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영 불안해요? 시안은 어떻게든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결정했잖아요.”
서진우의 걱정 어린 시선을 받은 여수정이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긴 한데……. 선정된 광고사가 김 부장님 조카 다니는 회사다 보니.”
“아…… 그랬죠, 참.”
잊고 싶었던 사실을 상기한 서진우가 맥없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광고사는 서진우와 그들의 팀이 유일하게 의견을 통과시키지 못한 선택지였다. 서진우와 강 과장, 여수정은 없는 시간을 쪼개서 포트폴리오가 뛰어나고 그들의 기획을 잘 반영할 수 있을 법한 좋은 후보를 몇 군데 추려 비장하게 광고사 선정 미팅에 참여했다. 하지만 기존 임원들의 지지를 등에 업은 김 부장이 단가로 찍어 누르는 데에는 이길 도리가 없었다.
‘김 부장……. 저번 일로 큰코다치고 이쪽에는 관심 끊은 줄 알았는데.’
서진우는 자신이 김 부장을 너무 안일하게 판단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하지만 서진우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사내에서 하성민의 평가가 곤두박질치며, 자연히 김 부장에게도 안 좋은 소문이 돌았다. 그야 서진우가 그토록 크게 소리치며 불합리가 어쩌고저쩌고 떠들었으니, 안 그래도 쌓였던 불만 위에 본격적으로 살이 붙기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김 부장은 한동안 그답지 않게 몸을 사리고 다녔다. 강 과장의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생산을 시작하고, 마케팅 콘셉트를 수립하는 두 주간 회의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제품이 본격적인 출시를 앞두니 역시나 김 부장의 인내심에도 슬슬 한계가 온 모양이었다. 감히 제 밑에 있는 이들이 자신의 의견을 완전히 무시하고 프로젝트를 착착 진행하는 것이 어지간히도 맘에 들지 않았던 그는, 기어코 몇 주 전 날치기로 광고사 수주를 따내는 데에 성공했다. 단가를 거의 절반 가까이 후려쳤다는 이유로 제 조카가 다니는 소규모 광고사를 적극적으로 밀어붙인 것이다.
물론 소규모 회사가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팀원들이 조사해 온 광고사 중에도 작은 인력으로 꾸려나가는 신규 마케팅 회사들이 몇 있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조카가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단가를 절반이나 깎을 수 있는 회사가 정상적인 업무 수행을 할 수 있느냐는 점이었다.
“……그, 그래도 우리 긍정적으로 생각합시다. 괴상한 콘셉트는 모두 반려시켰잖아요.”
최종적으로 결정되었던 그저 그런 시안을 떠올리며 괴로워하고 있던 서진우가 힘겹게 행복 회로를 돌렸다. 여수정이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초기 콘셉트는 진짜 다시 생각해도…….”
여수정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서진우는 ‘그래도 그 시안이 실제로 상영되지 않은 것이 천운이다’라는 말을 애써 삼켰다. 죽기 전 서진우는 그 망할 초기 시안이 실제로 TV에 송출되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봤어야 했기에,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아니, 다시 생각해도 진짜 미치지 않고서야 그딴 게 통과된 게 말이 안 됐어. 10대~40대 여성 대상 광고인데 비키니 입은 여자가 남자에게 대시하는 내용을 만들어?’
서진우는 광고사 프레젠테이션을 보고 경악에 차 입을 쩍 벌렸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눈썹을 찌푸렸다. 사회적 논란을 걱정하기 이전에 지나치게 촌스러운 광고였다. 이런 게 대중에게 노출되면 제품은 물론 회사가 시대착오적인 집단이라며 조롱을 당할 것이 뻔한 수준이었다. 물론 경악하는 팀원들과는 달리 김 부장은 손뼉까지 쳐 가며 대행사를 입이 마르게 칭찬해 댔지만.
‘퇴사를 걸고 대차게 회의를 엎어 버린 수정 씨 심정이 충분히 이해 가는 광고였지.’
물론 그 광고사가 지금 선정된 광고사와 동일한 곳임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서진우는 광고사 후보군에 해당 광고사가 포함되었다는 걸 안 순간부터 팀 내 여자 직원들에게 미리 언질을 주었다. 굳이 자신이 죽었다 살아 돌아왔다고 구구절절 설명을 할 필요조차 없었다. 이미 김 부장의 성향을 알고 있는 강 과장과 여수정은 서진우가 우려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알아차렸다. 심지어는 사내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는 편인 임상하조차도 그들이 무엇을 막으려 하는지 어렴풋이 이해하는 눈치였다.
강 과장과 여수정, 서진우는 사생결단을 할 각오로 모든 광고 미팅에 참석해 김 부장의 발언을 저지하고 반대하는 데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다행히 최종적으로 비교적 멀쩡한 내용의 시안이 결정되었고, 이제 팀은 사흘 뒤에 나올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김 부장이 가만히 있을 거라 생각하세요?”
여수정이 심란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서진우는 곧장 대답하는 대신 침울하게 제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여수정이 걱정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김 부장은 자신의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불쾌해했다. 그럼에도 그가 제 뜻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하고 팀에게 결정권을 넘긴 것은 백의현의 도움 덕분이었다. 백의현이 무조건 강 과장의 의견을 최우선으로 따르라고 지시해준 덕에, 김 부장은 팀원들에게 직접적인 해코지를 하지 못한 채 프로젝트가 순탄하게 흘러가는 모습을 질시 어린 눈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백의현이 해외로 장기 출장을 나간다는 것은 프로젝트팀이 든든한 방패를 잃어버린다는 뜻과 진배없었다.
“……뭐, 설마 무슨 짓이야 하겠어요. 이미 시안은 모두 나왔고, 스토리보드대로 제작한 광고를 보기만 하는 건데.”
머릿속에 떠오른 일말의 불길함을 애써 뇌리 한구석으로 밀어 넣은 서진우가 애써 웃으며 여수정을 달랬다.
“……그렇겠죠? 서 대리님 말이 맞아요. 제가 피곤해서 너무 불안해했나 봐요.”
서진우의 말에 여수정도 그를 따라 하하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서진우와 여수정은 서로를 마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등 뒤로 지나가던 임상하가 역시 둘이 사귀는 게 아니냐며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 서진우는 제 자리로 돌아가는 여수정을 일별한 후 다시 컴퓨터 앞에 자리 잡고 앉아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그래, 아무리 김 부장이라도 상식 바깥의 짓을 하지는 못하겠지.
설마 별일이야 있겠어?
***
굳이 변명을 덧붙이자면 그 당시 서진우는 잦은 잔업과 야근으로 쌓인 피로 탓에 퍽 지친 상태였다. 자연히 판단력은 현저히 저하되었고, 날카로운 주의력 또한 그만큼 무디어졌다.
하지만 서진우는 생각했어야 했다. 백의현이 장기 출장을 간다는 사실을 자신만 알 리 없다는 것을. 김 부장도 당연히 알았을 터였다. 자신의 최대 적군이 한동안 자리를 비울 예정이라는 것을.
모든 역사가 증명해 왔듯, 뜻하지 않게 짓눌려 있는 폭군은 사소한 기회라도 주어진다면 언제든 폭주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서진우는 김 부장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항상 그를 경계했어야 했다. 상식 바깥의 일을 할 리 없다고? 애초에 김 부장이 상식적인 인간이었다면 평소 행실이 그따위일 리 없었다.
그래, 고백하겠다. 방심한 것은 명백한 서진우의 실책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광고 내용을 프로젝트 팀원들 몰래 갈아엎는 게 말이 되나?
“지금 보여드린 영상이 각각 1분, 30초, 15초, 7초 버전 캠페인 광고입니다.”
대행사 담당자가 손수건으로 연신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말했다. 그 말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서진우는 입을 쩍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얼어붙은 상태였다. 물론 다른 팀원들이라고 상태가 크게 다르진 않았다. 담당자가 모두의 경악한 표정을 돌아보다 난처한 듯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 이건……. 최종 시안과 전혀 다른 내용이잖습니까.”
리더답게 간신히 먼저 이성을 잡은 강 과장이 목구멍이 틀어막힌 사람처럼 괴상한 목소리로 항변했다. 곁에 앉아 있던 임상하가 드물게 화가 난 표정으로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는 전혀 모르는 내용인데요! 너무 이상합니다!”
“남자인 제가 보기에도 이건 좀…… 애초에 계약 사항과 다른 것도 문제지만, 메시지도 영 잘못된 것 같습니다.”
조금 전부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던 김기호가 항의에 힘을 더했다. 격렬한 반응에 담당자가 난처해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하, 하지만 이건…… 사흘 전에 변경하신 시안대로 제작한 광고입니다. 갑자기 내용이 완전히 바뀌어서 저희도 이틀간 밤을 새워서 만들었는걸요.”
떨리는 음성에 억울함이 가득했다. 담당자의 눈 밑이 검게 푹 꺼진 것을 보아하니 확실히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서진우가 황당함에 허,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누구에게 그런 지시를 받으셨습니까?”
“……그건…….”
담당자가 눈을 대굴대굴 굴렸다. 서진우는 팔짱을 끼고 담당자를 쏘아보았다. 이윽고 눈치를 보던 담당자의 시선이 팀원들을 지나 뒷자리로 향했다. 앞자리에 둘러앉아 있던 팀원들이 일제히 등 뒤로 고개를 돌렸다.
“……저기 계신 조 과장님께서 친히…….”
담당자의 목소리가 쭈굴쭈굴 작아졌다. 서진우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덮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눌렀다. 회의실 뒷자리에서 나란히 좌석을 지키고 앉아 있던 조 과장과 김 부장이 경악한 팀원들의 시선을 받으며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음, 다들 반응이 왜 이런지 모르겠네. 내가 보기에는 훨씬 나은데 말이야. 역시나 바꾸길 잘 했군, 조 과장.”
김 부장이 흐뭇하게 허허 웃으며 보란 듯이 조 과장을 치하했다. 조 과장이 옆에서 샐쭉 웃었다.
“과찬이십니다, 부장님. 부장님의 아이디어가 좋으신 거죠.”
허. 서진우는 기가 막혀 헛숨을 토했다. 아이디어? 저딴 건 아이디어라고 부르는 것도 아까웠다. 서진우는 아첨을 떠느라 실무자의 눈치는 볼 생각도 않는 조 과장을 싸늘한 눈으로 쏘아보았다. 아무리 권력에 빌붙어 연명하다시피 하는 회사 생활이라지만, 원 기획보다 지금의 광고가 낫다고 진심으로 생각한다면 조 과장은 당장 과장직을 내려놓아야 했다. 아니면 소속 부서를 옮기거나.
‘최소한의 자존심도 없는 새끼.’
서진우는 속으로 거친 욕설을 토해내며 이를 악물었다. 아니, 명색이 마케팅부 과장이라는 인간이 어떻게 저딴 결과물을 보며 ‘아이디어가 좋다’ 따위의 말을 입에 담을 수 있단 말인가?
조금 전 광고의 내용은 이러했다. 한 남자가 편의점에 들어가서 상품을 집어 든다. 그 순간 헐벗은 차림을 한 각국의 외국인 여성들이 편의점 안으로 들어와 남자를 둘러싼다. 개별 재료를 뜻하는 여성들은 남자에게 몸을 치대며 야릇한 표정을 짓고, 몇 초간 황홀경에 빠진 듯하던 남자는 ‘끝내준다’라고 중얼거린다. 이윽고 카피라이트 문구가 나오면서 상품이 클로즈업된다.
‘엉망진창이잖아.’
아득, 어찌나 턱에 힘을 세게 주었는지 이가 갈릴 지경이었다. 지적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닌 것이 문제였다. 애초에 타깃 소비자층과 전혀 맞지 않는 주인공도 문제였지만 저 괴상한 포르노틱 연출은 또 무어란 말인가. 비건, 그린, 저당이라는 콘셉트는 하나도 살리지 못한 것은 물론이요, 불필요한 선정성에 눈살이 다 찌푸려질 지경이었다. 대체 이 광고 시안을 제작한 사람은 제품 기획서를 읽어보기는 한 걸까 하는 의문까지 일었다.
“담당자님께서는 내용이 이렇게 바뀌었는데도 반박하거나 다시 확인할 생각을 전혀, 조금도 못 하신 겁니까?”
비슷한 생각을 한 듯 질문을 던지는 강 과장의 목소리가 싸늘했다. 담당자가 손에 든 발표 자료를 끌어안으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야…… 저희는 까라면 까야 하니까요.”
그가 머뭇머뭇거리며 중얼거렸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불안해 보이는 눈동자가 연신 뒷좌석을 향했다.
“게다가 저기 계신 김 부장님께서 손수 찾아오셔서…… 꼭 바뀐 시안으로 진행하라고 하시기도 했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건 우리 팀입니다!”
여수정이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탕, 손바닥이 탁상을 내리치며 난 커다란 소리에 놀란 담당자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여자를 상대로 지나치게 겁을 먹었다는 사실이 창피했는지 그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항변했다.
“저, 저희야 모르죠. 내부 직원도 아닌데!”
“그렇게 생각하면 더 이해가 안 됩니다. 모르시면 더더욱 확인하셨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다른 건 모르더라도 여기 서 있는 이 여수정 씨가 광고 담당자라는 것은 아셨을 텐데요.”
차가운 얼굴을 한 강 과장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담당자가 냉정한 분위기를 이기지 못하고 다시 움츠러들었다.
“……그건,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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