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여기서 갑자기 기획 회의 때 이야기를 꺼낼 줄이야.
뱃속이 뜨끔했다. 하성민은 슬쩍 눈을 굴리며 입을 다물었다. 시선을 피해 화제를 바꿔보려 한 시도였지만, 불행히도 황 사장은 그 당시 사건을 정확히 기억해내고 만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베낀 기획서를 발표한 사람이 자네였던가?”
황 사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젠장, 김 부장 이 빌어먹을 새끼. 황 사장의 호감을 샀다고 자신했건만 별안간 다시 평판이 곤두박질치게 생겼다. 하성민은 분노로 뺨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푹 고개를 숙였다.
“……그 사건은 정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김 부장님께 제 아이디어보다 더 나은 아이디어가 있다는 추천을 받아 진행하기는 했지만, 설마 같은 사원의 아이디어를 가로채셨을 줄은 정말 몰라서……. 정말 다시 생각해도 부끄럽고 죄송스러운 일입니다.”
“하하, 너무 부끄러워 말게. 회사 일이라는 게 다 그렇지.”
하성민의 뺨과 목덜미가 붉어진 것을 수치심과 죄책감 탓으로 해석한 황 사장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젊은 친구라 그런지 자기 잘못을 순순히 인정할 줄도 알고. 늙수그레한 고인물들보다 훨씬 보기 좋아.”
황 사장은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무릎까지 두드려 대며 하하 웃어 댔다. 이윽고 웃음을 멈춘 그가 숨을 고르듯 후우, 깊은 한숨을 쉬고는 다시 술잔을 집어 들었다. 접대부가 눈치 빠르게 채워 둔 술을 자연스럽게 홀짝대며 그가 술잔 너머로 하성민을 바라보았다.
“―생각해보니, 한동안 할 말은 할 줄 아는 소신 있는 놈들을 만나본 적이 없어. 다들 눈치 보기 바빠 가지고……. 쯧.”
꼿꼿한 자세로 앉아 눈을 내리깐 젊은 대리는 퍽 순종적으로 보였다. 아까 보니 키도 훤칠하던데, 어깨도 넓고 얼굴도 이만하면 잘생긴 편이다. 황 사장은 새삼 하성민을 살피며 입맛을 다셨다. 조금 전 중얼거림은 하성민이 들으라고 한 말이었지만, 생각해보면 최근에는 확실히 젊은 신진들을 포섭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언젠가 세대가 바뀔 때를 고려한다면 슬슬 괜찮은 젊은 피를 발밑에 두는 것도 좋을 터였다.
생각을 끝낸 황 사장이 천천히 잔을 내려놓았다. 옆자리에 앉은 여성이 건네는 디저트를 능숙하게 받아먹은 황 사장이 개구리처럼 튀어나온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고 보니 자네는 올해 나이가 몇인가?”
“아, 올해 스물아홉입니다.”
상체를 모로 돌리고 술을 마시고 있던 하성민이 재빨리 자세를 고치며 대답했다. 황 사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젓가락을 들어 올렸다.
“내 딸이 올해 스물일곱인데, 지금 파리에 있어.”
갑작스러운 자녀 이야기에 하성민이 입을 다물었다. 하성민은 주어진 기회는 기가 막히게 붙잡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바보처럼 그게 무슨 말이냐고 어리둥절해하지 않았다. 황 사장이 자신에게 무슨 제안을 하려는지 금방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그쪽에서 미술을 공부하거든. 겨울방학 때 한국에 잠깐 들어올 예정인데, 상황이 좋아진다면 같이 식사를 하는 것도 재미있겠군.”
황 사장이 입안으로 밥을 밀어 넣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을 마무리했다. 하성민은 스치듯 지나친 엄청난 제안에 전신이 전율하는 것을 느꼈다.
지금 황 사장의 말은, 하성민이 마음에 들게 일해 주기만 한다면 그를 황가에 들일 의향이 있다는 뜻이었다.
짜릿한 흥분으로 입안이 바싹 말랐다. 하성민이 황가의 사위가 된다니, 그보다 더 극적인 신분 상승이 어디 있을까? 만일 그렇게만 된다면 서진우나 김 부장은 물론 백의현 따위는 발치에도 못 미칠 화려한 인생을 살 수 있게 될 터였다.
누구도 넘보지 못할 성공.
그곳에 도달할 수 있다는 조그만 가능성만으로도 벅차게 가슴이 뛰었다. 하성민은 탐욕을 지나치게 티 내지 않으려 애쓰며 황급히 고개를 수그렸다.
“예, 예. 물론입니다……. 기회만 주신다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패기가 참 보기 좋군. 앞으로도 이번처럼 재미있는 일이 생기면 제때 잘 전달해 주길 기대하겠어.”
하성민의 표정에서 차마 숨기지 못한 야망을 읽어낸 황 사장이 빙긋 웃었다. 이윽고 그가 탁,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럼 이제 갑갑한 회사 이야기는 그만하지.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에도 모자라는데 말이야. 그렇지, 희진이?”
“아이참, 사장님도.”
황 사장이 몸을 돌려 접대부의 가슴을 움켜쥐자 접대부가 몸을 배배 꼬며 콧소리를 냈다. 하성민은 눈앞에서 질척하게 혀를 얽기 시작한 중년 남성과 창부에게서 눈을 돌렸다. 황 사장에게 부하 직원에게 자신의 성행위를 보여주는 독특한 성벽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굳이 역겨운 장면을 지켜보고 싶지 않았다.
황 사장이 이 자리에 굳이 접대부를 붙이고, 하성민 앞에서 여자를 희롱하는 것은 일종의 유대감 형성을 위한 일일 터였다. 그렇다면 자리를 뛰쳐나가지 않는 것만으로도 자신은 소임을 다 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 하성민이 귀를 울리는 질척한 신음을 무시하고 술병을 집어 들려 했을 때였다.
“……저어, ……그…….”
하성민의 손 위에 작은 손이 포개어졌다. 하성민은 그제야 내도록 제 옆자리를 지키고 있던 소녀를 돌아보았다. 여성은 얼굴을 붉힌 채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다. 그가 떨리는 손으로 술병을 들어 올렸다.
“제가, 따라드릴게요.”
목소리가 체구만큼이나 가냘프고 작았다. 하성민은 제 잔에 술을 채우는 이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눈을 들어 올린 여성이 시선을 마주치고는 뺨을 붉혔다. 하성민은 그 얼굴에서 어떠한 기대를 읽었다. 눈앞의 잘생긴 남자가 다른 사내들과는 다를 것이며, 어쩌면 여성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고 무사히 이 시간을 넘기게 해 줄지도 모른다는 희망 같은 것.
아마도 황 사장과의 대화를 들으며 멋대로 그런 착각에 빠져든 모양이었다.
‘그런데 어쩌지.’
하성민은 소녀를 내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그리고는 술잔을 단숨에 비워낸 뒤 그의 어깨를 느긋하게 끌어안고 몸을 바투 붙였다. 누가 봐도 희롱하려는 목적이 분명한 움직임에 여성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하성민은 두려움으로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한 신입 접대부의 부드러운 뺨을 검지로 쓸어내리며 속으로 싸늘하게 속삭였다.
‘나는 누구처럼 차려진 밥상을 엎을 머저리가 아니거든.’
하성민의 차가운 눈에서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여성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하성민은 파리해진 접대부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나긋하게 말아 쥐었다.
구역질 나는 은밀한 회동은 이제 시작된 참이었다.
***
“3차? 3차 안 가요?!”
흥에 겨운 임상하의 목소리가 밝은 조명으로 빛나는 밤의 번화가를 쩌렁쩌렁 울렸다. 임상하를 부축하던 김기호가 난처하게 웃었다.
“상하 씨 많이 취했어요…….”
“어어, 나만 취한 것처럼 말한다. 저기 수정 언니도 취했고, 서 대리님도 취했고, 강 과장님도 취했는데?”
“그중에 상하 씨가 제일 많이 취했어요…….”
“김 주임 고생이 많다.”
앞서 걷던 강 과장이 임상하의 팔을 추어올리는 김기호를 돌아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김기호가 겸연쩍게 웃었다.
“아니에요, 제가 제일 힘이 세고 또 상하 씨랑 집도 가깝고 하니까.”
“도와줄까요?”
서진우가 김기호의 곁으로 다가갔다. 임상하가 으응, 소리를 내며 김기호의 어깨를 제 머리로 때렸다.
“혼자 걸을 수 있다니까아.”
“괜찮을 것 같아요. 저쪽에 택시도 많고.”
“그래도 집까지 데려다주는 건 좀 너무 고생스럽지 않나? 상하 씨, 남자친구 부를래요?”
여수정이 임상하의 팔을 가볍게 때려 그를 깨웠다. 이미 반쯤 눈을 감고 있던 임상하에게서는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여수정이 다시금 상하 씨, 하고 임상하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제야 느릿느릿 눈을 깜박인 임상하가 조금 전과는 달리 맥없이 중얼거렸다.
“……헤어졌어요. 그 새끼랑.”
“네?”
뜻밖의 소식에 여수정과 서진우 모두 놀라 눈을 둥글게 떴다. 임상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 새끼, 회사에서 나보다 더 어린 여자애랑 바람 나서……. 핸드폰에 빼박 증거가 다 있었는데, 내가 이거 뭐냐고 추궁하니까 갑자기 나보고 의심병 있냐고 지랄해서……. 흑, 나쁜 새끼. 더러운 새끼, 어린 여자 밝히는 변태 새끼!”
훌쩍이던 임상하가 분노가 치밀었는지 다시 왁왁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김기호가 당황해 임상하를 달래며 여수정과 서진우, 강 과장을 돌아보았다.
“어, 저 상하 씨 집 어디인지 아니까 제가 바래다 드릴게요. 세 분은 걱정하지 마시고 들어가세요. 도착하면 메시지로 잘 들어갔다고 연락드릴게요.”
“기, 김 주임님이 괜찮다면야…….”
“상하 씨, 조금만 정신 차려요. 저기 택시 있어요.”
“어엉, 개새끼이…….”
임상하는 이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엉엉 울고 있었다. 김기호는 임상하를 업다시피 하고 연신 꾸벅꾸벅 세 사람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서진우와 임상하, 강 과장은 김기호와 임상하가 택시 안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상하 씨는 술 마시면 안 되겠다.”
“그나저나 김 주임님이랑 상하 씨가 저렇게 친한 사이인 줄은 몰랐네요.”
“그러게요.”
한 마디씩 감상을 늘어놓은 세 사람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강 과장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슬슬 우리도 들어갈까?”
차가 있는 강 과장은 대리를 호출해 돌아갔다. 자연히 차가 없는 여수정과 서진우가 마지막으로 남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가까운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으, 이제 밤은 좀 춥네요.”
여수정이 양팔을 쓸어내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서진우는 여수정을 돌아보았다.
“슬슬 겨울이 오려나 봐요.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저 원래 추위 많이 안 타요.”
재킷을 벗어 줄 기세의 서진우를 단호하게 거절한 여수정이 몇 걸음 앞으로 걸어 나섰다. 서진우가 걱정스럽게 여수정을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서 대리님. 아무한테나 친절하면 안 된다고 배운 적 없어요?”
여수정이 서진우를 올려다보며 빙긋 웃었다. 서진우는 움찔해 입을 다물었다. 여수정의 말뜻이 무슨 말인지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가볍게 고개를 흔든 여수정이 경쾌한 걸음으로 인적이 적은 골목을 가로질렀다.
“전 딱히 그럴 의도는…….”
“알아요. 서 대리님이 저한테 아무 사심 없다는 거. 그러니까 더더욱 옷 벗어주면 안 되는 거예요.”
평소보다 조금 덜 쌀쌀맞은 목소리로 훈계를 마친 여수정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임상하만큼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여수정도 조금 취한 모양이었다. 서진우는 겸연쩍게 코끝을 긁적이다 천천히 그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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