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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느니 퇴사하겠습니다, 이사님!-61화 (61/150)

61화

“그래서 뭐 어쩌자는 거냐, 지금. 이미 제작도 다 끝났는데 그냥 개겨 보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조 과장이 팔짱을 낀 채 빈정댔다. 하성민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개기다니요. 제가 어떻게 감히 부장님, 과장님께 개기겠습니까. 그냥 광고를 원래 시안대로 다시 제작하자고 말씀드리는 거죠. 저희의 순수한 제안을 개긴다고 말씀하시니 슬프네요.”

“개기…….”

조 과장이 조롱처럼 반복되는 표현에 말문이 턱 막힌 표정을 지었다. 하성민은 그런 조 과장을 무시하며 강 과장을 돌아보았다.

“어차피 대행사도 두 번 찍느라 비용이 더 들었다고 했으니, 첫 번째 시안도 마무리해서 보내달라고 하면 비용도 크게 초과하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하성민의 드물게 합리적인 의견 제시에 몇 발자국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강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 대리 말이 맞아요. 지금이라도 광고를 다시 찍으면 됩니다. 출시일이야 며칠 조정할 수 있고-.”

“이것들이 단체로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별안간 천둥과 같은 노성이 터져 나왔다. 화들짝 놀란 서진우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여수정과 하성민의 표정도 금세 다시 굳어졌다. 김 부장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씩씩대고 있었다. 그가 한 손으로 조 과장을 밀치고 쿵쿵대며 원탁 근처로 다가왔다. 그가 어찌나 화가 나 보였던지, 조 과장마저 당황했을 정도였다.

“부장님, 일단 진정하시고.”

“뭘 진정해!”

황급히 그를 만류하려 두 손을 뻗는 조 과장을 뿌리치며 김 부장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주 하나같이 거만하게 고개 똑바로 쳐들고들 있네. 너희들이 그렇게 잘났어? 어? 아주 회사에서 주목받는 프로젝트 하나 잡았다고 고개가 빳빳들 하셔.”

김 부장의 눈이 기이하게 번들거렸다. 가느다란 실핏줄이 솟은 흰자위가 붉게 물든 것처럼 보였다. 그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강 과장, 하성민, 여수정, 서진우를 번갈아 돌아보았다.

“너희는 내가 우습냐? 이제는 내가 상사 같지도 않아? 하나같이 면상들이 재수가 없어서는……. 내가 이 기획안 통과시키지 않았으면 너희가 지금 이 프로젝트 시작이나 할 수 있었을 것 같아? 뭐가 그렇게 잘났어들!”

침까지 튀어가며 열성적으로 폭언을 토해낸 김 부장이 퉁퉁 부은 손으로 삿대질을 했다. 서진우는 어처구니가 없어 눈썹을 찌푸렸다.

‘뭐라는 거야.’

애초에 남의 기획서를 가로채려던 게 누군데. 백의현이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지 않았더라면 프로젝트는 어떻게 시작했더라도 끝을 맺지 못하고 고꾸라졌을 터였다. 그 미래를 보고 온 사람이 눈앞에 똑똑히 있는데 어떻게 저딴 말을 입에 담을 수 있단 말인가.

비록 입에 담지는 않았지만, 김 부장은 서진우의 이러한 속내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서진우를 향해 홱 고개를 돌린 김 부장이 별안간 이를 드러내며 성큼성큼 가까이 걸어오기 시작했다.

“뭐야 너, 그 표정. 내가 고까워? 이제는 아주 숨길 생각도 않는구나. 내가 너 처음 봤을 때부터 재수가 없었어. 알아?”

그걸 어떻게 모르겠는가. 룸살롱 미팅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했을 때 그의 표정에 드러났던 멸시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도 뇌리에 생생한데. 서진우는 대답 대신 굳은 표정으로 김 부장을 마주 보았다. 서진우의 반항적인 표정을 마주한 김 부장이 허, 하고 헛웃음을 토했다.

“서진우 대리, 이 새끼가 백의현 이사한테 예쁨 받는다고 뵈는 게 없는 모양이네.”

성큼, 그가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왔다. 당황한 여수정과 강 과장이 서진우에게 다가오려 몸을 돌렸다. 서진우는 김 부장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손바닥을 들어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 어차피 김 부장은 서진우에게 손을 올릴 수 없을 것이다. 그에게 일말의 이성이 남아 있다면.

이윽고 서진우의 코앞에 멈춰 선 김 부장이 검지를 들어 서진우의 가슴팍을 쿡 찔렀다.

“너 그따위 태도면 회사에서 오래 못 가. 알아? 어디 상사가 말하는데 하나하나 토를 달고 자빠졌어. 너희 부모가 널 그렇게 가르쳤냐?”

헉, 등 뒤에서 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도를 넘는 폭언에 경악한 임상하와 김기호가 낸 소리이리라. 서진우는 대답 대신 무표정하게 김 부장을 마주 보았다. 이딴 쓰레기 같은 말에 하나하나 반응하기에는 자신의 정신력이 아까웠다. 일말의 동요도 보이지 않는 서진우를 확인한 김 부장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아마도 지난번처럼 맞불을 놓고 고함을 지르기를 기대했을까. 혹은 과거처럼 주눅 들어 죄송하다고 하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던 걸까.

어느 쪽이든 기대에 부응해 줄 마음은 일절 없었다.

“……씨, 젊은것들이 단체로 싸가지 없게.”

원하는 반응을 얻어내지 못한 김 부장이 어깨를 들썩이며 욕설을 뇌까렸다. 서진우의 냉담한 반응에 잃었던 정신이 조금 되돌아온 모양이었다.

“하여튼 광고 재제작은 없으니 그렇게 알아!”

홱, 서진우의 어깨를 치며 몸을 돌린 김 부장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서진우가 균형을 잃고 휘청이는 사이, 김 부장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쿵쾅거리며 회의실을 나서 버렸다. 부장님, 부장님 하며 조 과장이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이윽고 쿵!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서 대리님, 괜찮아요? 아니, 대리님이 뭘 했다고…….”

재빨리 서진우에게로 다가와 그를 부축한 여수정이 분기탱천한 얼굴로 뒷문을 쏘아보았다. 서진우는 어깨를 매만지며 어색하게 웃었다.

“전 괜찮습니다. 그냥 유치한 분풀이일 뿐이었는데요, 뭐. 그나저나 수정 씨야말로 좀 괜찮아요?”

“그러게. 수정 씨 기분 괜찮아? 많이 화난 것 같았는데.”

여수정의 뒤로 다가온 강 과장이 걱정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여수정은 제 어깨를 다독이는 강 과장을 돌아보며 겸연쩍게 미소지었다.

“아, 네……. 덕분에 괜찮아요. 오히려 죄송하죠. 제가 갑자기 울컥하는 바람에…….”

“무슨 소리예요! 수정 언니가 저희 대신 할 말 해 주신 거잖아요.”

임상하가 열성적으로 대답했다. 강 과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만약에 이번 일로 문제 생기면 내가 책임질게. 괜한 죄책감 갖지 마.”

“……감사합니다.”

여수정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잠시 뭐라 말할 수 없는 정적이 회의실을 채웠다. 유대감 혹은 막막함, 정반대의 감정이 팀원들 사이를 맴돌았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실 건데요?”

하성민의 심드렁한 목소리가 안정감과 불안함의 균형을 깼다. 서진우는 생경한 눈으로 하성민을 돌아보았다. 그는 어느새 몇 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겉으로나마 생글생글 웃으며 주변인의 눈치를 살피던 사교적인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조금 지루해 보이기까지 하는 표정으로 핸드폰 액정에 시선을 고정한 상태였다.

“……원래 결정했던 시안을 복원할 수 있는 방법이 정말 없을까요?”

김기호가 불안해 보이는 표정으로 물었다. 강 과장이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단 담당자한테 연락해서 원안을 어디까지 제작했는지 확인해 보자. 최대한 빠르게 완성해달라고 해 보자고. 예산은 걱정하지 말고. 내가 컨펌 어떻게든 받아올 테니까.”

“하지만…….”

“일단 저 광고가 방송 못 타게 막아야지. 안 그래?”

임상하의 우려 섞인 얼굴을 확인한 강 과장이 씩 웃었다. 서진우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엉망진창인 광고가 그간의 노력을 망치도록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강 과장이 짝, 손뼉을 쳐서 일동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다들 정신 바짝 차리자고. 울적해할 시간 같은 거 없어. 알지?”

강 과장의 말이 일종의 구호가 됐다. 정신을 차린 팀원들이 일사불란하게 회의실을 정리했다. 보고 자료와 서류를 각자 손에 챙긴 이들이 앞으로 진행해야 할 일을 구두로 빠르게 나누며 삼삼오오 사무실로 향했다. 서진우도 제 몫의 자료를 챙겨 회의실을 나가려다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하성민은 여전히 회의실 창가에 몸을 기댄 채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그는 팀이 무슨 일을 하든,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갈 예정이든 간에 조금도 궁금해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여전히 핸드폰을 두드리고 있을 뿐이었다. 대체 누구와 저렇게 메시지를 나누고 있는 걸까.

“-하 대리. 안 돌아가?”

“네? 아. 천천히 갈 테니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일 보세요.”

묘하게 건들거리는 어투가 귓가에 거슬렀다. 서진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새로운 라인을 잡든 말든 서진우와는 하등 상관이 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저 정도로 태도가 바뀌는 건 조금…… 이상했다.

서늘한 의심이 등골을 내달렸다. 서진우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아까는 부장님한테 왜 그런 거야?”

하성민이 눈을 들어 올렸다. 묘하게 웃는 듯, 아닌 듯한 얼굴이 서진우를 마주했다. 서진우가 불편해질 정도로, 입을 다문 채 서진우의 눈을 빤히 보기만 하던 하성민이 불쑥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눈길을 안 주니까 관심이 다시 생겨요?”

“그게 무슨 소리야?”

서진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기분이 불쾌해졌다. 하성민이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눈을 내렸다.

“그냥 우스워서요. 서 대리님, 앞으로 저 같은 건 없는 사람 취급한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빈정거리지 마.”

서진우가 굳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하성민의 말투가 손톱으로 목덜미를 까득까득 긁어대는 것처럼 소름 끼쳤다. 익숙한 역겨움이 스멀스멀 뱃속에 피어올랐다. 이래서 하성민과는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서진우는 이를 악물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야? 김 부장이라면 껌벅 죽던 네가.”

“하하, 선배도 참. 무슨 생각이긴요. 아무리 김 부장님 말이라면 껌벅 죽는 저라도, 저 광고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서 말 좀 얹은 게 다예요. 프로젝트가 망하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요?”

하성민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양 웃음을 터뜨렸다. 언뜻 들으면 소탈하기까지 한 웃음소리였다. 하지만 서진우는 웃을 수 없었다. 그래, 물론 내용만 보면 맞는 이야기다. 온에어 되면 프로젝트가 망할 것이 불 보듯 뻔한 광고였다. 하지만 정말 하성민이 그런 걸 걱정해서 김 부장에게 대들었다고?

‘나를 엿 먹이기 위해 업무 데이터도 서슴없이 삭제했던 네가?’

“안 가세요? 다들 기다릴 텐데.”

하성민이 서진우를 흘긋 곁눈질하며 말했다. 서진우는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깨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조금 더 하성민의 속내를 캐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의 하성민은 절대 진심을 내보이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서진우가 하성민과 더는 단둘이 있고 싶지 않았다.

‘……그래. 이상한 주장을 한 것도 아니고. 어쨌든 옳은 말을 했잖아.’

찝찝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옳은 말이라면 서진우가 지금 이렇게 취조하듯 구는 것도 이상했다. 결정을 내린 서진우가 발길을 돌렸다.

“들어가세요-.”

등 뒤에서 하성민이 가벼운 인사를 건네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진우는 대답 대신 회의실 문을 닫았다.

저벅, 저벅. 문 너머로 서진우의 발소리가 멀어져 갔다. 하성민은 잠시 서진우가 서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언제 웃었냐는 듯 그의 얼굴에는 소름 끼칠 정도로 표정이랄 것이 없었다.

“……망하면 안 되지.”

자신이 했던 말을 곱씹은 하성민이 이내 쿡, 하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시선을 내려 조금 전 공방전을 녹음한 파일을 재차 확인했다. 조 과장과 김 부장의 폭언이 적나라하게 녹음된 파일이 고스란히 황 사장의 비서, 김 실장에게 전송되는 중이었다. 하성민은 거의 전송을 마친 녹음 파일을 내려다보며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최종적으로는 내 이름을 걸고 출시할 프로젝트인데, 뭐든 만전을 기해야 하지 않겠어?”

즐거운 기대가 담긴 음률이 텅 빈 회의장을 희미하게 울렸다. 하성민은 전송 완료를 알리는 팝업 메시지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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