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10월 27일 수요일 오전 5시 47분경.
연구부 3팀 소속인 한유정 주임은 새벽 첫차를 타고 막 회사에 출근한 참이었다. 연구소에 배양해 둔 효소의 변화를 제시간에 점검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6시 10분까지 연구실에 도착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 나……. 월요일도 아니고, 금요일도 아니고, 수요일에 조기 출근이라니.’
한유정은 한 손에 제 팔뚝만 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든 채 분기 어린 눈으로 높은 정문을 노려보았다. 안 그래도 그놈의 효소 때문에 전날도 밤 11시까지 회사에 붙어 있었건만. 한유정은 혼자 야근과 조기 출근을 반복해야 하는 현실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다못해 다른 사람이 도와주기라도 하면 좀 덜 억울할 텐데, 팀원들은 각자 나름 중요한 일을 맡고 있다고 하며 한유정을 전혀 도와주지 않았다.
‘하여튼 정 없는 것들.’
한유정은 종이 빨대를 잘근잘근 씹으며 계단을 올랐다. 뭘 모르는 사람들은 대기업 다니면 다 좋은 줄 알고 막연히 부러워하지만, 한유정은 대기업이 좋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차라리 인성 좋은 대표가 이끌어 가는 사업 기반 탄탄한 중소기업이 훨씬 나았다. 비슷한 업계에 종사하는 대학 동기 중 하나가 그런 회사에 다니는 중이었는데, 매번 칼퇴근을 하면서도 상여금이다 휴가다 하는 꼴을 보면 정말 배가 아파서 죽을 지경이었다.
물론 보편적 의미의 중소기업에 다니는 사람들이 보면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다고 혀를 찰 불평이었지만, 뭐. 똥통을 커다랗게 지었다고 똥통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잖은가.
‘그나마 잔업수당이라도 챙겨 주니 다행이지, 이거라도 안 줬으면 진짜 확 관둬 버렸을 텐데.’
한유정은 최근 자신의 명의로 집을 구매했으며, 그 대출금을 갚기 위해서는 퇴사할 수 없다는 현실적인 생각은 잠시 뒤로 미뤄 두었다. 본디 아직 꿈나라에 있어야 할 시간에 밖에 나와 있다 보니 평소보다 감정적일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한유정은 속으로 한껏 회사를 욕하며 회전문 안으로 들어섰다.
잔업의 거의 유일한 좋은 점이라면, 회사에 사람이 없다는 부분이다. 평소에는 북적거리는 로비가 보안직원 몇 명을 제외하면 텅 비어 있었다. 한유정은 아메리카노를 쪽쪽 섭취하며 익숙하게 사원증을 찍고 안으로 들어섰다.
“?”
별생각 없이 엘리베이터로 향하던 한유정은 문득 번쩍거리는 스크린에 시선을 주었다. 1층 로비에 설치된 커다란 스크린에는 처음 보는 촌스러운 광고가 흐르고 있었다.
“……저게 뭐야?”
잠시 멈춰서 광고를 구경하던 한유정이 눈썹을 찡그렸다. 평소에도 회사 브랜드 광고나 신제품 프로모션 영상을 상영하는 스크린이라 새로운 제품이라도 나왔나 하고 살펴본 건데, 내용이 영 심상치가 않았다. 한유정은 물고 있던 빨대를 뱉어내고 멍하니 다음 광고를 이어 재생하는 스크린을 올려다보았다.
비키니 차림의 헐벗은 외국인 여성들이 한 남자를 가운데에 두고 클럽이라도 온 양 온몸을 서로 비벼대며 야릇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한유정은 저도 모르게 탄식을 토했다. 어이없고 황당했다. 아니, 한여름에 나와도 욕먹을 판에 가을이 다 지나가고 있는 마당에 이런 광고를 냈다고? 촌스럽고 혐오적인 부분은 둘째치더라도 TPO가 전혀 들어맞지를 않았다.
대체 어느 팀이 이런 과감하고 멍청한 짓을 저지른 거지? 자리에 얼어붙어 광고를 보던 한유정은 마지막에 떠오른 제품 로고를 확인하고 눈을 깜박였다.
“엥? 저거 1팀 김 주임이 진행 중인 프로젝트 아니야?”
비록 다른 팀이었지만 한유정도 저 신제품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워낙 사내 테스트 반응도 긍정적이었던 데다, 콘셉트가 현대인의 니즈를 절묘하게 맞춰 화제가 되었던 제품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테마도 좋고 맛도 있고 디자인도 귀여운, 누가 봐도 여성 소비자 대상 신제품의 광고를 왜 저따위로 뽑은 거야? 저 프로젝트 팀장도 누구였지, 해외에서 실적 올리던 여자 과장님을 굳이 지목해서 데려왔다고 하지 않았나?’
한유정이 어리벙벙해 하는 사이, 같은 제품의 다른 버전 광고가 몇 번 더 지나갔다. 물론 내용은 가관이었다.
‘……외압이라도 있었나……?’
팀원 중 제정신인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이런 광고를 컨펌하지는 않았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악수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여러모로 영문 모를 불쾌한 광고 탓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한유정은 광고를 외면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시야에서 선정적인 이미지가 사라지자 뒤늦게 이성이 돌아왔다. 한유정은 연구실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계기판을 올려다보며 아메리카노를 입가로 가져다 댔다.
“진짜 누가 제작했는지는 몰라도 광고 미쳤네. 시대가 어느 땐데…….”
자신이 소비자라면 저 광고를 보고는 절대 제품을 구매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사옥에서 선공개된 프로젝트 캠페인 영상을 본 첫 번째 직원의 감상이었다.
***
프로젝트 팀의 광고는 단발성으로 재생된 것이 아니었다. 김 부장과 조 과장이 제작을 강요해 탄생한 그 논란의 광고는 그 주 금요일까지 사흘 내내, 사옥 전 층에 설치된 홍보용 스크린을 통해 다양한 버전으로 상영되었다. 덕분에 장기 휴가를 간 직원을 제외한 모든 직원이 그 광고를 한 번은 보았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였다.
그리고 회사 익명 커뮤니티에 불이 났다.
「제목: 신제품 광고 시안 컨펌한 애들 미친 거 아님?」
그 팀엔 여자 없대?
⌎팀장이 여잔데 뭔소리ㅋㅋ
⌎⌎근데 광고에 여자들을 저렇게 다 벗겨서 내놓는다고?
⌎⌎K과장님 아닌가? 감 다 죽은듯 ㅠ
「제목: 최근 논란 중인 광고 관련해서 충격적인 비하인드 들음」
그 프로젝트팀에 친한 직원이 소속돼 있어서 전해 들었는데,
원래 최종시안은 그게 아니었다네요…….
모 부장이 제작 사흘 전에 멋대로 시안을 바꾼 거래요.
회의실에서 팀원들 소리지르고 화내고 난리였다던데……-_-;;
너무 안타깝습니다. ㅠㅠ
⌎P&D부 K부장 & M부 J과장 유우명
⌎⌎미쳤나 ㄷㄷ 역대급 똥칠 콜라보
⌎이게 진짜면 프로젝트팀 진짜 불쌍한데요……ㅠ
⌎아니 이거 어디다 찔러야 하는 거 아님?? 윤리위원회 이런거 없음?
「제목: 직원이기 이전에 여성으로서 불쾌합니다.」
아무리 YK가 남초회사라지만 이 광고를 막을 사람이 정말 아무도 없었던 건가요?
몇 년 전 영전식품에서 냈던 여성혐오 광고가 어떤 꼴이 났는지를 아신다면 절대 이런 기획은 하지 않으셨을 텐데…….
아직도 여성을 이토록 성 상품화하는 광고를 제가 다니는 회사에서 당당하게 내다니 참담하고 비참합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더 큰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광고 교체해 주세요.
⌎저도 창피해서 고개를 못들겠어요 ㅠㅠ
⌎⌎또또 여혐 프레임으로 몰고가네
⌎⌎⌎이게 여혐인줄 모르는 지능으로 입사는 어케했어 ㅉㅉ
⌎아직 온에어 안 됐다고 하니 기다려 봅시다. 사내에서 먼저 공개한 데에는 이유가 있겠죠…….
“와, 진짜 난리가 났네요. 장난 아니다.”
임상하가 마우스를 달칵거리며 혀를 내둘렀다. 그도 그럴 것이, 사내 익명 게시판이 통째로 광고 이야기로 뒤덮여 있었다. 중간중간 몇 층 탕비실 커피 머신이 고장 났다느니, 화장실 무슨 칸 문이 안 열린다느니 하는 평범한 글들이 섞여 있었지만, 대다수는 이번 논란의 신제품 광고에 대한 게시글이었다. 심지어는 그 목록이 몇 페이지나 계속될 정도였으니 팀원들이 눈을 떼지 못할 만도 했다.
“사흘 내내 회사에서 저 광고만 틀어 댔으니까.”
강 과장이 데스크에 몸을 기대고 선 채 커피를 홀짝였다. 게시판에서 쏟아진 팀장을 향한 비판과 비난의 글 때문인지, 혹은 그 뒤 급박하게 쏟아진 추가 업무 때문인지 그는 퍽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전 어제 연구부 사무실 갔다가 친한 동료 누나한테 욕먹었어요. 너희 팀 미쳤냐고…….”
넓은 어깨를 구긴 채 임상하 옆에 붙어 모니터를 함께 구경하던 김기호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뭐라고 했어요?”
“솔직하게 다 이야기했죠. 광고 시안이 뒤바뀌었다고……. 그러기로 한 거 아니었나요?”
시무룩하게 대꾸하던 김기호가 고개를 들어 팀원들을 둘러보았다. 서진우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셨네요.”
“그나저나 진짜 서 대리님 끝내주지 않아요?”
별안간 임상하가 홱 고개를 돌려 등 뒤에 선 서진우를 올려다보았다. 커다란 눈이 반짝반짝 과하게 빛이 났다.
“어떻게 이런 발상을 하셨어요? 사옥 스크린에 온에어 전인 광고를 풀다니요, 그것도 사흘 내내!”
“―그, 제 아이디어가 아니라 백 이사님 아이디어예요.”
과한 선망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진 서진우가 겸연쩍게 시선을 내리며 고백했다.
백의현이 낸 아이디어를 채택해, 그날 밤 바로 강 과장에게 연락을 넣고 스크린 상영 승인까지 곧장 받아냈다. 모든 일이 빠르게 이루어진 터라 다른 팀원에게까지 구구절절 상황을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서진우는 자신을 돌아보는 팀원들에게 그날 밤 백의현이 어떤 의견을 냈으며, 스크린 상영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간단하게 설명해주었다.
“와……. 이사님 정말 대단하신 분이네요.”
서진우의 설명을 꼼꼼히 귀담아들은 여수정이 탄성을 토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옥 스크린에 광고를 뒤덮을 생각을 하시다니. 역시 임원은 다른가 봐요.”
“그러게. 어떤 의미로는 이 사옥이 작은 국가 같은 거니까, 사내 테스트 때처럼 광고 선호도 확인에도 적합할 테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강 과장이 팔짱을 끼며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이미 서진우를 향해 가장 먼저 이야기를 전해 들었지만 새삼 생각하니 또 감탄스러운 모양이었다. 여수정이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덕분에 광고 다시 제작할 수 있게 돼서 다행이에요.”
초유의 망한 신제품 광고는 YK그룹사까지 대대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몇몇 직원들이 외부 블라인드 커뮤니티에서도 이번 사건을 떠들어댄 까닭이었다. 그 탓에 그룹사 브랜드 관리부서에서 YK푸드에 직접적인 지시가 내려왔다고 했다. 그룹사 이미지에 현저한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광고는 중단하고 새로이 광고를 제작하도록.
덕분에 프로젝트팀은 원래 선점해 두었던 광고사에 다시 연락해 원하던 시안을 의뢰할 수 있게 되었다. 그야말로 해피 엔딩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조 과장님과 김 부장님이 사장실로 불려 갔다던데 사실인가요?”
만족스럽게 입맛을 다시며 모니터를 구경하던 임상하가 불현듯 강 과장을 돌아보며 눈을 빛냈다. 서진우는 강 과장과 슬쩍 시선을 교환하고 옅게 웃었다.
사실 바로 전일인 목요일 오후, 김 부장과 조 과장은 호출을 받아 불려갔다가 몇 시간 뒤 창백해진 얼굴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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