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자세가 좋군요. 다시 해 봅시다.”
급작스럽게 전투적으로 변한 서진우를 알아본 백의현이 길쭉한 다리를 꼬고 앉으며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하여튼 헤테로는 속 편해서 좋겠다. 서진우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배트를 들어 올렸다. 이윽고 다시 펑, 공이 튀어나왔다.
아무리 좋은 스승에게 배운다 한들 첫술에 배부르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법이다. 서진우는 몇 번의 헛스윙을 반복한 후에야 마침내 첫 공을 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깡!
요란한 소리와 함께 손바닥부터 저릿한 충격이 일었다. 반동으로 상체가 다시금 360도 홱 돌았다.
“폼이 훨씬 좋아졌군요.”
자리에서 일어난 백의현이 가볍게 손뼉을 치며 서진우에게 다가왔다. 서진우는 가볍게 숨을 헐떡이며 배트를 고쳐 쥐었다. 어지러운 와중에도 성취감이 일었다.
“고, 공은 어디 있어요?”
“저쪽, 투수 앞쪽입니다. 제대로 맞았군요.”
흥분한 서진우만큼이나 백의현의 음성에도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서진우는 백의현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의 말대로, 피칭 머신 옆에 선 투수 영상의 발치 근처에 공 하나가 느리게 굴러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게 진짜 시합이었다면 안타였을 겁니다.”
백의현이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서진우는 자신이 쳐낸 공을 보다 백의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공을 얼마나 잘 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백의현이 그렇게 말하니 정말 잘 해낸 것처럼 느껴졌다. 그 증거로 미소를 띤 백의현의 표정에서는 뿌듯함이 느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고작 타격 게임에서 처음으로 공을 쳤을 뿐인데도. 백의현의 표정을 마주하니 서진우의 마음에도 기쁨이 빠듯하게 차올랐다.
“다음번엔 더 잘할 거예요.”
서진우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백의현을 향해 손바닥을 들어 올리며 씩 웃었다. 조금 놀란 듯 눈을 둥그렇게 떴던 백의현이 이내 웃으며 제 손을 맞부딪쳐 주었다.
“당연히 그러겠죠. 서진우 씨는 뭐든 금방 배우니까요.”
짝, 경쾌한 하이 파이브 소리가 펜스 안을 가볍게 울렸다.
물론 운 좋은 성공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이리라.
게임이 끝났을 때 서진우의 점수는 처참했다. 세 자릿수를 겨우 넘긴 점수를 보며 서진우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마지막에는 나름 잘 친 것 같은데. 백의현에 비교하면 그야말로 엉망인 점수였다.
“그래도 잘했습니다. 마지막 5번 정도는 한 번도 안 놓치고 전부 쳐냈잖습니까.”
먼저 바깥으로 나온 백의현이 서진우가 잘 내려올 수 있도록 그의 손을 붙잡아주며 격려했다.
“이사님한테 그런 말씀 들으니 기만당하는 것 같아 기분이 별로인데요…….”
서진우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백의현이 싱긋 웃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몇 번 더 해 보면 서진우 씨도 훨씬 잘하게 될 겁니다.”
백의현과 서진우가 나란히 복도를 빠져나왔다. 깡, 깡, 하며 공을 때리는 소리가 퍽 요란했을 텐데도 주인은 그새 다시 잠이 들어 있었다. 백의현이 가볍게 테이블을 두드렸다.
“사장님, 인형 주십시오.”
낮고 정중한 음성으로 저런 말을 한다는 것이 어쩐지 귀엽고 우스웠다. 서진우는 한 발짝 물러서서 웃음을 참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백의현에 말에 퍼뜩 눈을 뜬 주인이 입맛을 다시며 계기판을 확인했다.
“어, 어어? 어. 이야…… 잘 치셨네. 여기 세 번째 줄에서 마음에 드는 거 하나 가져가슈.”
사내가 상체를 숙여 벽면에 진열된 인형을 가리켰다. 성큼 걸음을 옮긴 백의현이 서진우를 돌아보았다.
“뭘 갖고 싶습니까?”
“네?”
가게를 둘러보고 있던 서진우가 어리둥절하게 대꾸했다. 그걸 왜 자신에게 묻지, 하는 표정인 서진우를 향해 백의현이 턱짓을 해 보였다.
“같이 어울려 주신 기념으로 드리겠습니다. 골라 보세요.”
“……저한테 인형을 주시겠다고요?”
“네.”
백의현이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서진우는 당황해 주인을 향해 눈을 돌렸다. 주인은 그사이 다시 팔짱을 낀 채 잠에 빠져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 큰 남성 둘이 인형을 주느니 마느니 하는 대화를 하고 있는데도 아무런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서진우는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백의현을 돌아보았다.
“저는 괜찮은데…… 이사님이 전리품으로 가져가세요.”
“제가 드리고 싶습니다.”
완곡하게 거절의 의미를 표현했음에도 백의현은 굳건했다. 서진우는 난처한 눈으로 인형 진열대를 돌아보았다. 솔직히 기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호감이 있는 상대에게 선물을 받는 것이 싫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문제라고…….’
서진우는 속으로 한탄하며 인형들을 둘러보았다. 퍽 오래되어 유행이 지난 인형들이 자신을 데려가 달라는 듯한 눈으로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고작 이런 것에도 설레는 자신이 어이없다 못해 우습다고 생각하던 서진우가 문득 한구석에 시선을 고정했다.
“저거…… 둘이 색만 다른 곰 인형이요.”
“아, 정말 그렇군요.”
서진우가 바라보는 방향을 따라 눈을 돌린 백의현이 곧 그의 말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웃는 얼굴을 한 하늘색과 노란색 곰 인형이 어깨를 맞대고 사이좋게 앉아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빈말로라도 예쁘다고는 하기 어려운 평범한 인형이었다. 심지어는 세월의 풍파를 맞아 변색한 듯 흐리멍덩해 보이기까지 했다. 백의현은 그 인형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서진우를 내려다보았다.
“저거로 하겠습니까?”
“네.”
서진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백의현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빛에 총기가 생생했다. 저 인형의 어떤 점이 서진우의 이목을 집중시켰을까. 궁금증이 일었다.
“어떤 색이 마음에 듭니까?”
백의현의 말에 서진우는 고민하듯 말이 없었다. 이윽고 그가 주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 사장님. 혹시 인형 개별 구매는 안 될까요?”
“으엉? 경품 말고 또 사고 싶다는 거유?”
“네.”
깜빡 잠들려던 주인이 제게 던져진 질문에 놀라 눈을 끔벅였다. 백의현은 서진우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으음, 하고 미간을 찌푸린 주인이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안 돼. 인형은 경품이야. 갖고 싶으면 따 가슈.”
오호라. 그저 대충 자리만 지키는 사장인 줄 알았더니 나름의 경영 철학을 지닌 이인 모양이다. 백의현은 내심 감탄하며 서진우를 향해 부드럽게 물었다.
“두 개 다 갖고 싶습니까?”
“으음, 그런 게 아니라……. 아.”
주인의 단호한 거절에 아쉬워하며 주위를 둘러보던 서진우가 문득 고개를 멈추었다.
“사장님. 다른 종목으로 점수를 내도 똑같은 인형 딸 수 있는 건가요?”
“그렇지.”
서진우의 말에 주인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대답했다. 서진우는 백의현을 돌아보았다.
“이사님, 사격 한판 안 하실래요?”
그가 의욕적으로 눈을 빛냈다. 백의현은 그제야 서진우의 생각을 알아차렸다. 그는 카운터 앞에 있는 비비탄 사격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백의현이 의아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야 좋습니다만…… 서진우 씨, 사격 잘합니까?”
백의현의 대답에 지갑을 꺼내던 서진우가 씩 웃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이래 봬도 제가 군대에서 사격 훈련 1등 포병 출신입니다.”
***
야구와는 달리 자신 있어 보이는 태도에는 근거가 있었다.
서진우의 사격 점수를 확인한 주인은 군말 없이 두 개의 곰 인형을 나란히 넘겨주었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서진우는 한 팔로 두 인형을 끌어안고 드물게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가게를 나섰다. 백의현은 서진우의 뒤를 따르며 낮게 웃었다. 퍽 신이 났는지 뒤에서 보는 걸음걸이가 경쾌했다.
“아, 재미있었다. 덕분에 잘 놀았습니다.”
“나야말로 어울려 줘서 고맙습니다. 사격도 재미있더군요.”
백의현이 서진우의 곁으로 걸음을 옮기며 대답했다. 어찌나 시간 가는 줄을 몰랐던지 어느새 하늘이 노을로 젖어가고 있었다. 그사이 학생들 수업도 끝이 났는지 거리는 낮보다 훨씬 북적거렸다. 이렇게 바깥에서 머리를 비우고 놀아 본 게 얼마 만일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이사님.”
“네?”
문득 걸음을 멈춘 서진우가 불쑥 제 팔에 들린 것을 내밀었다. 백의현은 제게 디밀어진 하늘색과 노란색 곰 인형을 얼떨떨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이걸 왜 보여주는 거지. 의아해하는 찰나, 서진우가 명랑하게 제의했다.
“하나 마음에 드는 거 가지세요.”
“네?”
“아무리 생각해도 같이 놀았는데 저만 인형을 받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서요.”
빨리 하나 데려가세요. 서진우가 양손에 든 인형을 흔들어 보이며 말을 마쳤다. 백의현은 멍하니 눈앞의 청년을 내려다보았다. 쾌활한 음성과는 대조적으로, 제안한 자신도 부끄러운지 서진우의 귓불과 목덜미가 불그스름했다.
“―그럼 사격은 제게 인형을 선물하려고 한 겁니까?”
그제야 서진우의 의도를 이해한 백의현이 옅은 미소를 드리우고 되물었다. 백의현의 질문에 서진우가 목을 움츠리며 겸연쩍게 웃었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긍정임을 이해한 백의현이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서진우답지 않은 행동이다 싶었는데, 되짚어 보니 한 쌍으로 이루어진 인형이 이 못난 곰 인형밖에 없어서 욕심을 부렸던 모양이었다.
“하하. 그럼 전 이 녀석으로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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