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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느니 퇴사하겠습니다, 이사님!-53화 (53/150)

53화

“―그, ……구경……이라니.”

“서진우 씨도 실컷 저를 구경하지 않으셨습니까. 눈 한 번 깜박이지를 않던데요.”

백의현이 눈가를 접어 웃었다. 말문이 막힌 서진우가 로봇처럼 어색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 하, 하.

‘다 보고 있었구나…….’

눈앞의 남자가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기까지는 못한다는 사실이 천만다행이었다.

예기치 못한 공격에 녹다운된 서진우가 비틀거리며 준비를 하는 사이, 설정을 초기화하고 돌아온 백의현이 그의 맞은편에 섰다.

“야구 한 번도 안 해봤습니까?”

“배팅 게임은 대학생 때 두세 번 정도…… 게임은 초등학교, 중학교 때 수업으로 한두 번 정도…….”

장갑을 여미고 양손으로 배트를 그러쥔 서진우가 조금 긴장한 상태로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알루미늄으로 된 배트는 예상보다 묵직했다. 이걸 그토록 쉴 새 없이 휘둘러 댔다니, 역시 백의현은 체력이 남다른 것이 분명했다. 자신의 체력이 떨어진다는 생각은 자연스럽게 외면해 버린 서진우가 허공에 대고 배트를 두어 번 휘둘렀다. 배트 무게 탓인지 몸이 쉽게 휙휙 흔들렸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진지한 얼굴로 서진우의 자세를 살피던 백의현이 팔짱을 꼈다.

“일단 한 번 쳐 보는 게 좋겠군요.”

서진우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 백의현이 어떤 자세로 서 있었더라. 눈에 새길 기세로 꼼꼼하게 관찰했음에도 전체적인 자세를 떠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그야 그럴 만도 하지. 이성 대신 음란 마귀가 활약했으니. 서진우는 스스로를 타박하며 엉거주춤 허리를 낮추고 배트를 들어 올렸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피칭 머신에서 튀어나오는 공을 쳐 내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각오를 마친 서진우가 꾹, 발치의 버튼을 밟았다.

펑!

무언가 터지는 소리를 내며 공이 튀어나왔다. 옆에서 봤을 때도 빠르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마주한 공의 속도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서진우는 당황해 반사적으로 힘껏 배트를 휘둘렀다.

“으앗!”

당연히 공을 때릴 수 있을 리 없었다. 서진우는 자리에서 빙글, 한 바퀴 반을 무의미하게 돈 후 자리에 주저앉았다.

“고, 공은 어디에…….”

눈앞이 핑글 돌았다. 서진우는 배트에 기대어 몸을 일으키며 황망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 있습니다.”

데구루루, 벽을 때리고 구른 야구공이 백의현의 발치에서 멈추었다. 허리를 숙여 공을 주워든 백의현이 신중한 눈으로 그것을 살폈다. 어차피 때리지도 못한 공인데 무얼 그토록 관찰하는 걸까. 괜스레 겸연쩍어진 서진우가 눈을 굴릴 때쯤, 백의현이 공을 대충 내던지고는 가까이 다가왔다.

“휘두르는 폼이 위험합니다. 그렇게 하면 몸을 다쳐요.”

“네?”

서진우가 어정쩡한 자세로 서서 눈을 깜박였다. 흠, 하고 목을 울린 백의현이 불쑥 서진우의 팔꿈치를 가볍게 붙들었다.

“어깨에 힘을 빼보시겠습니까.”

서진우는 백의현이 시키는 대로 했다. 백의현이 마뜩잖다는 듯 슬쩍 눈썹을 찌푸렸다.

“가슴을 움츠리라는 뜻은 아닙니다.”

“아…… 넵.”

어쩐지 혼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서진우는 어설프게 가슴을 펴 보았다. 그러나 이것도 백의현이 원하는 자세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매서운 눈으로 서진우를 살피던 백의현이 곧 발을 돌려 그의 뒤에 섰다.

“다리를 조금 더 넓게 벌려 보세요. 오른 다리를 축 삼는 겁니다. 팔로 배트를 휘두른다기보다는 하체로 상체를 받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길쭉하고 커다란 손이 거침없이 서진우의 상체 이곳저곳을 짚어 나갔다. 사심 없는 음성이 무심하고 단단했다. 서진우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백의현의 의도야 당연히 서진우가 공을 칠 수 있도록 자세를 교정해 주는 것이었겠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이 순수하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어깨, 팔뚝, 허리, 골반. 백의현의 손이 닿는 곳마다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찌릿찌릿하며 열이 올랐다. 긴장으로 몸에 힘이 들어간 탓에 어설픈 자세가 오히려 더 엉망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서진우는 이미 아득해진 정신이 우주로 떠나가는 기분을 느끼며 힘겹게 입술을 떼었다.

“저기, 그…… 이사님, 그…….”

“아 참,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공에서 끝까지 눈을 떼지 않는 겁니다.”

백의현이 가냘픈 서진우의 애원을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아마도 조언을 하는 데에 몰두한 나머지 서진우의 말은 웅얼거림 정도로밖에 들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서진우는 울 것 같은 기분으로 침음을 삼켰다. 그사이 백의현이 몸을 더욱 바투 기울여 왔다.

“소리가 크다고 놀랄 필요 없어요. 저건 그저 공을 던지는 기계일 뿐입니다. 서진우 씨, 목표를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거 잘 하잖습니까. 공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세요.”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저음이 고막을 파고들어 배 아래에 고이는 기분이었다. 서진우는 자신이 들은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것이,

‘등에…… 닿잖아.’

서진우를 감싸듯 선 백의현은 숫제 그를 끌어안고 있는 모양새였다. 서진우는 등 뒤에 닿는 단단한 감촉이 그의 가슴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이를 악물었다. 만일 백의현이 서진우가 그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걸 알고 이러는 거라면 정말 못됐다고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는 행동이었다.

‘와중에 왜 입술은 귀에 붙이고 있는데!’

어찌나 거리가 가까웠던지 숨이 피부에 닿는 것이 느껴질 지경이다. 서진우는 목덜미로 소름이 오소소 내달리는 것을 느끼며 질끈 눈을 감았다.

“이렇게 허리를 이용해서 휘두르는 겁니다.”

그러나 시야가 까맣게 암전되자 서진우는 자신의 선택이 무척 잘못되었음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한 가지 감각이 차단되자 나머지 감각이 곤두섰다.

훅, 향수와 뒤섞인 백의현의 체향이 코끝을 스쳤다. 서진우는 입안이 바싹 마르는 것을 느꼈다. 몇 번 맡아 본 적이 있어 인지하지 못했던 향이 별안간 강렬하게 전신을 자극했다. 삽시간에 하반신에 열이 몰렸다. 머릿속에서 붉은 경고등이 번쩍번쩍 튀었다.

“이사님, 그……!”

이제 잘 알겠으니 손을 떼달라고 말하려 홱 몸을 돌린 서진우가 균형을 잃고 휘청였다. 안 그래도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진 상체에 손에 들고 있던 배트가 무게를 더하니 예상보다 더 빠르게 눈앞이 회전했다.

‘넘어진다.’

본능이 머릿속에서 외쳤다. 서진우는 몸이 뒤로 기우는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거의 동시에 단단한 손아귀가 서진우의 허리를 낚아챘다.

“!”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백의현이 있었다. 시야를 가득 메우는 사내의 얼굴에 놀란 서진우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별안간 주위의 모든 소리가 멀어지고 현실감이 아스라이 사그라졌다. 반면에 셔츠 천 너머로 느껴지는 단단한 손아귀는 척추뼈 어디를 지탱하고 있는지까지 생생하게 느껴졌다. 막 몸을 움직여서 그런 걸까? 백의현의 체온이 평소보다 높은 것 같았다.

“괜찮습니까?”

서진우만큼이나 놀란 표정의 백의현이 그를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 서진우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괜찮……. 아, 네. 괜찮습니다!”

아득하게 멀어졌던 현실감이 삽시간에 되돌아왔다. 서진우는 황급히 배트로 몸을 지탱하며 백의현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딴생각을 하다가 그만.”

“아닙니다. 사과하지 마세요.”

당황으로 횡설수설 사과하는 서진우에게 대꾸하며 백의현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 또한 서진우만큼이나 당혹스러운지,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뒤늦게 이성을 되찾은 듯 눈썹을 아래로 휘며 조심스레 시선을 들어 올렸다.

“제가 너무 불필요한 참견을 했죠.”

서진우는 반사적으로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려다 곧 입을 다물었다. 민망하다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서진우는 대신 겸연쩍게 어깨를 움츠리며 웃었다.

“……이번에는 이사님께서 알려주신 대로 해 볼게요.”

“그래요. 잘 할 수 있을 겁니다.”

백의현이 서진우를 향해 마주 미소 지으며 돌아섰다. 서진우는 조금 전 자신이 앉아 구경하던 자리로 향하는 백의현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마음을 들쑤시던 사내가 드디어 멀어졌으니 안도해야 하는데,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허전했다.

‘아쉽……긴 뭐가 아쉬워. 미쳤어, 서진우?’

서진우는 멍하니 든 생각에 화들짝 놀라 제 뺨을 내리쳤다. 가벼운 짝, 소리에 백의현이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서진우는 어색하게 웃으며 백의현이 알려준 대로 자세를 고쳐 섰다. 하여튼 제정신이 아니었다. 바로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백의현을 좋아하지 않겠다고 다짐해 놓고, 허전하긴 뭐가 허전하단 말인가.

‘정신 차리자.’

서진우는 백의현에 대한 사감을 버리고 그가 알려준 정보 값만 상기하기 위해 애를 쓰며 피칭 머신을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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