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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느니 퇴사하겠습니다, 이사님!-62화 (62/150)

62화

―심각하군요.

결과물을 받아 본 백의현의 짧고 굵은 감상에 서진우가 씁쓸하게 웃었다.

“일단은 대행사 측에 요청해서 원래 시안대로 광고를 다시 제작해 달라고 하긴 했는데…….”

―김 부장 조카가 다니는 회사라고 했던가요? 다시 제작해 준다 해도 결과물을 기대하기는 어렵겠군요.

“네…….”

서진우가 턱을 긁적이며 한숨을 쉬었다. 안 그래도 원하던 회사의 좋은 작업물 대신 울며 겨자 먹기로 선택했던 그저 그런 차선책이었다. 그런데 그나마도 이런 엉망인 결과물로 뒤바뀌어 버렸으니, 아무리 전망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려 애써도 막막한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백의현의 차분한 목소리가 심란한 마음을 가라앉혀 주었다. 서진우는 입맛을 다시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무턱대고 이사진분들에게 봐 달라고 매달릴 수도 없고.”

애초에 일개 대리가 이사진 회의를 소집할 권한도 없거니와, 문제의 심각성을 호소하며 기안을 올려본다손 치더라도 실제 소집이 이루어지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사이 광고가 온에어 되기라도 하면, 무슨 수를 써도 더는 돌이킬 수 없어지게 될 터였다.

“이사님이 한국에 계셨다면 좋았을 텐데…….”

자신도 모르게 아쉬운 소리를 중얼거리던 서진우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입을 다물었다. 선생님 찾는 어린아이도 아니고, 실무자도 아닌 이에게 징징대다니 이게 무슨 무책임한 모습이란 말인가. 아무리 백의현이 친근하게 느껴진대도 그는 엄연히 상사이자 회사의 경영진이었고, 그가 대놓고 밀어주고 있다고 해도 프로젝트를 책임져야 하는 이는 서진우 자신이었다.

“죄송합니다.”

서진우가 재빨리 사과했다. 수화기 너머에서 백의현의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뭐가 미안합니까, 보고 싶다고 말한 것뿐인데. 서진우 씨는 가끔 실없는 데가 있습니다.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서진우는 문장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어색하게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언어를 백의현은 종종 묘한 뉘앙스로 해석하고는 했다. 문제는 그 해석에 마음 한구석이 퍽 간지러워진다는 점이었다. 서진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의현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 뜻이 아니면 더 좋은데요. 굳이 일 때문이 아니어도 서진우 씨가 날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봐라, 또 또 흘리지. 서진우는 속으로 탄식을 삼키며 눈을 감았다. 백의현이 하는 ‘좋다’라는 말에 아무 의미가 담겨 있지 않다는 것은 서진우 자신이 제일 잘 알았다. 그런데도 매번 심장에 열이 올랐다. 서진우는 한숨을 쉬며 눈을 떴다.

“이사님은 소싯적에 여자분들한테 미움 좀 받았겠어요…….”

―네?

서진우의 맥 빠진 목소리에 백의현이 어리둥절해했다. 서진우는 핸드폰 액정을 가볍게 흘겨보았다.

“자각 없이 아무한테나 잘해 줘서 오해 산 적 없으세요?”

서진우의 타박하는 듯한 질문에 백의현이 고민하듯 목을 울렸다.

―음……. 글쎄요. 딱히 없는데. -아, 대학생 때 그런 말을 들어본 적 있는 것 같긴 합니다.

역시.

서진우가 속으로 툴툴대며 입술을 비죽였다. 이런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다정함을 베풀어 누구에게나 비슷하게 행동하기 마련이었다. 딱히 무슨 기대를 한 것도 아니면서, 돌아온 답변에 내심 조금 서운해졌다.

―왜 물어보고 대답이 없습니까.

서진우의 침묵이 길어지자 백의현이 재차 입을 열었다. 아, 그만 생각하자. 스스로가 한심해진 서진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왜요. 내 말에 설레기라도 했습니까? 그럼 성공한 건데.

“네, 네?”

이어진 질문에 화들짝 놀란 서진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웃음기 섞인 백의현의 나직한 속삭임에 귓등으로 소름이 쭈뼛 돋아났다. 서진우는 두 손으로 핸드폰을 쥔 채 황급히 눈을 굴렸다. 당연히 자기 혼자만 있는 집인데도 누가 들었을까 무서울 지경이었다.

“오해받을말씀하지마세요…….”

서진우가 핸드폰에 입술을 붙이고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수화기 너머에서 백의현이 소리를 내서 하하, 웃는 소리가 들려 왔다. 서진우는 요란하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손바닥으로 제 이마를 꾹 누르고 눈을 감았다.

‘이 자식 헤테로 맞아? 사실 게이인데 엄청 잘 숨기는 거 아닌가?’

서른 살을 꽉 채워 동성애자인 자신을 받아들이고 살아온 서진우는 한 번도 게이와 게이가 아닌 인간을 잘못 구분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백의현은 진짜로 슬슬 헷갈릴 지경이었다. 아니, 물론 헤테로가 동성에게 더 많은 스킨십을 해 대고 남이 들으면 큰일 날 법한 말도 아무렇지 않게 건네는 편이긴 했다. 하지만 그래도 정도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서진우는 속으로 백의현에 대한 오만가지 분노를 쏟아내며 황망하게 집 안을 거닐었다.

―이런, 너무 웃었네요. 미안합니다, 농담이었어요.

“……그러시겠죠.”

―다시 업무 이야기로 돌아가죠.

겨우 웃음을 거둔 백의현이 화제를 돌렸다. 여전히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 있었지만, 서진우는 투덜거림을 멈추고 다시 식탁 의자에 앉았다.

―하성민 대리가 이사진과 별도로 접촉하는 것 같다고 말했었죠? 아마도 황치택 사장 라인의 누군가.

“……그냥 추측일 뿐이지만요.”

서진우의 음성이 무거워졌다. 회의 중 하성민의 발언을 떠올리자 다시금 뇌리에 의혹이 차올랐다.

김 부장과 조 과장에게 항의할 때 하성민은 ‘사장님’을 노골적으로 언급하며 그들의 신경을 긁었다. 그건 분명 새로운 비빌 자리를 마련했음을 어필한 것이었다. 문제는 그 ‘비빌 자리’가 누구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하성민이 누군가에게 로비를 하러 다닐 시간이 없는 거야 같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서진우가 가장 잘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하성민은 예전처럼 시간에 맞춰 칼퇴 하거나 주말에 김 부장의 접대를 따라다니지 않았다. 그랬던 시간을 모두 일에 쏟아붓고 있었으니까. 가끔은 서진우보다 하성민이 더 늦게 퇴근하는 날도 있을 정도였다. 그런 놈이 대체 어디서 새로운 인맥을 만들었을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습니다. 서진우 씨에게 그 정도로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냈던 사람이, 갑자기 호의적으로 구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테니까요.

“……그렇겠죠, 아무래도.”

서진우는 담배와 라이터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성민을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져 와서 입 안이 말랐다.

하성민이 프로젝트 일을 열심히 하게 되었다고 해서 딱히 서진우에게 호의적인 태도로 변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서진우의 등골을 빼먹으려 꼬리를 흔들며 아양을 부릴 때 더 호의적으로 보였다. 물론 그렇다 해서 적의를 내보이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무시에 더 가깝지.’

서진우도 더는 하성민을 신경 쓰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그동안은 그의 행동 변화에 대해 크게 의식할 일이 없었다. 그저 하성민이 인사부에서 징계 경고를 받은 일에 큰 충격을 받아 주눅 들어 몸을 사리는 것이겠거니 막연히 생각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다른 꿍꿍이 때문에 태도가 바뀐 것이라면?

의심에 몰두한 탓에 볼이 뻣뻣하게 굳었다. 서진우는 가볍게 제 뺨을 문지르며 이로 담배를 빼 물었다.

―하지만 서진우 씨의 추측이 맞는다면 일단 상황은 호재라고 봐도 되겠군요.

“네?”

칙, 막 담배에 불을 붙이던 서진우가 의아해져 핸드폰을 돌아보았다. 백의현이 나긋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적어도 하성민 대리가 지금 노리는 사람이 김석환 부장이나 조윤기 과장보다 힘이 센 인물이라는 뜻이잖습니까. 그렇다면 하성민 대리는 그 사람을 이용해서 김석환 부장을 밀어내려 하는 거겠죠.

서진우는 그제야 백의현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깨달았다. 백의현이 쾌활하게 결론을 내렸다.

―김석환 부장과 조윤기 과장이 사라지는 게 우리에게 있어 결코 나쁜 일은 아닐 테니, 저들끼리 싸우다 자멸하는 꼴을 보는 것도 괜찮을 겁니다.

“……그건, 그렇네요.”

백의현이 보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서진우는 허공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속으로 감탄했다. 하성민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과 연을 맺었든, 김 부장과 조 과장에게 호의적으로 대하던 때보다는 확실히 나을 터였다. 한 명이라도 더 반기를 든다면 그만큼 두 사람의 장악력이 약해진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광고 퀄리티는 황치택 사장이 아무리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는 해도 감싸줄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니 어차피 김석환 부장과 조윤기 과장은 이번 기회에 떨어져 나가리라 봅니다. 프로젝트가 같이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일 뿐.

“하하……. 마음 같아서는 대놓고 SNS에 확 풀어 버리고 싶어요. ‘김 부장이 시안 마음대로 교체한 버전’, 이렇게 이름 붙여서요.”

서진우가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물론 그런 짓을 하면 제품에 영원히 씻지 못할 오명을 남겨버리게 될 테니 실천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정말이지 현실적인 문제만 없다면 어딘가에 김 부장과 조 과장의 광고를 전시한 뒤 그 앞에 돗자리를 깔고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거 좋네요, 그렇게 하시죠.

“네?!”

백의현의 상쾌한 대꾸에 서진우는 그만 놀라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떨어트리고 말았다. 이크, 재빨리 꽁초를 주워 재떨이에 비벼 꺼트린 그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되물었다.

“지, 진짜 올리라고요? SNS에?”

―그럴 리가요.

백의현이 낭랑한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그럼 무슨 뜻이지. 서진우가 당황해 눈만 깜박이고 있을 때였다.

―당연히 대중에게 그대로 공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소비자들은 회사 내부 사정을 알 리 없고, 물론 알 필요도 없죠. 만일 정말 이 광고가 세상에 공개된다면 소비자들은 제목 같은 건 상관하지 않고 회사를 비난할 겁니다.

“그럼……어떻게 하라는 말씀이신지…….”

혼란스러워진 서진우가 공손히 핸드폰을 양손으로 붙들었다. 음, 하고 목을 울린 백의현이 곧 특유의 나긋한 목소리로 산뜻하게 말했다.

―비밀은 유지하되 대중의 의견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회사 내부 사정을 아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면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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