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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는 천칭이 기울길 기다리지 않는다-16화 (16/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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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개와 악마는 부르지 않아도 된다

데미안의 팔목에 손가락을 감은 채로 사제관으로 향하던 미카엘은 흰 수단을 차려입은 중년 여성을 발견하고는 슬그머니 손을 풀었다.

홱 고개를 옆으로 돌린 그는 일순 불편해서 죽겠다는 얼굴을 했지만, 이내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고개를 위로 들어 올렸다.

“안녕하세요, 유렐.”

“어머나, 미카엘. 오랜만에 보네요. 사제관을 나가신 뒤로 처음 보는 거죠?”

“네. 그러네요.”

미카엘은 능숙하게 웃는 얼굴을 꾸며 냈지만, 등 뒤로 감춘 손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늘 건조하고 매끄럽던 손가락도 약간 땀에 젖어 있었다.

“그렇게 데미안 신부님을 잘 따르셨으면서 자주 좀 놀러 오시지.”

“일이 좀 바빠서요.”

“저는 두 분이 교제하시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네요.”

“교제는 친, 친구로서는 하고 있죠.”

데미안은 심하게 동요하는 미카엘을 흘깃 돌아보고는 그의 손을 등 뒤에서 가만히 잡아 주었다.

하지만 손을 마주 잡을 여유도 없는지 미카엘은 그저 손끝을 안으로만 옹송그려 쥐기만 했다.

“두 분이 결혼하면 정말 잘 어울리실 텐데. 미남과 미남 커플이잖아요?”

결혼이라는 말에 미카엘의 가슴이 더욱더 빠르게 위아래로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불분명한 과거의 기억이 결혼이라는 말을 뾰족한 가시로 만드는 것만 같았다.

아버지, 어머니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결혼은…….”

어색한 미소마저 잃어버린 미카엘이 파리해진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자, 데미안이 그를 몸으로 가리듯이 앞으로 나섰다.

“유렐, 불편한 말은 삼가게.”

“어머, 죄송해요. 데미안 신부님을 노리는 사람들이 하도 많다 보니 결혼이라도 하시면 좀 낫지 않을까 해서…….”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린 유렐이 어깨를 추욱 늘어뜨리며 말했다.

“상대가 미카엘 같은 미인이라면 불만을 품을 만한 사람도 없을 것 같았구요.”

데미안이 난처한 듯한 웃음을 머금은 채 부드러이 답했다.

“불륜을 저지르자고 꼬시면 더 귀찮아질 것 같네만.”

“설마 그런 짓을…… 할까요, 사람들이?”

“하겠지.”

정말 여러 사람에게 시달려 봤는지 데미안은 단언하고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여하튼 미카엘은 당분간 사제관에서 지내기로 했으니 그렇게 알아 두게.”

“정말요?”

유렐이 반색하자, 데미안이 못을 박듯이 말했다.

“결혼을 전제로 동거하는 게 아니라 그냥 거처를 빌리는 것뿐이네.”

“어머나, 그건 모르는 일이죠.”

유렐이 능청스레 웃으며 말하자, 데미안도 더는 할 말이 없는 듯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아! 알렌 부제가 미카엘을 괴롭히진 않는지 잘 감시해야겠네요. 안 그래도 데미안 신부님이 상대를 안 해 줘서 서운해하던데…….”

유렐은 두 손으로 미카엘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싶은 듯했지만, 차마 그에게 손을 대진 못하고 그저 허공에서 동그랗게 원만 그렸다.

“이렇게 예쁜 사람이 데미안 신부님 옆에 붙어 있으면 얼마나 얄밉겠어요. 안 그래요?”

유렐이 귀여워 죽겠다는 눈빛으로 절 바라보자, 미카엘은 어색하게 웃음 짓기만 했다.

데미안이 그랬다면 냅다 으르댔을 거면서.

“그럼 전 아침 예배를 준비해야 해서 먼저 실례할게요. 미카엘.”

“아, 네.”

“젊잖아요? 힘 좀 내 봐요.”

안 그래도 힘내서 섹스할 생각이었지만, 이렇게 판을 깔아 주면…….

미카엘은 종종걸음을 놓는 유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저 사람이 정말로 불편해요.”

미카엘이 손수건으로 제 손바닥을 닦아 주자, 데미안이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이 땀이 전부 자네의 것만은 아니라네.”

“어…… 선생님도 그러셨어요?”

미카엘 자신도 속을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데미안은 연륜이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정말 표정 관리의 달인이었다.

그가 유렐을 불편해하는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보였는데.

“유렐을 보고 있노라면 어머니가 떠올라서 말이야.”

“어머니라면 인간 어머니요? 아니면…….”

“전지전능한 어머니 쪽 말이네.”

유리시아 신이 저런 느낌이란 말인가?

미카엘은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용케도 천사가 될 생각을 하셨네요.”

“그분의 지옥에 떨어진 이가 아니라면 장군이 되었을 거라네.”

문득 생각에 잠겼던 데미안이 슬며시 미간을 좁히면서 말을 덧붙였다.

“블람 신도 만만치 않은 괴짜이시긴 하지만.”

“좀 제대로 된 신은 안 계시나요?”

데미안은 잘생긴 눈썹을 들어 올리면서 피식 웃었다.

“제대로 된 신이 계셨다면, 이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겠나?”

미카엘은 그 회의적인 말을 듣고 화들짝 놀라 손바닥으로 데미안의 입을 틀어막았다.

“신성 모독이에요, 선생님.”

결벽하기도 하지.

데미안이 작게 웃음을 터트리자, 미카엘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선생님은 신이 두렵지도 않으세요?”

데미안은 근사한 웃음을 입가에 건 채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틀린 말도 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말인가?”

아, 이런 분이셨지.

미카엘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정도로 신념이 굳건한 남자이니 두 신도 눈독을 들였던 것이리라.

데미안은 사람을 죽이고도 죄악감을 느끼지 못 하는 고고한 응징자이자, 쓰레기를 줍고도 손이 더럽혀지지 않는 순결한 청소부였으니 말이다.

그 말은 그가 최고의 성기사이자, 최악의 광전사가 되어 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신의 의지를 대행하는 몸으로 최상의 물건이 아닐 수 없었다.

“자네가 걱정하게 해서 미안하네. 알렌에겐 내가 잘 말하도록…… 잘 처리하도록 하겠네.”

데미안의 말에서 묘한 낌새를 느낀 미카엘이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선생님, 설마 죽이시려는 건 아니죠?”

데미안이 별다른 대답 없이 빙긋 웃기만 하자, 미카엘은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그런 이유로 사람을 죽여요. 선생님이 무차별 학살자도 아니고.”

“죽인다고는 안 했네.”

“아하. 죽이는 것 외에는 뭘 할지 모르겠지만 말이죠?”

미카엘이 비꼬듯이 말하자, 데미안이 조용히 웃었다.

“죄의 무게란 상대적이지.”

“그 말씀은?”

“다른 집 고양이가 얻어맞고 다닌다면 그저 가엾다고 생각하고 말겠지만, 우리 집 고양이가 얻어맞고 다닌다면 어떤 놈이 때렸는지 몰라도 가만두지 말아야지.”

고양이라. 뭐, 귀엽다고는 안 했으니까. 아니, 그래도 마음에 안 들어.

두 눈을 가늘게 뜬 미카엘이 데미안의 어깨를 꽉 깨물었다가 놓으며 말했다.

“선생님네 고양이는 자기가 알아서 복수할 테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할 것 같은데요.”

“그렇군.”

언제나 그랬듯이 데미안은 별다른 타격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그는 미카엘의 말을 듣고 나서 알렌의 처우에 더 골몰하는 것 같았다.

“선생님, 자제하세요.”

불안한 눈빛으로 데미안을 바라보던 미카엘이 그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며 한마디 했다.

“선생님은 가끔 극단적이실 때가 있어요.”

그 말을 듣고 두 눈을 동그랗게 뜬 데미안이 이내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아무래도 중세 시대 사람이다 보니.”

“아.”

단 한마디로 납득이 갔다.

중세 시대야말로 인권이 가장 경시되던 때였으니까.

왕에게 불손한 말 좀 했다고 목이 잘리고, 왕자의 명을 거절했다고 일가족이 죄다 죽어 나가는 시대를 살아온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가치가 있는 건 왕족과 일부 고위 귀족들의 목숨뿐.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이 일상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재화를 만들어 내는 노동력이나 유희 용품에 지나지 않았으니 데미안이 인간의 목숨을 경시하는 이유도 알 만했다.

“생각을 바꾸려고 노력 중인데 머리가 굳어서 그런지 잘 안 되는군.”

심지어 그는 종교에 일생을 바치고, 왕가에 충성을 다했던 성기사 아닌가.

“전 왕자가 아니니까요. 당신이 절 위해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 말을 듣고 우뚝 걸음까지 멈춘 데미안은 아주 오묘한 눈빛으로 미카엘을 바라보았다.

「제가 왕자라고 해도요. 당신이 절 위해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어요.」

감정을 읽기 힘든 그 무표정이 무얼 의미하는지 잘 몰랐기에 미카엘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그를 불렀다.

“선생님?”

「선생님?」

데미안은 땀으로 젖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저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위 속에 든 기억이 헛구역질하듯이 올라오면서 현기증이 일었다.

하도 곱씹어서 가루가 되고도 남을 법한 아주 먼 날의 기억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생생하게 떠오르는지.

그야 눈앞에 있는 이가 그 시절과 같은 얼굴로, 같은 목소리로, 같은 호칭으로 부르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지만.

‘끌려가면 안 돼.’

두 손이 피투성이가 되도 좋으니 어떤 방법으로든 붙잡아야만 한다.

두 다리가 아작나도 좋으니 바닥에 깊이 뿌리를 박아야만 한다.

그래야만 그의 발목을 잡아당겨 대는 무거운 죄악감으로부터 그를 끌어올릴 수 있을 테니.

“아니…… 아무것도 아니네.”

데미안은 머릿속을 찐득하게 배회하는 상념을 떨쳐내려는 것처럼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반말하면서 이름을 불러 주세요.」

하지만 머리 한구석에선 여전히 자신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 준 천진난만한 소년이 키득거리면서 웃고 있었다.

「당신 앞에선 왕자로 있고 싶은 게 아니니까요.」

잊어.

생각하지 마.

지워.

데미안은 실로 표정을 감추는 데 능숙했다.

미카엘이 뒤를 돌아볼 때쯤엔 그는 이미 차분한 얼굴로 돌아와 미소까지 짓고 있었으니까.

미카엘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그를 따라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이 데미안의 머릿속을 노니는 소년과 퍽 닮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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