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사는 천칭이 기울길 기다리지 않는다-23화 (23/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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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개와 악마는 부르지 않아도 된다

미카엘의 콧등에 진득하게 입을 맞춘 데미안이 애틋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도로 베개에 옆머리를 눕혔다.

“난 내가 동정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니 그 점을 염려할 필요는 없네.”

“그래도 선생님의 권위가 손상되는 게 싫다니까요.”

왜 갑자기 권위란 말이 나오는 거지?

데미안은 의아했지만, 미카엘은 진심인 듯했다.

“이런 얼굴에, 이런 몸을 하고서 자지를 쓴 적이 없다니. 꼭 성격에 큰 하자가 있어서 아무하고도 섹스를 못 해 본 것 같잖아요?”

“이걸 써 보지 못했다고 손상되는 권위라면 애초에 없는 편이 낫다고 보는데.”

“그래도…….”

“유리시아 신께서도.”

미카엘의 군소리가 길어지기 전에 데미안이 그의 말을 부드러이 끊었다.

“성 경험은 없지만, 권위가 있으시지.”

미카엘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소리 질렀다.

“선생님! 신성 모독이에요!”

데미안은 하하 웃었다.

자기 몸을 끔찍이 아끼는 주제에 데미안의 권위가 손상된다고 엉덩이를 내줄 생각을 하는 미카엘이 참 어리석어 보이면서도 기특했다.

「이건 저보단 선생님께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천진난만하게 웃으면서 제 머리에 화려한 왕관을 씌워 주던 어린 소년이 떠오르자, 데미안의 미소는 아주 조금 무거워졌다.

“난 자네가 싫어하는 짓은 절대로 하지 않을 걸세.”

데미안은 단아한 이마 위로 내려온 밝은 금발을 다정한 손길로 넘겨 주면서 부드러이 말했다.

“그러니 마음의 준비를 할 필요는 없네.”

“그 말씀은 제게 엉덩이를 내주는 거로 만족하신다는 뜻이에요?”

미카엘의 등허리에 두 팔을 감은 데미안이 그의 동그란 엉덩이를 장난스럽게 쥐었다가 놓으며 말했다.

“이리 아름답고 어린 남자가 열렬히 허리를 흔들면서 봉사해 주고 있는데 싫을 리가 있나.”

미카엘은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미간을 찌푸리다가 버릇없는 고양이처럼 또 데미안의 아랫입술을 물고 늘어졌다.

“제가 늙어도 저하고만 하셔야 할 거예요.”

입술을 무느라 미카엘이 뭉개진 발음으로 속삭였다.

데미안은 입을 앙다물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려 버렸다.

‘아, 정말 귀여워 미치겠군.’

아무래도 두 사람의 머릿속엔 그 계약이 고작 1년짜리였다는 사실이 들어 있지 않나 보다.

그게 아니라면 어느 한쪽이 계약 해지 의사를 밝히지 않는 이상 자동으로 1백 년씩 갱신되는 계약이든가.

“권위는 내가 세우는 게 아니라 남이 만들어 주는 거니, 내가 제 할 일을 하며 올바르게 산다면 위신도, 인망도 알아서 따라올 걸세.”

데미안은 반짝거리는 별이 우수수 쏟아진 새파란 호수 같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니 자네가 굳이 애쓰지 말게.”

“그래도 전 선생님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았으면 좋겠어요.”

미카엘이 가만히 손등으로 데미안의 뺨을 쓸어내리면서 말했다.

성적인 의도가 담기지 않은,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신상을 닦아 내는 광신도의 것과 같은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데미안은 낮게 웃으면서 굽힌 검지로 미카엘의 날렵한 콧등을 톡 건드렸다.

“자넨 정말 남의 말을 듣지 않는군?”

“아, 종교를 창시하면 어떨까요? 선생님이 새로운 신이 되는 거예요.”

순간 데미안은 무언가로 세게 얻어맞은 사람처럼 두 눈을 크게 떴다.

「선생님.

제 사랑은 오로지 당신에게 안에만 있어요.

이제 저의 신은 그분이 아니라 당신이세요.」

안 돼. 떠올리지 말아야 한다.

몇 번이나 정신을 놓아 가며 애타게 찾던 이가 눈앞에 있으니 마음이 느슨해지는 것도 당연하지만, 아직은 숨 돌릴 때가 아니었다.

미카엘은 속죄해야만 한다.

데미안은 그를 위해 죄인을 옭아매는 강인한 쇠사슬이 되어야만 했다.

겁먹은 그가 어디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절망에 젖은 그가 또 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못하도록, 데미안이 바로 곁에서 그를 감시해야만 했다.

3년이란 기한 중 벌써 1년을 까먹었다.

신은 결코 한 번 더 기회를 주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선생님. 나의 신이시여.

제발 저를 용서하지 마세요.」

하지만 둑이 한 번 무너져 내리자, 상념은 감출 수 없는 기침처럼 시시때때로 터져 나왔다.

“선생님?”

한 손으로 미카엘의 뒷머리를 감싸 안은 데미안은 그의 얼굴을 제 어깨에 묻게 한 뒤 밝은 금발 위에 뺨을 갖다 댔다.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한때는 말간 눈물 대신 알 수 없는 피 알갱이가 엉겨 붙은 피눈물만 흘려 댔는데 다행히 미카엘의 머리칼에 묻어난 물방울은 투명한 색이었다.

“이대로 조금만 쉬지. 어르신은 좀 자야겠네.”

데미안은 목 안을 뻐근하게 하는 것을 힘겹게 삼키고는 애써 웃음기 어린 음성을 냈다.

근 4백여 년 만에 흘리는 감정이라 그런지 뺨을 적시는 액체가 아주 생경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영혼을 쥐어짜는 듯한 고통만은 아주 익숙했다.

* * *

요새 알렌은 꼭 파도가 심한 바다 위에 조각배를 띄운 듯한 심정이었다.

원래 그가 기분파이긴 해도 이렇게까지 감정 기복이 심하진 않았는데 하루에도 몇 번이나 격렬한 분노와 정적인 평온, 그리고 뜨거운 정욕 따위로 머릿속이 들끓었다.

알렌이 유일하게 마음의 안정을 찾을 때는 데미안과 함께 기도를 올릴 때뿐이었다.

언제나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있는 데미안은 일견 다정해 보이지만, 모두에게 친절하면서도 모두와 친하지 않은 남자였다.

아마 천사여서 그런 거겠지.

잘은 모르겠지만, 알렌은 그렇게 추측했다.

「그만 훔쳐야지.」

「네?」

「작은 죄도 쌓이면 큰 죄가 되는 법이네.」

데미안은 특별한 용무가 없으면 아침 인사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에도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그런 그가 누군가에게 말을 걸 땐 꼭 죄를 화제로 삼았다.

「자네, 곧 죽겠군.」

「……예?」

「지은 죄가 너무 무거우니 목이 부러져 죽을 걸세.」

데미안이 두 손을 모은 남자의 손을 강제로 벌리며 부드러이 웃었을 땐 알렌조차 등이 서늘해졌다.

「시간 낭비이니 그만 기도하게. 어차피 그런 거로는 용서받지 못할 테니.」

「제, 제가 어떻게 하면 살 수 있겠습니까?」

데미안은 벌벌 떨면서 애원하는 남자를 보고 진심으로 놀랐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가벼이 웃음을 터트렸다.

봄볕만큼이나 따스한 웃음이었다.

「그따위 짓을 저지르고도 살고 싶단 말인가?」

하지만 보기 좋은 입술에서 흘러나온 말은 빙하를 녹인 물보다도 차가웠다.

‘그따위 짓?’

그는 대성한 사업가로 신전에도 많은 기부금을 내는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대체 무슨 죄를 지은 걸까.

「그냥 죽어야지 어쩌겠나.」

「주, 주, 죽으라니…….」

「최대한 다른 사람에게 폐 끼치지 말고, 많은 걸 베풀고, 곱게 죽게. 그래야 사후에 벌도 짧게 받지.」

데미안은 그의 어깨를 가벼이 두드려 주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무어라 말을 덧붙였다.

모든 말을 엿들을 수는 없었지만, 보험금, 수령인, 의붓딸, 어쩌고 하는 단어가 드문드문 들려 왔다.

그리고 데미안의 예고대로 남자는 그날 저녁에 계단에서 떨어져 죽었다.

목이 부러진 채로.

아마도 데미안은 작은 죄를 짓는 자에겐 경고를 해 주고, 큰 죄를 짓는 자는 방관하는 것 같았다.

확인할 길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말이다.

‘신기하네. 마음이 편안해졌어.’

데미안을 떠올리자, 심하게 요동치던 감정이 천천히 가라앉아서 알렌은 두 손을 모으고 짧게 감사 기도를 드렸다.

알렌은 무미건조한 다정함만을 보여 주는 그가 좋았다.

데미안이 특별히 알렌을 챙겨 준 적은 없지만, 애초에 그는 모든 이에게 벽을 세우니 딱히 소외감이 느껴지진 않았다.

“성작(Calix 예배에 사용되는 제구 중 하나)을 닦고 계셨나 봐요.”

타박. 타박.

가벼운 발걸음 소리와 함께 남자가 부엌 안으로 들어서자, 깨끗한 수건으로 금색의 잔을 닦던 알렌이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려졌다.

알렌은 그를 이름으로 부르기도 싫었다.

미카엘.

그건 옛 위대한 천사의 이름이었으니까.

“기분 좋은 저녁이네요.”

아침에도 한차례 인사를 해 놓고 남자는 또 살갑게 인사를 건넨 후 냉장고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뒷덜미에는 생긴 지 얼마 안 된 것처럼 보이는 새파란 잇자국이 나 있었다.

‘설마…… 아니야. 생각하지 말자.’

알렌은 크게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방이 다 준비되었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 데미안의 방으로 향했던 일을 떠올리고는 도로 이마를 찌푸렸다.

방문 너머에서 들렸던 데미안의 억눌린 신음과 남자의 거칠고 빠른 숨소리가 잔잔한 호수를 다시 한번 성난 바다로 만들었다.

기분이 더러웠다.

알렌이 빤히 쳐다보는 걸 느꼈는지 힐끗 그를 돌아본 미카엘이 제 뒷덜미를 손끝으로 한 번 쓸고는 싱긋 웃어 보였다.

“선생님이 워낙 입버릇이 나쁘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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