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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느니 퇴사하겠습니다, 이사님!-57화 (57/150)

57화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어 있던 꽁초가 반으로 부러졌다. 하성민은 주먹을 말아쥔 채 입술을 깨물었다. 제 발이나 닦을 줄 알던 호구 새끼가 감히 변절하다니, 배신감에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치밀어오르는 분노와 이유 모를 패배감에 잠식되어 있던 하성민이 이내 한숨을 쉬며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올렸다.

“하하…….”

괜찮다. 주제도 모르는 호모 새끼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성민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평정을 찾으려 노력했다. 어차피 백의현이야말로 서진우에게 오르지 못할 나무였다. 이룰 수도 없는 꿈을 꾸어 봤자 돌아오는 것은 절망뿐이다. 서진우가 백의현에게 처절하게 버림받는 상상을 하자 불쾌했던 기분이 조금 가시는 것 같았다. 하성민은 무참하게 구겨진 꽁초를 쓰레기통에 넣고 손을 털었다. 그래, 주제도 모르고 감정을 품은 대가는 언젠가 돌려받게 될 것이다.

‘만일 그런 날이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내가 오게 만들어 줘야지.’

하성민이 한쪽 입꼬리를 틀어 올려 웃었다. 비릿한 악취를 풍기는, 그와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표정이 그림자에 가리워졌다.

사옥 정문 앞이 소란스러워진 것은 하성민이 막 사무실로 복귀하려 걸음을 내디뎠을 즈음이었다.

“?”

별안간 등 뒤가 부산스러워져 계단을 오르던 하성민이 고개를 돌렸다. 대로변에 커다란 검정 세단이 서 있었다. 앞좌석에서 내린 사내가 뒷문을 열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검은 슈트 차림의 직원 몇 명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하성민은 이토록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위풍당당하게 세단에서 내리는 이의 얼굴을 한 번에 알아보았다.

‘황치택 사장.’

사원들에게 얼굴을 자주 내비치지 않는 오너 일가 중 현재 가장 실세로 알려진 이가 회사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하성민은 황급히 주변과 제 꼴을 점검했다. 조금 전 홧김에 헝클어뜨린 머리칼이 엉망일 것 같았다. 그는 다급히 손으로 대충 머리를 쓸어 정리한 후 가까이 다가오는 황 사장을 향해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지금 같은 때가 아니면 언제 사장에게 얼굴이라도 내비쳐 볼 수 있겠는가. 인사라도 해서 눈에 띌 확률을 높여 놓는 것이 중요했다. 다행히 업무 시간이라 주위에는 다른 직원이 많지 않았다. 빠르게 계산을 마친 하성민이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바닥을 보며 자신을 지나치는 이들의 구두를 살폈다. 대여섯 명의 비서에게 둘러싸인 황 사장이 하성민을 그대로 지나쳐가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하성민이 내심 실망하며 한숨을 삼켰을 때였다.

뭉툭하고 반들반들한 구둣발이 문득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윽고 구두코가 각도를 바꾸어 하성민을 향했다.

“-자네. 그, 어디서 얼굴을 본 기억이 나는데.”

걸걸하고 새된 목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하성민은 고개를 퍼뜩 들어 올렸다. 황 사장이 비서들을 멈춰 세운 채 하성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기회다. 하성민은 마른침을 삼키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아, 저는 기획개발부 대리 하성민이라고 합니다.”

“아아, 그래 그래. 기억났다. 김 부장이 아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던 그 친구로군.”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순하고도 매력적인 미소를 입가에 띤 채 바라보자, 곧 황 사장이 기억을 되살려낸 듯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하성민은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며 조심스레 울퉁불퉁하고 살이 찐 손을 맞잡았다.

“좋게 말씀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김 부장과 현재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설명은 굳이 곁들일 필요가 없었다. 하성민은 눈을 살짝 내리깐 채 조신하게 감사를 표했다. 황 사장이 만족스럽다는 듯 허허 웃었다.

“이렇게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청년을 오랜만에 만나서 말이야. 잠깐 쉬러 나왔나 보지?”

파충류처럼 툭 튀어나온 눈이 하성민을 위아래로 훑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척 웃고 있지만 명백히 탐색하는 시선이었다. 하성민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농땡이를 치는 느낌을 주어서는 안 된다. 기적 같은 기회를 얻었으니 최대한 좋은 이미지를 심어 두어야 했다.

“……아무래도 제품 개발의 여러 과정을 관리하다 보니 간혹 과부하가 올 때가 있어서요, 잠시 한숨 돌리고 이제 업무로 복귀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쑥스러운 듯 눈을 내리깐 하성민이 손에 든 서류철을 숨기듯 품 안에 끌어안았다. 황 사장이 일한 증거를 눈에 담아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한 계산된 행동이었다. 다행히 그 의도를 금방 알아채 준 황 사장이 안쓰러워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하성민을 격려했다.

“유능한 사람들이 희생하는 건 불공평한 일이지, 암. 수고해요. 힘든 일 있으면 편히 말하고. 김 실장, 이만 가지.”

하성민은 혀끝을 깨물었다. 황 사장은 하성민을 전혀 알아봐 주지 않았다. 수고하라는 격려는 사장이 어느 직원에게든 얼마든지 빈말로 건넬 수 있는 인사였다. 황 사장은 하성민이 얼마나 힘들게 일하든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그 증거로 곧장 비서를 불러 회사 안으로 들어갈 채비를 하고 있지 않은가.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조금 더 특별한 인상을 남길 수 있을까.’

하성민이 초조하게 머리를 굴리며 고개를 돌렸다. 황 사장은 어느새 정문 거의 앞까지 도달한 상태였다. 이제 저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면 하성민은 기껏 잡은 기회를 허무하게 놓치고 말 터였다. 하성민은 간절한 눈으로 곁에 선 비서와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황 사장을 응시했다.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세운 덕이었을까. 불쑥 그의 귀에 익숙한 명칭이 흘러들었다.

“-……리고 백의현 전무이사는 금일 오전 외근 후 퇴근했다고 합니다.”

“그 망할 놈의 사생아 새끼가 회사에 없단 말이지? 천박한 기생오라비 새끼가…….”

하성민은 눈을 깜박였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원색적인 욕설이 고막을 찌르는 듯했다. 설마 지금 백의현을 욕하고 있는 건가? 사생아라니, 누가? 설마 백의현이……?

짧은 욕설에 담긴 엄청난 정보가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듯했다. 하성민은 저도 모르게 충격으로 입을 벌렸다. 그때 시선을 느낀 황 사장이 하성민을 돌아보았다. 하성민은 자신이 원하던 대로 그의 눈에 띄었음을 깨달았다. 불행하게도 운이 좋지는 못한 모양이었지만.

하성민의 경악한 표정을 쏘아보는 황 사장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제 앞에 서 있던 비서를 반쯤 밀치고 천천히 다가온 황 사장이 두어 걸음가량의 간격을 남기고 멈추어 섰다. 그는 하성민보다 머리 한 개는 작은 땅딸막한 사내였다. 하지만 하성민은 황 사장이 풍기는 기이한 압박감을 느낄 수 있었다.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고 입이 말랐다. 자신이 들어서는 안 되는 것을 듣고 말았다는 자각이 뒤늦게 일었다.

“하…… 대리라고 했던가.”

“네, 네. 그렇습니다.”

황 사장의 지나칠 정도로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하성민이 황급히 자세를 고쳤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가 귓가를 요란하게 울렸다. 황 사장이 파충류 같은 눈을 한 번 깜박거리지도 않은 채 하성민을 관찰하듯 응시했다.

“혹시 무슨 이상한 말이라도 들었나? 표정이 이상한데.”

소름이 끼칠 정도로 다정한 목소리와는 달리 황 사장의 표정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하성민은 마른침을 삼켰다. ‘무슨 말이라도 들었느냐’니, 이건 정말 들었는지 아닌지를 물어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 말은 하성민에게 허락된 대답이 한 가지뿐이라는 협박이었다.

“아, 아닙니다. 하하, 갑자기 잊고 있던 중요한 일이 생각이 나서 조금 놀랐네요. 하하하…….”

하성민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내저어 보였다. 긴장을 내색하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하성민을 빤히 바라보던 황 사장이 이내 표정을 풀고 웃었다.

“그래, 그렇구만. 부디 신변에 위협이 갈 정도로 중요한 일을 잊고 있던 게 아니라면 좋겠군. 회사 생활 원만하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다시 너그러운 사장의 얼굴로 돌아온 황 사장이 두꺼운 손으로 하성민의 팔뚝을 격려하듯 두드렸다. 미친, 대답 잘못했으면 신변이 위험해질 뻔했다는 뜻 아니야 이거. 하성민은 황 사장이 건드린 부분부터 소름이 이는 것을 느끼며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성민의 뻣뻣한 미소를 잠시 관찰하던 황 사장이 이윽고 걸음을 돌렸다. 하성민은 멀어지려는 황 사장의 뒷모습을 보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상황을 무사히 벗어났다는 안도감이 찾아왔다. 자신도 모르게 손바닥을 내려다본 하성민이 소리 없이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어찌나 긴장했던지 힘껏 주먹을 말아쥐고 있던 손이 희게 질려 있었다.

‘정말 큰일 날 뻔했구나. 자칫하면 진짜 회사 생활 종칠 뻔……, ……잠깐, 아니지.’

하성민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공포감이 가시자 그제야 자신이 얻어낸 정보의 가치가 빛을 발하며 존재감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하성민은 재빨리 자신이 아는 사실을 정리했다. 백의현은 사생아다. 황 사장이 구태여 욕설까지 뱉는 걸 보면 아마도 황가의 숨겨진 사생아일 테지. 그리고 황 사장은 그런 백의현을 미워한다. 아마도 회사에서 얼굴을 맞대는 일조차 싫어할 만큼.

그렇다는 건, 잘만 하면 황 사장을 이용해 백의현을 밀어내고 꼴 보기 싫은 서진우까지 눈앞에서 없애 버릴 수 있다는 뜻 아닐까?

조금 전까지 불운하다고 생각했던 상황이 별안간 새롭고 거대한 기회로 탈바꿈했다. 하성민은 퍼뜩 눈을 돌렸다. 황 사장은 아직 충분히 멀어지지 않았다. 하성민이 한 번 더 용기를 낸다면 충분히 잡을 수 있는 거리였다.

“-사장님. 잠시만요.”

하성민이 조급한 걸음으로 황 사장에게 다가가며 외쳤다. 황 사장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명백히 귀찮아 보이는 표정을 한 그가 하성민을 위아래로 훑었다. 하성민은 재빨리 공손하게 양손을 겹쳐 쥐고 어깨를 움츠러뜨렸다.

“바쁘신 중 죄송합니다만, 조금 전 생각났던 일에 대해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뭔가? 곧 회의가 있어서 오래 들어줄 수는 없네만.”

황 사장의 음성은 언제 다정했냐는 양 무심하고 싸늘했다. 하성민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방금까지 신변의 위협을 운운하던 상대가 무섭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하성민에게는 이루어야 할 대업이 있었다.

“……사실 그게……. 아무래도 임원분이 연관된 일이다 보니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였습니다만.”

하성민은 최대한 가녀린 표정을 어필하기 위해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깨물었다. 황 사장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비딱하게 몸을 기울였다. 하성민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촉촉한 눈동자를 들어 올려 황 사장을 마주 보았다.

“사장님께서 조금 전 힘든 일이 있으면 편히 말해 달라고 말씀해 주셨던 것이 떠올라서요.”

황 사장도 지금은 하성민을 오해하기 때문에 그를 경계하는 것뿐이다. 하성민이 그와 같은 편이라는 것을 알아준다면, 지금처럼 냉담한 태도는 눈 녹듯이 사라지리라. 하성민은 속으로 비장하게 다짐하며 망설이듯 입술을 깨물었다. 너무 대놓고 이르는 듯한 느낌을 주지 않기 위해, 하지만 자신이 황 사장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어필하기 위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가?”

하성민이 쉬이 말을 잇지 못하자 황 사장이 답답한 듯 그를 재촉했다. 하성민은 그제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백의현 이사님께서, 회사 내에서 특정 인물에게 적절하지 않은 대우를 하시는 정황을 목격한 바 있습니다. 아무래도 파벌을 만들고 싶어서 그러신 거 아니냐는 이야기도 들려오고……. 제 생각에는 회사에서 이런 말이 도는 걸, 사장님은 알고 계셔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최대한 노골적인 비난처럼 느껴지지 않도록, 하지만 황 사장에게는 충분한 위협처럼 느껴질 수 있도록 적당한 단어를 고르느라 애를 썼다. 슬쩍 눈을 들어 황 사장의 표정을 확인한 하성민은 자신의 계산이 맞아떨어졌음을 직감하고 속으로 씩 웃었다.

황 사장의 눈빛은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다른 빛을 띠고 있었다. 하성민에 대한 경계와 의심 대신, 자신이 들은 이야기가 얼마나 가치 있는 정보인지를 계산하는 듯한 눈빛.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 봐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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