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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느니 퇴사하겠습니다, 이사님!-65화 (65/150)

65화

“그래서, 광고를 회사에 도배하자고 한 건 누구 생각이었나?”

한동안 접대부와 서로의 몸을 더듬어 대며 낯 뜨거운 식사를 이어가던 황 사장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하성민은 움직이던 젓가락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대답할까.

“―제가 제안했습니다.”

잠시 침묵하던 하성민이 눈을 내리깔며 짧은 답변을 되돌렸다. 황 사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가 제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다시피 하던 여성을 가볍게 밀어내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너무 과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나?”

역시나 못마땅해할 줄 알았다. 하성민은 고개를 숙인 채 코를 찡긋거리며 눈을 굴렸다. 이번 일로 인해 YK그룹에서 YK푸드에 공문을 보냈다고 했던가, 아마. YK그룹은 황 회장이 다스리는 거대 왕국이자 그를 대변하는 곳이나 마찬가지였다. 황 사장이 평생 황 회장에게 인정받기 위해 발버둥 쳤다는 사실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 아는 이야기였다. 그러니 이번 사태가 황 회장에게 달가운 일일 리 없었다. 그 일을 벌인 장본인이라고 하니 당장은 심기가 불편하리라. 하지만 하성민은 이미 이러한 반응을 예상하던 바였다.

“황 사장님께서 불쾌하셨을 부분 충분히 이해하기에 송구스럽습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김 부장님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겠다 싶어서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하성민이 참담해 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시선이 마주친 황 사장이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 침묵을 더 해보라는 뜻으로 이해한 하성민이 침중함을 가장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김 부장님은 프로젝트팀을 와해시킨다는 목적에 집중한 나머지 언제부터인가 저조차 배척하셨습니다. 사장님의 뜻에 따라 백 이사를 저지하겠다는 목적으로 저를 팀에 넣어 두셨으면서, 그 사실을 잊어버리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 광고 건에 대해서도 미리 제게 공유해주시지 않은 겁니다. 저는 이번 광고는 너무 과하다, 회사 이미지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김 부장님을 설득했지만 부장님은 제 말을 들으려고조차 하지 않더군요.”

하성민이 괴로운 듯 얼굴을 찡그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갑갑했던 순간을 떠올리는 것처럼 두 주먹을 말아 쥐고 부르르 떨기까지 하는 그는 누가 봐도 버림받은 충신처럼 보였다. 이윽고 제 감정을 가라앉히려 심호흡을 한 하성민이 단호한 표정으로 다시 눈을 들어 올렸다.

“물론 사장님께 직접 말씀드리는 방법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자신이 없었습니다. 김 부장님은 사장님께서 아끼시는 부하 직원이니까요. 게다가……. 일개 대리가 중간 보고 단계를 마음대로 건너뛰고 사장님께 곧장 보고를 올리는 것도 올바른 타개 방식은 아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

황 사장의 눈썹이 꿈틀했다. 하성민은 자신의 항변이 먹히고 있다고 확신하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물론 겉으로는 간절한 표정을 가장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했다. 그의 말이 호소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조금 더 황 사장에게 진실해 보여야 했으니까. 하성민은 떨리는 숨을 삼키며 제 주장에 쐐기를 박았다.

“만일 저 광고가 실제로 전파를 탔다면 논란은 이쯤에서 수그러들지 못했을 것입니다. 신제품뿐 아니라 회사의 이미지까지 땅으로 고꾸라져서 몇 년간 잊히지도 않고 회자되었겠죠. 사장님께서는 당황하셨겠지만, 회사에 먼저 광고를 풀고 사원들의 의견을 듣는 방법이 그 당시에는 제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타개책이었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성민이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파르르 떨리는 어미에 애처로움이 담겨 있었다. 하성민은 슬쩍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속내를 살피듯 빤한 황 사장의 시선을 계속 마주하고 있다간 제 말이 거짓임을 들킬지도 모르는 노릇이었기 때문이었다.

기실 하성민은 문제를 타개하기 위한 아무 의견도 제시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하성민은 프로젝트가 주저앉든 망하든 아무 상관 없었다. 회사 브랜드 평판이 망가지는 것은 조금 걱정됐지만, 대기업이 광고 하나로 망할 리 없지 않은가. 프로젝트 총괄 자리를 차지할 계획을 세우고야 있지만, 그것도 신제품 이미지가 주저앉으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하성민의 목적은 오로지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무능한 상사를 없애는 것뿐이었다. 무능하고 멍청한 주제에 하성민을 키우던 개 삶듯 내버리려던 김 부장을 용서할 수 없었다.

‘차라리 광고가 아예 온에어 되어 버렸다면 확실하게 조질 수 있었을 텐데.’

분명 공개되면 대한민국이 뒤집힐 만한 쓰레기 같은 광고였다. 당연히 김 부장은 책임을 피해 갈 수 없었을 터였다. 잘하면 사직시키는 것도 가능했을 텐데……. 서진우 그 성실하고 절박한 호구 새끼가 적절한 시기에 절묘한 타개책을 내놓는 바람에 하성민의 야심한 계획이 어그러졌다.

‘사내에 아직 공개되지 않은 광고를 먼저 도배해 버릴 생각을 하다니.’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하여간 마음에 드는 곳이 하나도 없는 놈이었다. 그나마 자신을 좋아해서 이것저것 퍼주고 다닐 때는 얻어먹는 재미라도 있었지, 이제는 그나마도 없이 제 앞길을 방해하기만 하는 서진우가 하성민은 짜증이 났다.

‘건방진 배신자 새끼가.’

서진우의 아이디어와 업무 성과, 일하는 방식과 그 결과물은 모두 하성민의 것이었다. 입사했을 때부터 그러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서진우는 쭉 하성민이 밟고 올라설 승진길의 디딤돌로 남아 주었어야 했다. 그런데 그런 그가 감히 더는 하성민을 좋아하지 않기로 했다니, 세상에 이런 배신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물론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하성민은 제 눈앞에 앉은 황 사장을 의식하며 속으로 씩 웃었다. 어차피 서진우가 제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았더라도 김 부장은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김 부장과 조 과장이 황 사장과 이사진에게 찍힌 것은 확실했다. 그럼 어떤 의미에서는 사직당하는 꼴을 보는 것보다 나을 수도 있었다. 눈앞에서 그 늙은 돼지 새끼가 어떤 꼴로 주저앉는지 구경할 수도 있을 테니까.

이제 하성민에게는 김 부장도, 서진우도 필요 없었다. 중요한 건 황 사장이 그를 얼마나 가치 있는 사람으로 평가할지 여부였다. 그리고 하성민은 필요에 의해서라면 얼마든지 상대가 원하는 인물로 가장할 수 있었다. 그것이 서진우의 공을 제 몫으로 끌어 와야 하는 일일지라도.

실제로 하성민은 조금 전 황 사장의 말에 대답하며 일말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말하면 말할수록 진실로 자신이 그러한 판단을 내린 것처럼 느껴졌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될 이유도 없는 것 같았다. 언제나 서진우의 좋은 것들은 모두 하성민의 차지가 되는 것이 당연했으니까.

이번에는 그러지 말아야 할 이유가 무어란 말인가?

“……김 부장이 말이 좀 심하기는 하더군.”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침묵하던 황 사장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하성민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황 사장이 팔짱을 낀 채 굳은 얼굴로 탁상을 쏘아보고 있었다. 하성민은 재빨리 술병을 들어 황 사장의 빈 술잔에 술을 채워 넣었다. 자연스럽게 잔을 들어 올린 황 사장이 미간을 좁힌 채 술을 들이켰다.

“김 부장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야 대충 소문으로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그 정도로 꽉 막힌 답답한 놈일 줄은 몰랐네.”

끌끌 혀를 찬 황 사장이 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중얼거리는 목소리에는 짙은 탄식이 서려 있었다.

“젊은것들이라고 무시하면서 남의 의견은 들은 체도 안 하다니, 회사 일이 장난인가? 한심하기 짝이 없어. 하 대리 자네가 준비해 준 파일이 아니었다면 영영 몰랐을 거야.”

“아닙니다. 저는 그저 사장님께서 상황을 직접 확인해 보시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혹시 몰라 준비했을 뿐입니다.”

하성민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정중하게 답했다. 사실 대단한 대의 없이 김 부장을 엿 먹이려고 해둔 녹음이었는데, 황 사장이 직접 파일을 듣기까지 했다니. 비서에게 넘기기 전 자신이 했던 말 중 폭언처럼 불릴 만한 부분은 적당히 편집해서 보내길 다행이었다. 속으로 생각하며 하성민이 눈썹을 아래로 휘어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만들어냈다.

“그간은 아무래도 제 상사이시기도 하니 부장님을 믿었지만, 이번 광고 건은……. 부장님의 판단력에 의구심을 갖게 되더군요. 그래서 비서님을 통해 전달드린 건데, 혹시 저 때문에 속이 상하시지는 않았을지 걱정입니다.”

“자네 때문에 속이 상하기는 무슨. 최 이사가 후배라고 적극 추천하기에 이때껏 밀어준 건데, 오히려 그놈이 내 눈을 가리고 있었군그래.”

“아이, 사장님.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기운 내세요.”

황 사장 옆에서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던 여성이 눈치 빠르게 교태를 떨며 황 사장을 달랬다. 정말 눈치가 빠른 접대부군. 황 사장이 끼고돌 만해. 하성민은 술잔을 들어 올려 제 입가에 피어오르는 비웃음을 능숙하게 가렸다.

‘눈을 가리기는 무슨. 아예 밑에 사람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관심도 없으면서.’

하성민이 보아온 한, 황 사장은 제 밑의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팔아 무슨 짓거리를 하고 다니는지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아마 이번 일도 회사 브랜드 자체에 악영향을 끼칠 만큼 위험하다고 판단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평소처럼 김 부장과 조 과장이 무슨 짓을 하든 대충 고개를 돌린 채 못 본 체했을 터였다.

하지만 그런 상사가 오히려 낫다.

“사장님께서 자책하실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 이런 사소한 일들까지 아실 수 있었겠어요. 회사 관리만으로도 바쁘실 텐데.”

하성민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황 사장을 위로했다. 그래, 이깟 사소한 일들 하나하나까지 모두 알고자 하는 상사는 피곤하다. 하성민이 무슨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혹여 남의 아이디어를 갈취하거나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대강 넘겨버리지는 않는지 모조리 꿰뚫어 보는 사람이 상사였다면 하성민은 진작 버티지 못하고 숨이 막혀 죽어 버렸을 터였다.

‘실무 따위에는 관심 두지 마. 모든 건 내가 알아서 다 할 테니까.’

하성민은 속으로 냉소하며 생각했다. 그런 하성민의 속마음을 알 길 없는 황 사장이 제게 몸을 치대는 접대부의 허벅지를 만지작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참 머리가 나쁘단 말이야, 김 부장 그 친구도. 안 그래도 저번 기획 회의 때 이사진 앞에서 대대로 망신당한 꼴을 보고 어떻게 해야 할까 고심하던 참이었는데, 스스로 경질당할 빌미를 알아서 만들어내니, 이것 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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