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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느니 퇴사하겠습니다, 이사님!-60화 (60/150)

60화

“게다가 아무리 광고주라 한들 이틀 전에 갑자기 제작을 전면 갈아엎으라는 지시를 내리는 건 비상식적인 행동입니다. 그쪽 회사에도 부담이 상당했을 텐데, 이런 불합리한 상황을 항의해 볼 생각을 한 번도 안 했다는 게 말이 됩니까?”

강 과장의 뾰족한 지적에 담당자의 표정은 급기야 울상이 되었다. 잔뜩 시무룩해진 그가 어깨를 늘어뜨린 채 중얼중얼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야……. 광고업계에선 이런 일이 드물지 않으니까요. 게다가 삼촌…… 아니, 김 부장님께서 수정으로 인해 오버되는 제작비는 전면 다 부담해 주시겠다고 하셔서…….”

……아, 그러니까 눈앞에 있는 이 유약해 보이는 담당자가 김 부장의 조카로구나.

서진우가 해탈한 표정으로 허허 웃었다. 강 과장과 여수정도 차마 어떤 말을 더 해야 할지 몰라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서진우는 턱이 빠져라 입을 벌린 임상하와 김기호, 굳은 얼굴의 강 과장과 여수정, 그리고 표정을 일그러뜨린 하성민을 지나 김 부장과 조 과장을 돌아보았다. 김 부장은 황망해 보이는 팀원들을 둘러보며 허허 웃고 있었다.

“이미 다 제작한 광고를 이제 와서 엎을 수도 없지 않겠나. 시간도 촉박하니 이대로 진행하는 것으로 하지. 거, 회의는 이쯤 마무리합시다.”

불쾌할 정도로 유들유들하게 말을 늘어놓은 김 부장이 담당자를 향해 턱짓했다. 그 뜻을 기민하게 알아차린 대행사 담당자가 재빨리 제 짐을 챙겼다.

“저어, 그럼 저는 이만……. 연락 주십시오.”

멍한 낯빛의 팀원들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인 담당자가 도망치듯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서진우는 멀어지는 담당자의 발소리를 들으며 맥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슬슬 마무리된 것 같으니 우리도 이만 가지.”

“네, 부장님.”

침울해진 분위기를 뚫고 김 부장과 조 과장이 유유히 몸을 일으켰다. 그들이 무거운 분위기를 무시하고 저들끼리 화기애애하게 걸음을 돌렸을 때였다.

“정말 미치신 겁니까?”

차가운 목소리가 침묵을 갈랐다. 막 등을 보였던 김 부장이 굳은 얼굴로 소리가 난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금 뭐라고 한 건가?”

“두 분 다 미치신 거냐고 물었습니다.”

서진우는 황급히 여수정을 돌아보았다. 안경 너머 여수정의 눈동자 속에서 푸른 불길이 격렬하게 일고 있었다. 서진우는 여수정을 막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여수정이 입을 여는 것이 더 빨랐다.

“10대에서 40대를 아우르는 여성 고객이 타깃이라고 만 번쯤은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저런 광고가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아무리 질시와 열등감에 미쳐버렸다고 해도, 어떻게 본인 뜻대로 안 된다고 이 지경으로 프로젝트를 망치실 수가 있습니까?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같은 회사 프로젝트잖아요!”

“아니, 지금 뭐라는 거야 저게.”

조 과장이 눈살을 찌푸리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나 여수정은 고작 그 정도의 기세에 눌릴 사람이 아니었다. 서진우는 여수정의 가는 목에 선명하게 핏대가 선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조윤기 과장님이야말로 스스로 떠드는 내용, 제대로 알고 말하시는 겁니까?”

“뭐, 뭐라고? 내가 떠들어? 이 미친년이……!”

조 과장의 표정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여수정이 눈을 희번덕하게 떴다.

“마케팅부 과장이라는 분이 광고의 영향력을 모르세요? 저 광고가 한 편이라도 온에어 되면 당장 우리 프로젝트만 망하는 게 아니에요. 회사 이미지가 작살난단 말입니다! 그걸 과장이 모른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김 부장님은 기획개발부니까 모를 수 있다고 치자고요. 몰라서는 안 되겠지만! 하지만 지금 그거보다 더 말이 안 되는 게 조 과장님의 태도라는 걸 정말 모르시겠어요?”

여수정의 동공 속에서 피어오른 푸른 불꽃은 점차 그의 전신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싸늘했던 목소리에 열기와 힘이 실리고, 뻣뻣하게 굳은 몸이 떨리기 시작한 것이 그 증거였다. 서진우는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선명한 기시감이 뇌리를 스쳤다. 그것은 이미 서진우가 한 번 겪어본 미래의 한 장면이었다. 광고 내용만 조금 달랐을 뿐 여수정은 당시에도 김 부장과 조 과장에게 비슷한 항의를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너 지금 나 가르치냐?”

조 과장이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왔다. 잔뜩 약이 오른 듯 그가 검지로 삿대질을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여수정 씨야말로 노이즈 마케팅 몰라? 제품이 이도 저도 아니니까 어그로라도 끌어서 이슈 몰이 해 주겠다잖아! 너희 상품 팔아주려고 굳이 발품까지 팔아 가면서 손 보탰더니 뭐가 어쩌고 어째? 미친년이 보자 보자 하니까 아주 싸가지 하고는……. 당장 사과 안 해?!”

“못 하겠는데요!”

여수정이 빽 소리쳤다. 그가 잔뜩 악에 받친 목소리로 조 과장과 김 부장을 번갈아 노려보며 외쳤다.

“대체 일을 이 지경으로 말아먹은 인간들에게 뭐가 미안해서 사과를 해야 합니까, 제가!”

“여수정 씨.”

서진우가 황급히 여수정의 어깨를 붙들었다. 여수정이 씩씩거리며 홱 서진우를 돌아보았다.

“…….”

조금 마음을 가라앉히는 게 좋겠다고 말하려던 서진우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숨을 삼켰다. 여수정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서 대리님은 억울하지도 않아요?”

그가 감정이 복받쳐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대리님이 열심히 만든 기획안이 저 인간들 때문에 단숨에 고꾸라지게 생겼는데 어떻게 그렇게 침착할 수가 있어요?”

“……수정 씨.”

말문이 막힌 서진우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여수정의 이름을 부르는 것뿐이었다.

여수정의 말이 맞았다. 지금 그의 절망감을 가장 공감해야 할 사람은 서진우였다. 게다가 그라고 뭐 얼마나 떳떳한가. 당장 지난달에 서진우도 김 부장에게 고함을 지른 후 퇴사하겠다며 회사를 뛰쳐나가지 않았던가.

‘하지만……. 수정 씨는 안 돼.’

서진우는 눈썹을 찡그리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여수정이 사라진 미래에서와 똑같은 일을 겪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아무리 그 행동이 정당해 보인다 한들, 충동에 져서 상사를 들이받은 직원의 말로는 좋을 수가 없었다. 서진우야 그의 집까지 찾아올 백의현 이사가 있었다지만, 지금은 그도 자리를 비운 실정이었다. 게다가 여수정은 아직 직급 없는 2년 차 평사원이었다. 이는 다시 말하면 김 부장과 조 과장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밀어낼 수 있는 약체라는 뜻이었다.

‘실제로도 여수정은 거의 사내 따돌림을 당하다시피 하며 퇴사했었고.’

서진우처럼 아득바득 비굴하게 견디는 대신 자존심을 택한 여수정은 미련 없이 회사를 떠나갔다. 하지만 스스로 사직서를 냈다고 해서 그 선택이 여수정의 자의였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결과론적인 해석이었다.

여수정은 불합리한 집단에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쫓겨났다. 서진우는 그 결과를 알면서도 여수정에게 저 대신 화내 달라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비겁한 행동임을 잘 알고 있었다.

“-노이즈 마케팅에도 정도라는 게 있지 않겠습니까.”

서진우가 재차 여수정을 달래려 입을 뗐을 때, 별안간 다른 쪽에서 불쑥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서진우는 깜짝 놀라서 자신이 해야 할 일도 잊고 고개를 돌렸다. 그 말을 담은 이가 너무도 의외의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제 생각에도 이번에는 김 부장님과 조 과장님이 심하셨습니다.”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연 하성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구도 차마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김 부장과 조 과장조차도 충격으로 굳은 얼굴을 한 채, 원탁을 돌아오는 하성민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윽고 여수정과 서진우 근처까지 다가온 하성민이 조 과장을 마주하고 섰다. 여수정을 보호하듯 그들보다 몇 발자국 앞선 위치였다.

“……하 대리? 지금 뭐라고…….”

김 부장이 잔뜩 굳다 못해 희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떼었다. 아끼던 부하의 반항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하성민이 턱을 들고 김 부장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썹이 슬쩍 찌푸려졌다. 서진우는 하성민이 김 부장을 보는 시선의 의미를 명확히 알아차렸다.

경멸.

‘……이 새끼가 갑자기 왜 이러지?’

서진우는 당황해 입을 다물었다. 하성민은 결코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 책잡힐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노골적으로 남을 경멸하는 표정까지 지어 보이다니.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김 부장 라인이라 불리며 그와의 친분을 노골적으로 과시하던 하성민이었는데.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걸까? 항상 김 부장에게 착하고 순종적인 부하로 보이려고 애를 썼던 과거의 하성민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 같았다.

‘내가 모르는 데서 싸우기라도 한 건가?’

어쩌면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회사에 또 무슨 사고가 터졌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며 서진우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주변인의 반응은 서진우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 하지 않았다. 강 과장은 토끼처럼 눈을 둥글게 뜨고 있었고, 임상하는 아예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상태였다. 심지어는 여수정조차 입을 벌린 채 눈앞의 하성민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물론 개중에서도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은 김 부장과 조 과장이었다. 부하의 배신에 희게 질린 김 부장과 대조적으로, 조 과장의 얼굴은 지나친 분노로 인해 검은색으로 물든 상태였다.

“네, 네, 네가 어떻게 우리한테…….”

“조 과장님, 편 가르기를 하자는 게 아닙니다.”

하성민이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며 조 과장의 말을 잘랐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게 어떻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최근 사회적으로 젠더 갈등이 심각한 수준인데 이런 광고를 낸다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습니다. 촌스럽다 못해 시대착오적이라고 해야 이해하실까요? 아니 무슨, 90년대에 제작된 광고도 아니고……. 차라리 진짜 그 시절을 표방한 거라면 레트로하거나 빈티지한 감각이라도 내세워야 할 텐데 그런 느낌도 전혀 없고.”

언뜻 공손해 보이는 태도와 달리 말에 담긴 내용이 가차없었다. 김 부장과 조 과장은 폭격기처럼 날아드는 비판에 얼이 빠진 표정이었다. 그들을 둘러보며 하성민이 하아, 하고 긴 한숨을 토해 냈다. 한심해하는 기색이 노골적으로 담긴 숨소리에 조 과장이 다시 울컥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그가 대거리를 놓기 전, 하성민이 재차 말을 이었다.

“여수정 씨가 조금 말을 무례하게 한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런 광고를 세상에 내놓을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프로젝트 진행 방향이 마음에 안 드신대도 회사 이미지를 생각하셔야죠. 만일 이 광고가 온에어 돼서 회사 이름에 먹칠이라도 한다면 어떻게 책임지려고 그러세요? 김 부장님과 조 과장님이 중간에 시안을 바꿔서 이렇게 되었다는 걸 아시게 돼도 사장님이 그냥 넘어가 주실까요?”

‘사장님’. 그 단어에 김 부장과 조 과장의 얼굴이 단숨에 뻣뻣하게 얼어붙었다. 서진우는 하성민을 돌아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하성민은 제 눈앞의 상사를 차갑게 식은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찮은 벌레를 대하듯 깔보는 눈빛. 바로 며칠 전까지 갖추고 있던 존중과 예의는 처음부터 없었다는 양 싸늘한 표정.

그리고 서진우는 저 표정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자신이 마주해 본 적 있는 얼굴이었으니까.

‘하성민……. 김 부장 라인을 버리기로 작정했구나.’

항상 누울 자리를 귀신같이 살피며 제 몸 사리는 데에 열중하는 하성민이 이 정도로 뻗대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아마도 김 부장과 조 과장이 더는 필요 없다고 판단한 것이 아닐까.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하성민이 김 부장 눈치를 보지 않기로 결정한 것만은 확실했다.

‘하지만 하성민의 선택지가 많지 않을 텐데.’

서진우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간편하게 대강 라인이라는 단어로 뭉뚱그려 부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회사에 존재하는 파벌이 아주 다양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김 부장처럼 제 라인을 내세우는 파벌은 하나밖에 없었다. ‘황치택 사장’을 따르는 사장 파. 사실상 김 부장이 제왕으로 군림하는 기획개발부는 부장의 눈 밖에 나면 승진은커녕 회사에서 자리 유지도 어려운 것이 현실이었다. 그런데 하성민은 대체 뭘 믿고…….

‘……설마.’

한 가지 깨달음이 뇌리를 스쳤다. 서진우는 속으로 탄식하며 하성민을 곁눈질로 살폈다. 하성민의 표정에는 의기양양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저 당당한 태도를 보아하니 확신이 들었다.

하성민은 중간 단계를 뛰어넘고 직접 사장 라인을 잡을 생각인 것이 분명했다.

-아니면 이미 잡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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