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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느니 퇴사하겠습니다, 이사님!-56화 (56/150)

56화

10월

29년을 살아오는 동안, 하성민은 한 번도 이런 상황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

탕비실에서 필요한 자료를 복사해서 막 나오려던 참이었다. 눈앞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왁자지껄하게 들려오던 대화가 뚝 끊겼다. 하성민은 자신을 보고 멈춰 선 두 사람을 마주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같은 기획개발부 소속 직원 두 사람이 멀뚱멀뚱한 눈으로 하성민을 보고 있었다.

“어…… 안녕.”

“어어, 그래. 그런데 하 대리, 너 여기서 뭐 하냐?”

하성민의 인사를 건성으로 받은 동료가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무례한 태도가 단숨에 비위를 거슬렀다. 하성민은 뻣뻣하게 굳어가는 뺨을 억지로 끌어당기고 선량하게 웃었다.

“인쇄 좀 할 게 있어서.”

“인쇄?”

동료가 노골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뒤에 선 채 상황을 관망하는 다른 이의 표정도 썩 좋아 보이지 못했다. 하성민은 보란 듯이 손에 든 서류철을 들어 올려 보이며 몸을 모로 비켜섰다. 거리낄 것 없다는 듯 들어오라는 몸짓에도 두 사람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기색을 거두지 않았다.

‘개 같네. 사람을 무슨 범죄자 보듯이…….’

욕설이 치밀었다. 하지만 하성민은 속마음을 드러내는 대신 무해한 모습을 어필하는 쪽을 택했다. 하성민은 자신의 얼굴이 주는 영향력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웃는 얼굴만 잘 만들어 두면 누구도 하성민의 잘못을 탓하지 않았다. 29년간 체화한 방식으로 하성민은 자신을 경계하는 이들을 설득하려 노력했다. 하성민은 나쁘지 않다. 신뢰할 수 있다.

“-정말 여기 있는 다른 프린트는 안 본 거지?”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서운하다. 내 거 프린트하는 것만으로도 바빴어.”

여전히 딱딱한 동료를 향해 하성민이 과장되게 눈썹을 휘어 보였다. 그러나 누가 들어도 농담조인 하성민의 말을 받아 주는 이는 없었다. 탕비실에 감도는 싸늘한 적막을 느끼며 하성민은 마른침을 삼켰다.

“……음, 그럼 나는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볼게. 정호 씨도 고생해요.”

“들어가세요.”

동료 뒤에 껌딱지처럼 붙어 하성민을 곁눈질하던 사원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하성민은 여유 있는 발걸음을 어필하기 위해 애쓰며 탕비실 밖으로 향했다. 불편하다 못해 숨이 막혔다. 빨리 사무실로 돌아가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문을 닫기 위해 문고리를 잡아당겼을 때.

“에이 씨, 이거 무서워서 회사에서 프린트 하겠나. 인사팀은 왜 저런 새끼한테 아무 조치도 안 한 거래?”

“서 대리님이 합의했대요. 어차피 데이터 다 살렸으니 의미 없다고.”

“에휴, 분명 김 부장 눈치 본 거겠지? 아- 더럽다, 더러워. 저딴 도둑놈 새끼도 멀쩡하게 고개 들고 회사 다닐 수 있는 세상이 치사하고 더럽다 진짜.”

“하 대리님 듣겠어요.”

말끝에 키득거리는 비웃음이 매달렸다. 하성민은 더 듣지 못하고 쾅, 문을 닫아 버렸다. 마음 같아서는 다시 들어가 화라도 내고 싶었지만, 그러다 괜히 장작에 불을 붙이는 꼴이 되는 건 사양이었다.

“…….”

왜 일이 이 지경이 되었을까.

하성민은 이를 꽉 깨물었다. 조금 전 이야기를 나누었던 동료는 나름대로 친했던 동료였다. 입사 연도에 차이는 있었지만 동갑인 그는 활달하지만 단순하고 직설적인 성격이라 잘 구슬리면 여론 조성용으로 쓰기 딱 좋은 인맥이었다. 게다가 그 옆에 붙어 서 있던 사원은 올해 막 입사한 신입으로, 내성적이지만 눈치가 빨라 자신이 발 디딜 곳과 아닌 곳을 잘 구분할 줄 아는 놈이었다.

그런 두 사람이기에 이때껏 좋은 이미지를 만들어 두려고 얼마나 피가 나는 노력을 해왔던가.

하지만 이제는 다 글렀다. 하성민이 공들여 쌓았던 탑은 파도에 쓸려간 모래성처럼 무너져 버렸다.

‘서진우와 함께 인사부에 불려갔다 온 날부터.’

손에 든 서류가 우그러졌다. 하성민은 이를 악문 채 빠른 속도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비록 징계는 받지 않았다지만 사내에서 자신을 향하는 시선이 완전히 달라졌음은 명확했다. 프로젝트 팀 내에서의 냉대야 뭐, 각오한 일이었다. 어차피 그 팀은 처음부터 서진우가 입맛대로 꾸린 이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니 하성민에 대한 감정이 좋을 거라는 기대 따위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획개발부 내에서의 평판에도 금이 가는 건 다른 문제다.

‘멱살을 왜 잡았냐고요? 저 자식, 아니, 하성민 대리가 프로젝트 데이터 파일을 폴더째로 삭제해 버렸거든요.’

만일 서진우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김 부장에게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사람임을 진작 알았더라면 하성민은 맹세코 데이터를 대놓고 삭제하는 멍청이 같은 짓은 하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하성민이 3년간 보아 온 서진우는 결코 타인에게 대놓고 항의할 수 있는 위인이 못 되었다. 물론 김 부장이 빼돌린 기획서를 임원 회의에서 발표해 버리는 짓을 저지른 적도 있다지만, 그건 일종의 자포자기였다고 하성민은 생각했다.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무는 것처럼, 사회적 죽음을 각오하고 저지른 동반 자살 퍼포먼스 같은 것이다. 당장 그 이후의 행보를 생각해 봐도, 서진우는 길길이 날뛰는 김 부장에게 퇴사하겠다며 사표를 들이밀지 않았던가.

‘게다가 내게도 그깟 기획 그냥 주겠다고 했었고.’

서진우가 만약 백의현 이사의 눈에 띄지만 않았더라면, 그는 지금쯤 진작 퇴사하고 이 회사에서 사라졌을 터였다. 그 증거로 백의현이 억지로 서진우를 들여앉혀 놓은 결과 서진우는 다시 소심해지고 주는 일 거절 못 하는 호구로 돌아오지 않았던가.

-라고 지금까지 생각해 왔는데.

어쩌면 처음부터 잘못 판단한 걸까. 하성민은 하강하는 엘리베이터 안에 홀로 서서 초조하게 주머니를 뒤적였다. 며칠 전 들었던 김 부장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아무리 그래도 데이터 삭제는 심했지. 그렇게 안 봤는데, 하 대리 자네도 너무 기분파야. 감정에 휩쓸려 회사 일을 그르치면 어떻게 하나.’

“씨발…… 쓰레기 같은 새끼.”

낯선 표정으로 하성민을 외면하며 헛기침을 하던 김 부장을 떠올리자 절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때마침 1층 로비에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아가리를 벌리고 하성민을 바깥으로 밀어 냈다. 하성민은 구겨진 담뱃갑과 라이터를 꺼내 쥐고 건물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애초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망치라고 한 게 누군데.”

사옥 외곽에 조성된 흡연 공간으로 숨어든 하성민이 씨근덕거리며 중얼거렸다. 감히 자신을 토사구팽한 김 부장에게 화가 났다. 애초에 김 부장의 지시만 아니었어도 하성민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할 일은 없었을 터였다. 솔직히 말해 하성민이라고 서진우 옆에서 잡일이나 하고 싶었겠는가. 게다가 이미 대대적으로 기획서를 훔친 놈이라는 소문이 파다한 마당이었다. 하성민이 모든 자존심을 다 내려놓고 서진우에게 고개를 숙이기로 한 것은 오로지, 순전히 김 부장의 부탁 때문이었다.

오명을 벗기 위해 서진우와 사이가 좋은 척을 하고 싶어서 안달을 냈던 과거의 자신을 까맣게 잊은 하성민이 씩씩대며 연신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김 부장이 개새끼다. 머저리 같은 돼지 새끼도 상사라고 깍듯하게 모시며 시키는 일 다 했건만, 돌아온 것이 토사구팽이라니. 하성민은 작금의 상황이 억울해서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대체 그가 무엇을 그리도 잘못했단 말인가? 하성민은 급기야 지나가는 사람의 멱살을 붙들고 호소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대로라면 출셋길이 막혀 버린다.’

하성민은 담배를 빨아들이며 냉정한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았다. 사장 라인이라는 김 부장만 믿었던 것이 패착이었을까. 진작부터 더 튼튼한 동아줄을 알아봤어야 했는데. 김 부장이 아무리 기획개발부의 왕이라지만, 백의현 이사라는 거물을 손에 쥔 서진우에 비하면 지나치게 하찮은 라인이었다. 심지어 김 부장은 이번 기회에 자신의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얼마든 하성민을 손절할 수 있다는 것까지 알려 주었다. 그러니 이 이상 김 부장의 곁에서 알랑거려 봐야 소용없었다. 더 늦기 전에 새로운 살길을 모색해야 했다.

절대 실패하면 안 된다.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

강박관념과도 같은 말이 머리를 맴돌았다. 하성민은 거의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타들어 간 담배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팔짱을 꼈다.

부모, 형제, 친지, 친구 모두가 하성민을 관찰했다. 그가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 언제 주저앉을지를 호시탐탐 지켜보았다. 그런 상황에서 하성민은 절대 볼품없이 실패할 수 없었다.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정글 같은 대기업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아야 했다.

살아남아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 보여야 했다.

다행히 하성민에게는 남들에게는 없는 뛰어난 장점이 있었다. 마음먹으면 상대가 누구든 호감을 살 수 있는 친화력.

하성민은 평생 이 능력을 활용해 살아왔다. 학창 시절에는 선생님에게 예쁨을 받고 내신 점수를 올려 좋은 대학에 갔으며, 대학에서는 선배들에게 잘 보여서 남들이 구하기 어려워하는 족보도 수월히 구해내고는 했다. 물론 회사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누구보다 빠르게 대리를 달 수 있었다. 하성민이 기억하는 한, 자신의 매력 어필이 통하지 않은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백의현 이사.’

그토록 냉담하게 자신을 평가하는 시선을 마주한 적은 처음이었다. 하성민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첫 만남부터 달갑게 인사를 받아 주는 사람은 본래 흔하지 않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자신에게 냉담한 사람을 몇 명쯤은 만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하성민은 이때껏 그들을 모두 자기 편으로 포섭해 왔다. 그러나 아무리 기회를 엿보아도 여지조차 주지 않는 이에게는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이게 다 서진우 그 새끼 때문이야.’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하성민은 이를 아득 깨물었다. 애초에 어울리지도 않게 함정을 판 서진우가 잘못했다. 몇 날 며칠을 고뇌한 결과 하성민이 내린 결론은, 서진우가 애초부터 하성민이 무슨 짓을 할지 알아차리고 고의적으로 판을 깔았다는 것이었다.

‘때리지 않은 것도 일부러 계산한 게 분명해. 나만 엿 먹이려고. 씨발…….’

하성민은 두 번째 담배를 꺼내 물며 잇새로 욕설을 뇌까렸다. 기실 냉정히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억측이었지만, 그는 자신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인정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사고 중이었다.

가장 중요한 원인을 외면하면 잘못된 결론이 도출되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성민의 사고방식으로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더 합리적으로 느껴졌다.

‘어디서 머리라도 얻어맞고 다른 사람이 된 게 아닌 이상, 그 새끼도 처음부터 연기하고 있었던 거야.’

손가락 사이로 희뿌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하성민은 시야를 흐리는 연기를 노려보며 긴 숨을 뱉어냈다. 타인에게 호감을 사는 방법을 잘 아는 사람답게, 하성민은 사람을 재고 평가할 때 오판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서진우는 하성민이 살면서 몇백 명 정도는 만나 본 평범한 호구 중 한 명이었다. 게다가 심지어는 하성민을 좋아하는 호모 새끼이기까지 했다. 하성민이 마음만 먹는다면 생사여탈을 결정할 수도 있는, 벌레만큼이나 하찮고 조종하기 쉬운 존재.

지금 하성민은 그런 존재에게 입지상으로 완전히 짓눌린 상태였다.

‘대체 뭐가 하루아침에 그 새끼를 바꿔놓은 거지? 어디서 약이라도 빨았나?’

하성민이 재를 털어 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연기라고 해도 갑자기 제 이미지를 내다 버리고 본성을 드러내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그의 야비한 머리가 비상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서진우가 변한 게 언제부터였더라. 두어 달 전쯤부터였던 것 같은데…….

“……설마.”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미친 하성민이 허탈한 웃음을 토해 냈다. 8월. 그러고 보니 서진우가 백의현과 급속도로 친해진 것도 그즈음이었던 기억이 났다. 하성민은 자신이 깨달은 사실에 어이가 없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 호모 새끼가 나를 팽하고 갈아탄 거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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