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생각할수록 귀여운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백의현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대꾸하며 노란 인형을 집어 들었다. 눈을 한쪽으로 굴린 채 수줍어하는 듯한 표정이 마음에 들었다. 그가 손바닥만 한 인형을 이리저리 돌려 보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인형까지 들고 있으니 정말 옛날로 돌아간 것 같군요.”
백의현의 음성에는 숨길 수 없는 그리움이 묻어났다. 제 몫의 인형을 가방에 넣던 서진우가 눈을 들어 올렸다. 인형을 응시하는 백의현의 표정이 퍽 애틋해 보였다. 그제야 서진우의 뇌리에 오락실에 가기 전 백의현이 스치듯 했던 말이 떠올랐다.
“형이 있으세요?”
“네? 아아.”
서진우의 질문에 시선을 돌린 백의현이 뒤늦게 질문을 이해하고 탄성을 토했다.
“사촌 형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친형제처럼 친하게 지내서 그냥 형이라고 부르곤 했죠. 큰 외숙부께서 정이 많은 분이라, 함께 가족 단위로 여행도 다니고 했었습니다.”
서진우는 차분하게 자신의 추억을 설명하는 백의현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단어 하나하나에서 애정과 희미한 그리움이 묻어났다. 서진우는 제 운동화 앞코로 시선을 돌렸다.
“부럽네요. 보통은 아무리 어릴 때 사이가 좋아도 어른이 되면 멀어지기 마련인데, 친척분들과 정말 사이가 좋으신가 봐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외숙부가 좀 특별했죠.”
백의현이 쓰게 웃었다. 사이 좋아 보이는데. 서진우는 속으로 의아해하면서도 토를 달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푹 과장된 한숨을 쉬며 말을 돌렸다.
“좋겠다. 저는 또래 형제가 없어서 형제 있는 사람들이 부럽더라고요.”
“친척 형제도 없습니까?”
“네. 외동이에요.”
“그렇군요. 동생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 장남 같은 분위기여서요.”
“제가요? 아, 하긴.”
백의현의 말에 서진우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마 집안에서 장남 취급을 받아서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겠네요. 일가친척을 통틀어서 제 항렬에서는 제가 제일 나이가 많거든요. 사촌들이 있긴 한데, 다 저보다 열 살은 넘게 어려요.”
어떤 의미로는 백의현이 제대로 본 셈이었다. 사람 보는 눈이 날카롭다니까. 서진우는 속으로 뒷말을 덧붙이며 눈을 들어 올렸다. 선명한 분홍빛으로 물든 하늘이 아름다웠다. 잠시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걷던 그가 문득 아,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럼 이사님도 외동이신가요? 다른 형제는 없으세요?”
“아, 여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은 유럽에서 유학 중이라 얼굴 못 본 지도 몇 년은 되었지만요.”
백의현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해 주었다. 여동생이라. 듣고 보니 잘 어울리는 것도 같았다. 여동생은 아마도 백의현을 닮았겠지. 정갈한 얼굴은 여자로 치환해서 떠올려 보아도 위화감이 거의 없었다. 서진우는 불쑥 치민 장난스러운 생각에 눈을 접어 씩 웃었다.
“그럼 여동생분도 황 회장님 손녀겠네요. 막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후계 싸움 같은 것도 하겠다. 그쵸?”
조금 전 낮에 자신이 황 회장의 손자라 농담을 했던 백의현에게 가벼운 장난을 걸어 본 셈이었다. 백의현이 조금 놀란 듯한 눈으로 서진우를 돌아보았다가 이내 말없이 미소 지었다. 어딘가 뜻을 이해하기 어려운, 의뭉스러워 보이는 웃음이었다.
“이제 슬슬 들어가야겠군요. 집에는 어떻게 가십니까?”
서진우의 농담을 묵비한 백의현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질문을 던졌다. 서진우도 그제야 집에 가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는 지하철 타고 가려고요. 이사님은요?”
사람도 차도 많은 시간이었다. 자연스럽게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을 머릿속으로 되짚으며 서진우가 되물었다. 백의현이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대답했다.
“주차장에 차를 대 놨습니다. 괜찮으시면 태워 드리죠.”
“네?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 지하철이 더 편해서요.”
이사의 차를 얻어 타다니, 말도 안 될 일이다. 서진우는 백의현이 타고 다니는 차가 얼마나 좋은 외제 차인지 이미 본 적이 있어 알고 있었다. 그런 비싼, 심지어는 황송하게도 백의현이 직접 운전해주는 차에 앉아 반 시간여를 함께 가는 것은 아무리 호감이 있대도 사양이었다.
서진우의 거절에 백의현이 눈썹을 아래로 휘었다.
“지하철이 더 편하다, 라…… 저와 가는 건 불편하신가 보군요. 저는 오늘 서진우 씨와 무척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저 혼자만의 착각이었나 봅니다.”
백의현의 목소리에서 서운함이 뚝뚝 흘렀다. 서진우는 더욱 당황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저도 이사님이랑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하고 오늘 너무 재미있었고! 그런데 그, 집까지 한 번에 가는 지하철 노선이 있거든요, 그래서 아무래도 지하철이 저한테는 더 편하고…… 그러니까 그, 기분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정리되지 못한 문장을 횡설수설 늘어놓던 서진우가 어깨를 늘어뜨리며 백의현의 안색을 살폈다. 백의현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서진우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역시 제 답변이 마음에 안 들었을까. ‘편하다’는 단어는 쓰지 말 걸 그랬나. 하지만 정말 지하철이 편해서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었는데. 백의현이 이토록 서운해할 정도라면 차라리 조금 불편하더라도 차를 얻어타는 게 낫지 않을까,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결정을 내린 서진우가 자신의 대답을 정정하기 위해 다시 입술을 달싹였을 때였다.
백의현이 푸,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미안합니다. 당황한 서진우 씨가 너무, 하하.”
서진우의 멍해진 표정을 확인한 백의현이 다시금 웃음을 터뜨렸다. 어안이 벙벙해진 서진우는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끅끅대는 백의현을 보며 눈을 끔벅였다. 그러니까 자신이 당황한 모습을 보기 위해 장난을 쳤다는 뜻인가?
“……기분 상하신 거 아니에요?”
“기분이 왜 상합니까. 어린아이도 아니고.”
백의현이 제 턱을 문지르며 웃음기가 덜 가신 목소리로 말했다. 어쩐지 맥이 풀리는 답변에 서진우가 어깨를 늘어뜨렸다.
“……이사님, 연기 잘하시네요…….”
단순한 장난에 깜박 속아 넘어간 자신이 어리석다고 해야 할까, 이런 아이 같은 장난을 친 백의현이 나쁘다고 해야 할까. 절로 힘이 빠진 걸음으로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고 있노라니, 슬쩍 몇 발자국 앞선 백의현이 몸을 돌려 서진우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래서, 싫습니까?”
뒷짐을 진 채 고개를 모로 기울여 시선을 맞춘 백의현이 장난스레 물었다. 서진우는 자신을 살피는 시선을 마주하며 입을 다물었다. 코끝을 슬쩍 찌푸리며 질문하는 백의현의 표정에 아이 같은 해맑음이 묻어 있었다. 서진우는 그 표정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좋아하죠.”
그래. 인정한다. 어울리지 않는 아이 같은 장난까지, 백의현의 모든 점이 좋았다.
감정을 단어화하여 입에 담는 순간, 온종일 부정하려 애를 썼던 감정이 삽시간에 구체화하여 크기를 키웠다. 서진우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눈앞의 이 남자가 좋았다. 그가 자신의 감정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든 아니든, 이미 좋아져 버리고 말았다.
‘아주 제 발로 가시밭길에 뛰어드는구나.’
아무리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지만, 그 매운 맛을 보고도 여전히 감당하지 못할 짝사랑을 시작하고야 마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서진우가 체념하며 눈을 감자, 부드러운 백의현의 음성이 뒤를 따랐다.
“저도 서진우 씨가 좋습니다.”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
하여튼 헤테로는 이래서 문제다. 서진우는 맥없이 중얼거리며 다시 걸음을 옮겨 백의현을 스쳐 지났다. 얄궂은 백의현은 아무것도 모른 채 웃으며 그 뒤를 따랐다.
“너무 열심히 놀았나 봅니다. 배가 고프군요. 서진우 씨는 저녁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글쎄요. 그냥 집에서 라면이나……. 어.”
대충 대답하며 걷던 서진우가 문득 코끝을 맴도는 맛있는 기름 냄새를 맡고 걸음을 멈추었다. 편의점 옆, 빨간 천막이 쳐진 작은 포장마차에 몇 명의 학생들이 줄을 선 모습이 보였다. 서진우의 표정이 반가움으로 밝아졌다. 아까 지나올 때는 닫혀 있어서 영업을 안 하는 줄 알았건만, 아직 명성이 건재한 모양이었다.
“이사님, 저 가게 가 보셨어요? 핫바와 어묵 파는 곳인데, 나름 학교 앞 명물이거든요.”
서진우가 밝은 표정으로 백의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백의현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반사적으로 그의 표정을 찾아 눈을 들어 올린 서진우가 멈칫했다. 백의현의 표정이 조금 전과는 달리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괜찮으세요? 무슨 문제라도…….”
어디 몸이라도 안 좋아진 걸까? 걱정이 인 서진우가 백의현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백의현은 여전히 자리에 굳어 선 채였다. 서진우는 주름진 미간을 살피며 조심스레 백의현의 팔을 붙들었다.
“……이사님?”
“―아, 속이 좀.”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백의현이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뒤로 물러섰다. 정중하게 접촉을 거부하는 듯한 움직임에 서진우가 어색하게 손을 거두었다. 그 행동을 알아본 백의현이 눈썹을 아래로 휘며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미안합니다. 기껏 추천해 주었는데. 서진우 씨라도 드십시오.”
“아, 아니에요. 그 정도로 먹고 싶지는 않아요.”
백의현의 권유에 서진우가 재빨리 고개를 내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무엇이 백의현의 신경을 건드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선은 자리를 벗어나는 것이 상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백의현은 무언가를 더 이야기하는 대신 조용히 서진우의 뒤를 따라왔다.
다행히 학교 내 주차장에 도달했을 때쯤, 백의현은 상태가 많이 호전된 것처럼 보였다.
“좋은 날이었는데, 제 태도 때문에 당황하셨죠. 미안합니다.”
“사과하지 마세요. 몸이 안 좋아지면 어쩔 수 없죠.”
서진우는 재차 정중히 사과하는 백의현을 향해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솔직히 말해서 백의현이 손을 밀어냈던 일 자체보다는 그의 태도가 왜 갑자기 바뀌었는지가 더 신경 쓰이던 참이었다. 잠시 눈을 굴리며 고민하던 서진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어묵을 싫어하시나요?”
생각해 보니 조금 전 먹었던 떡볶이에는 어묵이 없었다. 만일 백의현이 서진우와 같은 냄새를 맡고 상태가 안 좋아졌던 거라면, 범인은 역시 그 기름 냄새일 가능성이 컸다.
서진우의 질문에 백의현의 표정이 뻣뻣해졌다. 서진우는 잠시 망설이듯 입술을 깨문 채 시선을 내리까는 백의현을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마주 보았다.
“……아무래도.”
이윽고 백의현이 제 입술을 매만지면서 힘없이 웃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딘가 괴로워 보이는 웃음을 띤 채 그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역한 냄새는…… 견디기가 어려워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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