투에 강한 천사도 아닌 것 같은데 그냥 물러서지그래?”

    카앙! 캉! 캉!

    유렐은 물 흐르는 듯한 동작으로 연신 공격을 막아냈지만, 힘이 부치는지 점점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나도 응보의 대천사라는 이를 만나러 온 거니 말이야.”

    미카엘은 악마이다. 그러니 둘 중 하나를 도와야만 한다면 대악마라는 저 남자를 돕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미카엘은 안타까운 눈길로 유렐만 바라보았다.

    ‘그때 그 검이 있다면…….’

    남자는 강해 보였지만, 싸우는 방식이 아주 세련되어 보이진 않았다. 그러니 무기만 있다면 미카엘이 그를 상대하지 못할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오지 마세요, 미카엘! 영혼이 더러워집니다!”

    미카엘의 속내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유렐이 날카롭게 소리치고는 공격적으로 빗자루를 휘둘렀다.

    카앙!

    삐쩍 마른 주제에 힘은 강력한지 샤르티엘은 그녀의 공격을 가벼이 받아쳐 버렸다.

    “감히 데미안 님이 계신 신전에 기어들 정도의 힘은 가지고 계시나 보네요.”

    그르륵.

    곱게 주름이 진 눈가에 바짝 힘을 준 유렐이 그와 마주 댄 무기로 힘겨루기를 하며 말했다.

    “그놈의 데미안, 데미안…….”

    홀로 읊조리듯 말하던 샤르티엘이 비틀린 조소를 흘렸다.

    “악마들은 죄다 그 이름을 듣고 벌벌 떨지. 하나같이 약해 빠진 것들이란 말이야?”

    검붉은 분노에 사로잡힌 샤르티엘은 진심으로 짜증이 났는지 두 눈을 매섭게 치떴다.

    “하지만 나 역시 대악마라고!”

    “거기까지만 하게.”

    갑자기 서늘해진 공기가 육중하게 몸집을 불린 것만 같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머리를 강하게 찍어 누르는 것만 같아서 미카엘이 절로 고개를 앞으로 숙였다.

    하지만 누군가의 따스한 손이 어깨에 닿자, 바로 몸이 자유로워졌다.

    “미카엘, 다쳤나?”

    불안하게 쿵쿵거리는 심장을 따스한 물로 녹이는 듯한 다정한 저음.

    데미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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