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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느니 퇴사하겠습니다, 이사님!-64화 (64/150)

64화

서진우가 직접 그 몰골을 목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자리로 돌아온 김 부장과 조 과장은 퍽 참담한 꼴이었다고 했다. 오죽하면 사장실 복도 엘리베이터 너머까지 집기 깨지는 소리와 고함이 들려왔다고 하는 소문이 떠돌았을까. 임원실은 워낙 보안이 철저하니 아마 어느 정도는 과장이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사실이리라고 서진우는 생각했다.

‘그 지랄 맞은 김 부장이 돌아와서 한마디도 못 하고 자리에 찌그러졌다고 할 정도니까.’

아마 이번 기회에 평소 행실까지 지적받은 것일까. 김 부장과 조 과장은 화풀이 당할까 두려워하는 부원들에게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저 퇴근 시간이 도래하자 도망치듯 사무실을 빠져나간 것이 그들이 보인 행동의 전부였다. 그 모습을 모두 보고 온 강 과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서진우에게 다음과 같은 소식을 전해 주었다.

‘1팀 최 과장한테 전해 들은 말인데, 김 부장 징계받을 것 같다고 하더라. 그 광고사에 친척이 있어서 억지로 밀어준 게 걸렸나 보더라고. 잘하면 부장 자리를 내려놓을 수도 있을 것 같다던데? 욕심부리다가 제대로 망한 거지, 뭐.’

그야말로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일이 어떻게 되든 적어도 앞으로는 우리 프로젝트에 감 놔라 배 놔라 하지는 못하겠죠.”

서진우가 임상하에게 밝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임상하가 기쁜 내색을 숨기지 못하고 주먹을 꼭 말아쥔 채 두 발로 바닥을 굴렀다.

“대박! 이제 진짜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된 거네요?”

흥분 어린 막내의 외침에 팀원들이 와르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서진우도 간만에 마음 놓고 편하게 소리 내어 웃었다.

처음 김 부장과 조 과장이 팀 몰래 광고를 뒤엎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참담했다. 아무리 자신이 노력해도 결국 미래가 같은 방향으로 흐르는 것 같아서. 회의실에서 여수정이 두 사람을 향해 비난을 쏟아냈을 때 그를 필사적으로 말린 데에는 그런 이유도 숨어 있었다. 여수정이 결국 자신이 겪었던 미래와 같은 결말을 맞을까 봐. 그래서 필사적으로 이끌고 온 프로젝트까지 끝내 엉망으로 주저앉아 버릴까 봐.

‘하지만 전혀 같지 않았어.’

작은 결심과 시도가 최악으로 치달을 뻔했던 상황을 바꾸었다. 모두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실이 못내 기쁘고 좋았다. 서진우는 오래간만에 느끼는 ‘일하는 보람’을 만끽하며 웃었다.

“이럴 때가 아니라, 우리 회식이라도 해야 하지 않아요? 오늘 다들 시간 어떠세요?”

임상하가 분연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모두를 둘러보았다. 강 과장이 당황해 웃는 얼굴로 어색하게 되물었다.

“갑자기?”

“상하 씨, 진정해. 우리 할 일 산더미만큼 쌓여 있어.”

여수정이 흥분한 임상하의 어깨를 눌러 저지했다. 임상하가 다시 자리에 주저앉으며 등 뒤에 선 여수정을 돌아보았다.

“뭐 어때요, 광고 다시 의뢰하느라 제품 출시일도 밀렸잖아요. 오늘 아니면 당분간 회식 못 해요, 우리.”

“그건 그렇지만…….”

“과장님, 제발요. 네? 저 진짜 김 부장님 욕하고 싶단 말이에요.”

임상하가 제 양손을 깍지 껴 맞잡고 간절한 눈으로 강 과장을 올려다보았다. 서진우는 속으로 탄성을 토했다. 와, 김 부장 뒷담화를 하고 싶다는 말을 이렇게 대놓고 하다니. 이것이 20대의 저력인가.

“―그래, 기념할 만한 날이기는 하다.”

임상하의 간청에 고심하듯 팔짱을 낀 채 미간을 찡그리고 있던 강 과장이 이내 호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내가 쏜다. 강요는 안 할 테니 참석할 수 있는 사람만 따라와. 상하 씨는 회식 주도했으니 메뉴와 가게 정하고.”

강 과장이 데스크에 손을 짚어 몸을 기대며 빙긋 웃었다. 임상하가 꺅, 하고 소녀처럼 소리를 지르더니 곧 매서운 기세로 인터넷에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여수정이 그런 임상하의 뒷모습을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서진우는 그런 여수정을 돌아보았다.

“수정 씨, 참석하실 건가요?”

“가야죠, 공짜 저녁인데. 서 대리님도 가실 거죠?”

“그럼요.”

“저도 가겠습니다!”

김기호가 질세라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렇게 되면 한 사람만 제외하고 전원 참석 의사를 밝힌 셈이다. 모두의 생각이 일치했는지, 팀원들이 일제히 아직 의사를 밝히지 않은 채 홀로 떨어져 있는 이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아, 저는 패스요.”

모두의 이목을 받은 주인공, 하성민이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가벼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강 과장이 눈썹을 아래로 휘며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선약 없으면 내가 살 테니 같이 가지 않겠어? 하 대리도 이번 광고 준비 같이 열심히 했잖아.”

“됐어요. 애물단지 취급당하는 거 지겨워서 열심히 한 것뿐이니까.”

하성민이 강 과장의 권유를 거절하며 차게 웃었다. 여전히 팀원들에게는 일말의 곁눈질도 주지 않은 채였다.

화사했던 팀 분위기가 단숨에 차게 식었다. 모두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침묵하는 사이, 제 핸드폰을 확인한 하성민이 재킷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자료 찾을 게 있어서 나갔다 오겠습니다. 오래 걸리니 저 기다리지 마시고 퇴근들 하세요.”

그가 폭탄을 던진 사람답지 않게 태연한 걸음으로 문밖을 나섰다. 사무실에 싸늘한 정적이 감돌았다.

“……다들 일들 하지.”

강 과장이 의자에 앉으며 맥 빠진 목소리로 지시했다. 팀원들은 말없이 자리로 돌아가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서진우도 찜찜한 기분이 되어 다시 업무 문서를 펼쳤다. ‘애물단지 취급’이라니, 하성민 저놈도 표현이 참…….

[-하 대리님]

[-진짜 양심 없네요]

마침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모니터 구석에 작은 팝업이 연달아 떠올랐다. 여수정이 사내 메신저로 보낸 메시지였다.

[-프로젝트 망하라고 고사를 지내 놓고]

[-애물단지 취급이라니 저게 말이야 방귀야]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양심이 있는 건가?]

연속으로 쏟아지듯 오는 메시지에 서진우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하기야, 자신이 애물단지처럼 굴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면에서는 양심이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원래 저런 자식이니까]

서진우는 여수정에게 간단하게 답신을 보냈다. 이윽고 곧장 여수정에게서 답변이 돌아왔다.

[-그런데 하 대리님]

[-뭔가 이전하고 분위기가 좀 달라지지 않았어요?]

[-원래 저렇게 대놓고 꼽 주는 사람이었나]

“……아니었죠.”

서진우는 여수정에게 답변을 보내는 대신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성민은 분명 변했다. 누가 봐도 결코 좋다고는 말할 수 없을 방향으로.

서진우는 모니터 너머로 비어 있는 하성민의 자리를 바라보며 슬쩍 미간을 좁혔다. 조금 전 분명 핸드폰으로 어떤 메시지를 받고 나가는 것 같았는데, 그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누구일까?

백의현의 말대로 하성민의 태도 변화가 당장은 팀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을 터다. 하지만 서진우는 무어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불길한 예감을 도무지 떨쳐내기가 어려웠다.

하성민은 대체 무슨 꿍꿍이인 걸까?

***

프라이빗 룸 한쪽 벽면에 작은 정원이 조경되어 있었다. 하성민은 음각된 폭포에서 끊임없이 졸졸 흐르는 물줄기 소리를 들으며 눈앞에 차려진 음식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즐거운 식사 시간 되십시오.”

짙은 색 한복을 정갈하게 차려입은 중년 여성이 깊숙이 허리를 굽히고 미닫이문을 닫았다. 완전히 공간이 분리된 후 맞은편에 앉아 있던 황 사장이 젓가락을 들어 올렸다.

“들지.”

“아, 예.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사장님, 제가 한 잔 따라드릴게요.”

“그래, 그래. 우리 희진이가 따라 주는 술 받아야지.”

옆자리에 앉은 한복 차림의 여성이 황 사장의 팔뚝에 몸을 치대며 애교를 부리자 황 사장이 허허 웃음을 터뜨렸다. 하성민은 제 옆자리를 곁눈질해 보았다. 황 사장과 마찬가지로 그의 옆에도 파스텔색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성이 한 명 앉아 있었다. 이제 스무 살을 겨우 넘겼을까 싶을 정도로 앳되어 보이는 여성은 접대가 익숙하지 않은지 잔뜩 주눅 들고 긴장한 표정이었다.

“저, 저도 한 잔 따라드리겠습니다…….”

맞은편 여성을 따라서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작은 호리병을 들어 올린 여성이 하성민의 술잔을 채웠다. 이러다 흘리겠네. 하성민은 속으로 혀를 찼지만 겉으로 그런 태도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처음 황 사장과 독대하는 자리다. 괜히 나쁜 인상을 남겨 첫술도 못 뜬 밥상을 엎고 싶지는 않았다.

간판 하나 걸려 있지 않은 회색 건물 지하에 고급 차량이 줄지어 주차된 모습을 보았을 때부터 일반인은 범접은커녕 존재조차 알기 어려운 가게일 것임은 짐작했다. 하지만 프라이빗 룸이 줄지어 자리해 있음에도 작은 소리 하나 새어 나오지 않는 복도, 흠집 하나 없는 유기그릇에 담긴 음식과 하나하나 허투루 들이지 않은 가구까지.

이런 장소에서 사장과 단둘이 식사할 기회가 이리도 빨리 찾아오다니. 부담감과 쾌감이 뒤섞인 짜릿한 감각이 등줄기를 내달렸다.

“하하, 그쪽 아가씨는 이런 자리가 처음인가 봐?”

간신히 술을 흘리지 않고 따라낸 접대부에게 황 사장이 말을 건넸다. 하성민의 옆자리에서 숨을 돌리던 여성이 갑작스러운 질문에 놀라 흡, 숨을 삼켰다.

“사장님이 이해하세요. 들어온 지 일주일 됐어요. 그래도 실장님이 사장님 오신다고 하니까 새 얼굴 한 번 소개는 올려야 된다고 나름 신경 쓴 거예요.”

희진이라 불린 여성이 재빨리 살랑거리며 대답을 늘어놓았다. 그는 그새 황 사장의 어깨를 은근히 매만지고 있었다. 긴장으로 뻣뻣하게 얼어붙어 있는 신입과는 비교도 못 할 만큼 능숙한 솜씨였다. 하성민은 그 매끄러운 행동을 눈에 담으며 내심 감탄했다. 황 회장이 허허, 웃으며 접대부의 허리를 끌어안고 뺨에 입을 맞추었다.

“새 아가씨보다야 우리 희진이가 열 배, 백 배는 낫지. 그래도 노는 건 조금 이따 하자고. 일단은 밥부터 먹어야 하지 않겠어.”

“희진이가 먹여 드릴게요.”

접대부가 테이블 위에 놓인 손톱만 한 약과를 집어 들어 황 사장의 입에 슬쩍 밀어 넣었다. 황 사장이 기특해 죽겠다는 얼굴로 제 뺨을 여성의 뺨에 문질러 댔다. 저 역겨운 얼굴이 들이대는데도 표정 하나 안 변하고 교태를 부리다니, 과연 프로답다. 하성민은 조용히 끌끌 혀를 찼다.

‘하여튼 여자 밝히는 인간들은 하나같이 다 추잡해.’

하성민은 룸살롱에서 오만 더러운 행태를 과시하던 김 부장 무리를 떠올리며 속으로 차게 웃었다. 이 회사의 관리자가 모조리 주색을 밝히는 놈들로 가득 찬 것은 분명 눈앞의 황 사장 때문이겠지. 본인부터가 내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한 장소로 기생을 끼고 노는 요정을 선택할 정도이니.

“건배부터 하지.”

“넵.”

하지만 하성민은 그런 황 사장을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눈 딱 감고 이 추잡하고 역겨운 주지육림에서 함께 뒹구는 것만으로도 권력자의 신뢰를 살 수 있는데 어떤 바보가 그런 기회를 마다하겠는가? 하성민은 바보가 아니었다. 아니, 제때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콱 붙들었으니 머리가 비상하다고 평가받아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하성민은 눈앞의 사내가 내밀어 온 술잔에 얌전히 제 술잔을 맞부딪쳤다. 엄지보다 작은 크기의 도자기 술잔이 둔탁한 탁,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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