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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는 천칭이 기울길 기다리지 않는다-17화 (17/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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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개와 악마는 부르지 않아도 된다

“아, 제가 찾아봤는데요. 남자끼리 성교할 땐 윤활유 같은 게 필요한 모양이에요.”

앞으로 3층만 올라가면 섹스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들떴는지 미카엘이 사랑스럽게 조잘거렸다.

그의 매끈한 중저음은 한 톤 높아지면 한층 더 맑아져서 듣기 좋았다.

목소리로 곱상한 미청년을 실체화할 수 있다면 필시 이런 느낌이겠지.

실제로도 그는 곱상한 미청년이긴 하지만 말이다.

“선생님, 혹시 윤활유 같은 거 가지고 있으세요?”

데미안이 무어라 대답하려 입을 열자,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진 미카엘이 차가운 음성으로 말을 덧붙였다.

“없겠지? 누구하고 쓰려고 그딴 걸 가지고 있어.”

없다고 대답하려고 했는데.

데미안은 억울했지만,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어린것하고 기 싸움을 해 봤자 남는 거라곤 “꼭 그렇게 애를 이겨 먹어야겠어?”라는 비난이나 “조막만 애한테 지기나 하고 참 잘한다.”라는 한심한 눈초리뿐이니까.

물론 데미안은 두 가지 상황을 모두 경험해 보았다.

왕자와 처음 만났을 당시 데미안은 겨우 스물두 살의 청년이었으니 말이다.

얄밉게도 왕자는 문 뒤에 숨어서 데미안이 야단맞는 모습을 모조리 지켜보고 있었다.

「가엾은 데미안. 당신네 단장님은 너무 가차 없는 것 같아요.」

자기 때문에 야단맞은 데미안을 짐짓 어른스럽게 달래면서 왕자는 자그마한 품을 열어 보였다.

마치 선심이라도 쓰듯이 말이다.

「이리 와요. 내가 안아 줄게요.」

너 때문에 혼난 거잖아, 이 씨발 새끼야.

데미안은 솜털이 보송보송한 어린애를 상대로 쌍욕을 퍼부었다.

물론 속으로만.

당시 데미안은 인내심이 부족한 데다 성격이 까칠했지만,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으니까.

「이리 오라고 했지. 내가 명령하게 하지 마.」

왕자는 자기가 내킬 땐 데미안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애교를 떨었고, 내키지 않을 땐 바로 반말을 찍찍 뱉으며 명령질을 해 댔다.

고작 열두 살밖에 되지 않은 애새끼 주제에 아주 영악한 씹새끼였다.

하지만 그는 성질을 긁는 데 재주가 있을지언정 데미안을 기분 나쁜 눈으로 보지는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데미안에게 안기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를 안고 싶었던 거라서 이상야릇한 교태를 부리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좆같은 어른보단 버릇없는 애새끼가 낫군.’

스물두 살의 데미안은 이미 인간에게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지나치게 잘생겨서 늘 자신을 음험하게 탐내는 인간들을 줄줄이 달고 다녔으니까.

데미안이 고명한 공작가의 아들이라 웬만한 귀족들은 그를 건드리지 못한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툭하면 음식에 수면제나 발정제가 섞였고 속옷만 입은 귀부인이 침실에 기어들어 오는 일도 흔했다.

그나마 귀부인은 우월한 씨라도 노리고 달려들지, 가슴팍에도 오지 않는 자그마한 남자들이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안아 달라는 눈빛을 보내올 때면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

그가 인간을 혐오하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인간은 다 쓰레기야.’

고결한 신상 같은 외모를 지닌 데미안이었지만, 하도 사람에 치이다 보니 그의 속은 쓰레기장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사람들의 기분 나쁜 시선이, 음탕한 희롱이 언제나 그에게 쓰레기 버리듯이 던져졌으니 쓰레기장 같다는 말은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요. 말을 잘 들으니까 좋잖아요?」

입술을 꾹 깨문 데미안이 억지로 그 앞에 양 무릎을 꿇자, 왕자는 그제야 만족했는지 사랑스럽게 웃으면서 그를 꼭 껴안았다.

다른 왕족이 그랬다면 사형을 각오하고 주먹으로 머리통을 날려 버렸을 텐데 왕자는 작고 말랑말랑한 데다 고소한 우유 냄새까지 나서 그렇게 싫지 않았다.

하지만 이 새끼 자지에 털이 나기 전에 칼침을 놓고 국외로 튀어야겠다는 생각은 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선생님은 정말 강하고 멋져요.」

왕자는 정말 손이 많이 가는 씹새끼였다.

하지만 그의 말은…….

「유리시아 신께서도 분명 선생님의 영혼을 가장 사랑하실 거예요.」

다른 사람들이 쓰레기처럼 내던지는 말과 달리 기분 나쁜 냄새가 나지 않았다.

「선생님, 저도 따라가도 될까요?」

「따라오지 말라고 말씀드리면 따라오지 않으실 겁니까.」

「너무 매정하게 굴지 말아요.」

왕국에서 가장 존귀한 자가 사랑스러운 새처럼 조잘거리며 곁을 따라오는 것도 썩 싫지는 않았다.

그 싫지 않다는 감정은 그가 점점 화사한 꽃처럼 피어나면서 다른 의미로 변하게 되었지만, 그 이야기는 결국…….

그가 지옥에 떨어지는 걸로 마무리되었다.

“그렇죠? 그래서 제가 사 왔어요. 미라 대국에서 수입해 온 건데 인체에도 무해하고 좋은 향기가 난대요.”

한껏 들뜬 미카엘의 목소리가 귓가를 건드리고 나서야 데미안은 퍼뜩 현실로 돌아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분이 더러워 보였던 미카엘은 언제 정색했느냐는 듯 어여쁜 눈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게워 내듯 옛 추억을 떠올렸기 때문인지 입안에 남은 시큼한 기억이 자꾸만 눈앞에 있는 미카엘을 예전의 그로 되돌리려고 했다.

좋지 않았다.

‘끌려가면 안 돼.’

봄볕처럼 간지럽게 웃던 그 아이는,

여름에 내리는 비처럼 따스하게 젖은 눈으로 데미안을 바라보던 그 소년은,

가을에 부는 바람처럼 처연하게 고개를 떨구던 그 청년은,

겨울에 쌓여 가는 눈처럼 서서히 절망으로 물들어 가던 그 남자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

그게 아무리 고통스러운 진실이라 할지라도 데미안은 받아들여만 했다.

그러기 위해 너덜너덜한 심장을 두드려 영혼을 연마해 온 거니까.

언젠가 그가 구원받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혹은 미련에 매달려 비틀비틀 걸으면서도 자학적으로 울부짖고 싶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데미안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빙긋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천 년이란 시간은 정말 긴 시간이었으니까.

“지금 누굴 보고 있어요?”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도로 미카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정말로 눈치 하나는 빠른 남자였다.

“자네를 보고 있네.”

이미 왕국은 멸망했고 그의 왕관은 부서져 버린 지 오래다.

이제 그는 영광의 자리에 앉은 존귀한 자가 아니라 자신이 악마라 주장하는 길 잃은 영혼 나부랭이에 불과하다.

“자네만을 보고 있지.”

하지만 그는 여전히 말 한마디로 데미안을 쉽게 무릎 꿇게 할 수 있었다.

신격을 갖추게 되어 대악마조차 두려워하게 된 데미안을.

왕국이 없어도, 왕관이 없어도, 그는 여전히 데미안의 단 하나뿐인 주군이었기에.

여전히 데미안에게서 배우고 싶어하고, 여전히 데미안의 곁을 따라 걷는 걸 좋아하는 단 하나뿐인 제자였으니까.

거역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흐음. 그래요.”

미카엘은 자기만을 바라보고 있다는 데미안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듯했지만, 바로 날카롭게 으르댔다.

“앞으로도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거야. 당신 눈에 들어간 건 내가 모조리 망쳐 놓을 거니까.”

그 협박에도 데미안은 씩 웃으며 두 눈을 꼭 감는 시늉을 할 따름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저런 건 애벌레나 달팽이가 깨무는 정도의 위협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데미안이 부탁이나 명령에 약하지, 겁박이나 으름장엔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는다는 걸 미카엘은 아직도 깨닫지 못한 듯했다.

‘기억은 그렇다 쳐도 인격이 아직 불안정한 건 걱정인데.’

현재 미카엘의 정신이 불안정한 건 그의 영혼이 아직 이곳에 정착하지 못했기 때문일 거다.

그는 어릴 땐 당돌한 폭군 같았고, 청소년 땐 애교 많은 변태 같았으며, 성년이 되어서는 자기혐오가 심한 비관론자 같았다.

지금의 미카엘은 그 모든 성격이 뒤섞인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니 그의 언동이 다소 두서없어 보이더라도 데미안은 이해했다.

애초에 지옥에 한 번 떨어졌던 영혼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 사례가 없으니 그저 침착하게 대처해 나가는 수밖에.

어머니께서도 경고하지 않으셨던가.

그는 아직 용서받지 못한 영혼이기에 어떤 기행을 저지를지 모른다고.

‘그 기행이라는 게 이틀에 걸쳐 17번을 사정하고도 모자라 잠자고 있는 사람의 유두를 발가락으로 꼬집으려 드는 행동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지만.’

데미안이 본 도색 서적에선 남자 주인공이 하루에 서너 번만 사정해도 힘이 좋다고 나오던데 미카엘은 인간이 아니라서 그런 게 가능했던 걸까.

설마 그것까지 신의 안배인 건 아니겠지.

그런 것치고 데미안은 무척이나 힘들었는데 말이다.

그래도 네다섯 번까지는 기분이 좋았는데 그 뒤는 거의 성고문에 가까웠다.

마치 쾌락이 응축된 약물을 강제로 투여 당하는 듯한 끔찍한 기분이었다.

‘이번에도 그 정도로 하는 건 아니겠지.’

첫 경험이었으니까.

정말 오랫동안 묵혀 두었던 성욕을 발산한 거니까 그날이 특별했던 걸 거라고.

데미안은 제발 그렇게 믿고 싶었다.

데미안은 인간이었을 때도 의식을 잃는 걸 두려워해서 늘 잠을 경계했다.

하지만 그와 처음으로 관계를 맺은 날엔 정말 기절한 것처럼 잠들어 버렸다.

큰 전쟁이 일어난 걸 수습하느라 20년 가까이 잠을 자지 못했을 때도 정신을 놓은 적이 없는데 말이다.

데미안은 체력에 자신이 있었지만, 어린 남자의 성욕은 정말 무서울 정도였다.

어쩌면 데미안이 입맞춤 한번 해 보지 못한 어린 연인 때문에 천 년 넘게 수절하느라 그게 말라 버린 걸 수도 있지만…….

아니, 그런 자학은 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 누가 봐도 17번이나 싸려 드는 놈이 이상한 거지.

물총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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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데미안은 인간이었을 적엔 지옥에서 돌아온 아가리 파이터였으나...

뭐... 성질이 많이 죽었습니다.

가끔 소식적 성깔이 나오긴 하지만 그래도 웃으면서 줘 패니까 많이 유순해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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