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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느니 퇴사하겠습니다, 이사님!-58화 (58/150)
  • 58화

    허공을 쏘아보며 중얼거린 황 사장이 곧 등 뒤에 선 비서를 향해 턱짓했다. 그림자처럼 가만히 서 있던 비서가 성큼 하성민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황 사장이 하성민을 가는 눈으로 가늠하듯 훑었다.

    “지금은 바빠서 길게 이야기할 수 없으니, 추후 새로 시간을 잡아 봅시다. 여기 김 실장이 조율할 거요.”

    “네, 감사합니다.”

    하성민은 이번에야말로 물러날 때라는 것을 깨닫고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황 사장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성민은 김 실장이라 불린 비서 하나만을 남기고 나머지 인원을 대동한 채 정문 안쪽으로 사라지는 황 사장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짜릿한 쾌감이 전신을 내달렸다.

    “기획개발부 하성민 대리.”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려 오지 않았더라면 하성민은 길 한복판에서 추태도 모르고 춤판을 벌였을지도 몰랐다. 하성민은 간신히 이성을 부여잡고 고개를 돌렸다. 황 사장의 비서가 명함을 내밀며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제가 지금 드리는 연락처는 어디에도 유출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오늘 한 이야기와 들은 이야기 모두, 외부에서 들려 오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검은 시선이 그의 상사만큼이나 서늘하고 딱딱했다. 하성민은 명함을 받아들며 엉거주춤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좋습니다. 곧 연락드리겠습니다.”

    꾸벅, 몸에 밴 자세인 듯 정중하게 허리를 굽힌 비서가 곧 걸음을 돌려 성큼성큼 멀어졌다. 하성민은 희미해지는 구둣발 소리를 들으며 손에 쥔 명함을 내려다보았다. 검은색 바탕에는 비서의 이름과 이메일,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 하성민은 이메일 주소 도메인을 통해 이 명함이 공식 비즈니스용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네.”

    잠시 멍하니 조금 전 일어난 일을 곱씹던 하성민이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코웃음으로 시작했던 웃음은 점차 어깨로, 가슴으로, 다리로 번져 나갔다.

    “하하, 하하하!”

    급기야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린 하성민이 어깨를 떨며 몸을 벽에 기대었다. 기쁨과 흥분으로 인해 전신을 주체하기가 어려웠다. 간신히 웃음을 멈춘 하성민이 형형한 눈으로 그림자 어린 허공을 쏘아보았다.

    ‘서진우, 네가 나를 무시할 수 있는 시간도 이젠 끝이야.’

    하성민은 속으로 서진우를 조롱하며 미리 예견된 승리를 자축했다. 붙들고 있는 동아줄이 남이 쥔 것보다 하찮고 보잘것없다면, 더 튼튼하고 화려한 줄로 갈아타면 그만이었다.

    ***

    한여름에 시작되었던 프로젝트도 어느새 개발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서진우와 임상하는 그 사이 온라인 테스터를 선정해서 시식 이벤트를 진행했고, 강 과장과 김기호는 본격적인 생산에 주력했으며, 여수정과 하성민은 마케팅부와 공조하여 매일같이 광고 콘셉트 회의에 참여했다.

    “대리님, 소비자 분석 자료 어디 두셨어요?”

    “1013 소비자로 검색해 보고 안 나오면 말씀하세요. 메일로 보낼게요!”

    “김 주임, 생산공정팀 연락해서 하루 최대 생산 가능 물량 확인해.”

    “지금 하겠습니다!”

    “완성된 광고는 언제까지 나온댔지?”

    “다음 주 목요일에 시연 프레젠테이션 일정 잡혔습니다!”

    그야말로 눈이 팽팽 돌 정도로 바쁜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서진우는 눈으로 데이터를 분석하고 한 손으로는 타자를 두드리며 다른 손으로는 서류를 뒤적이는 멀티태스킹을 반복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반차라도 쓰길 정말 다행이다.’

    아무리 계산해도 당분간은 쉴 수 있는 날이 있기는커녕 주말 양일을 모두 반납해가며 일해야 할 판이었다. 서진우는 소임을 다한 자료를 옆 데스크에 내던지며 사무실을 빠르게 훑었다. 바쁜 건 서진우뿐만이 아니었다. 임상하는 쉴 새 없이 걸려 오는 전화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고, 김기호는 손에 온갖 샘플과 서류가 든 상자를 들고 뛰어다니고 있었다. 강 과장은 서진우보다 더 어지럽게 널린 책상 앞에 앉아 있었고, 여수정은 30여 분 전 마케팅부에 불려 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모두 당장 힘들다는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심지어는 하성민도 그러했다.

    ‘의외네.’

    서진우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쉴 새 없이 타자를 두드려대는 하성민을 곁눈질했다.

    인사부에 불려갔던 날 이래, 하성민에게는 모든 기대를 버렸다. 그래서 프로젝트에서도 큰 역할을 기대하지 않았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일하는 건 기대도 하지 않으니 방해 말고 가만히 있어 주면 고맙다고 절이라도 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하성민은 의외로울 정도로 잠잠했다. 강 과장이 서진우와의 거리를 떨어트려 놓기 위해 하성민에게 자리 이동을 명령한 날에도, 그는 별다른 항의 없이 묵묵히 자리를 옮겼다. 게다가 그냥 얌전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하성민은 다른 팀원들처럼 꼬박꼬박 야근과 주말 출근까지 해내는 데다, 보고서 마감 기한까지 깍듯하게 지켰다. 심지어는 지금도 저토록 열심히 업무에 몰두하고 있지 않은가.

    서진우는 슬쩍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데이터를 모두 날려 버렸던 날, 하성민의 속내를 모두 들여다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진심으로 서진우의 이름을 건 프로젝트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사람 같았다. 그런데 왜 지금은 저렇게 가만히 있는 걸까?

    ‘쫓겨나는 게 그렇게 싫은가.’

    답지 않게 잔뜩 주눅이 들어 지내면서도, 하성민은 스스로 팀을 나가겠다거나 옮기겠다는 말 따위는 조금도 꺼내지 않았다. 서진우는 모니터를 노려보며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자신이 너무 싫어서 곁에 있는 것조차 꺼리지 않을까 생각했건만, 커리어가 무너지는 것보다는 치가 떨리게 싫은 사람을 참는 게 낫다는 걸까.

    “그럴 거면 애초에 그딴 짓은 왜 하느냔 말이야…….”

    “또 뭐가 심란해요?”

    불쑥, 귓가에서 들려 온 말에 서진우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느새 돌아온 것인지, 두 팔에 한껏 서류철을 끌어안은 여수정이 등 뒤에 서 있었다.

    “아, 수정 씨. 잘 다녀왔어요?”

    “또 하 대리님 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있어요?”

    여수정이 흘긋 하성민을 곁눈질하며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서진우도 남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추어 대답했다.

    “그냥, 요즘 유독 일을 열심히 한다 싶어서요.”

    “흠……. 하긴, 진짜 열정적으로 뛰긴 하더라고요.”

    여수정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최근 하성민과 함께 광고 마케팅 업무를 담당 중이었다. 바로 곁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지금 저 태도가 거짓일 확률은 낮았다. 서진우가 모니터 너머로 하성민을 바라보는 사이,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입을 다물었던 여수정이 이윽고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개과천선이라도 한 거 아닐까요?”

    퍽 망설임이 묻어나는 질문이었다. 서진우는 미소를 지으며 여수정을 올려다보았다.

    “글쎄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아니, 그럴 리가.

    서진우가 아는 한 하성민 같은 부류는 절대 개과천선하지 않았다. 분명 무언가 다른 꿍꿍이를 품고 기회만 엿보는 중인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당장 이렇다 할 증거가 없는 데다, 괜히 타 부서 사람인 여수정에게 미주알고주알 험담을 늘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뭐, 열심히 하면 어쨌든 팀에는 좋은 일일 테니까.’

    괜스레 혓바닥을 놀리느니 침묵하고 지켜보는 것이 현명했다. 서진우는 하성민을 관찰하는 것을 멈추고 여수정에게로 완전히 상체를 돌렸다.

    “서류 주러 오신 거죠?”

    “네? 아, 네. 이거예요.”

    뒤늦게 본 목적을 상기한 여수정이 산더미처럼 끌어안고 있는 서류 중 가장 안쪽에 올려 두었던 종이 뭉치를 끄집어내 서진우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서진우는 서류를 받아 들고 휙휙 넘겼다. 끝까지 정상적으로 인쇄되어 있는지 확인한 후 맨 앞장으로 돌아온 그는 우측 상단에 찍힌 백의현의 인장을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백 이사님 이번 주에 출장 가신다던데.”

    서진우의 시선이 닿은 곳을 확인한 여수정이 툭 입을 열었다. 서진우가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시드니로 가신다더라고요.”

    “엇, 어떻게 아세요? 방금 마케팅부에서 들은 따끈따끈한 소식인데.”

    서진우의 무던한 답변에 여수정이 의아해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서진우는 대답 대신 다시금 겸연쩍은 웃음을 입가에 걸친 채 눈을 돌렸다. 그야 알 수밖에 없다. 전일 백의현에게 직접 들었으니까.

    [-조만간 출장을 갑니다.]

    며칠 전 저녁, 퇴근 후 막 저녁 준비를 마쳤을 때 불쑥 메시지가 왔다. 메시지 위로는 몇 시간 전 나누었던 사담 섞인 업무 이야기가 보였다. 맥락 없는 보고에 가까운 메시지에 서진우는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그러시구나…… 어디로 가시는데요?]

    [-시드니로, 한 2주 정도 다녀올 예정입니다.]

    [-마무리할 계약이 있어서요.]

    꽤 기네. 서진우는 물잔을 홀짝이며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갑작스러운 연락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뭐라고 답변을 보낼까 망설이며 엄지로 화면을 톡톡 두드리고 있던 찰나였다. 짧은 진동음이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음을 알렸다.

    [-주말에 한번 더 놀러 가자고 하고 싶었는데 당분간은 어렵겠네요.]

    [-(우는 캐릭터 이모티콘)]

    답지 않게 귀여운 강아지가 울고 있는 이모티콘이 화면을 채웠다. 서진우는 반사적으로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20대 때 곧장 미국으로 떠난 탓에 동년배인 친구가 몇 없습니다.’

    그렇게 고백했던 백의현은 대학 강의를 진행했던 날 이후 종종 이렇게 서진우에게 친근한 사담을 건네 오고는 했다. 아마 이번 메시지도 친구에게 보내는 가벼운 안부 인사 정도였던 모양이었다.

    ‘아쉬워해야 맞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서진우는 가볍게 시무룩한 기본 이모티콘을 보냈다. 답변으로 보낸 표정은 다채로운 백의현의 이모티콘과는 달리 퍽 올드해 보였다. 분명 서진우가 더 어린데 이 메시지만 보면 자신이 더 아저씨처럼 보일 것 같았다. 서진우는 눈썹을 가볍게 긁적였다.

    ‘이사님은 이런 이모티콘을 돈 주고 사는 거겠지? ……직접 고르는 건가?’

    백의현이 신중하게 온라인 숍에서 이모티콘을 구매하는 장면을 상상하자 절로 웃음이 샜다. 서진우는 퍽 즐거워진 기분으로 손을 움직였다.

    [시드니에 가 계실 때도 연락드려도 될까요?]

    습관적으로 확인 버튼을 눌러 메시지를 발송한 서진우가 이내 멈칫했다. 이렇게 보내면 너무 사적인 질문으로 느껴지려나. 서진우는 사심이 덕지덕지 묻은 문장을 심란한 눈으로 내려다보다 이내 다시 엄지를 두드렸다. 어디까지나 업무 관련 연락을 드려도 되냐는 뜻이냐는 부연 설명을 덧붙이려는 찰나, 새로운 답변이 떠올랐다.

    [-물론입니다. 시차도 거의 안 나니 편히 연락하세요.]

    쾌활한 허락을 담은 메시지를 서진우는 잠시 말없이 바라보았다. 서진우의 사심을 알 리 없는 사람이라서 그런 건지 답변에 참 거침이 없었다. 이윽고 윙크를 하는 고양이 이모티콘과 함께 새로운 메시지가 돌아왔다.

    [-김 부장 욕 같은 것도 언제든 환영.]

    “-하하.”

    서진우는 결국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현실 이미지와는 달리 텍스트로 전달되는 백의현은 퍽 친근하고 귀여운 데가 있었다. 서진우는 이사가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거냐고 농담 섞인 타박을 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혼이 나서 기가 죽은 듯한 캐릭터 이모티콘이 돌아왔다. 참 나. 서진우는 입가에 미소를 그린 채 백의현에게 받은 메시지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좋아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그래도 이런 사소한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구석이 간지러워지는 건 막을 도리가 없었다. 백의현이 저를 친근하게 대해준다는 사실이 좋았다. 그의 마음이 자신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설렘으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예전 같았으면 무서워서 어쩔 줄 몰랐을 텐데, 서진우 참 많이 컸다.’

    [먼 길 무사히 잘 다녀오세요.]

    기어코 다시 한번 사심을 드러낸 인사를 보내며 서진우가 씁쓸하게 웃었다. 조금만 더 몰래 좋아하자, 물렁해진 심장을 파고드는 익숙한 욕망을 못 본 체 가슴 한구석에 숨겨 두면서.

    “큰일이에요.”

    잠시 상념에 빠져 있던 서진우가 여수정의 한숨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 뭐가요?”

    “다음 주에 광고사 프레젠테이션이 있는데, 이사님이 자리를 비우신다니…… 으, 정말 어떻게 될지.”

    여수정이 몸을 부르르 떨며 진저리를 쳤다. 그의 두 뺨이 핼쑥했다. 서진우는 뒤늦게 그가 조금 전까지 마케팅부에 붙들려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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