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안녕하세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서니 가게 안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왼쪽에는 작은 실내 농구대가, 오른쪽에는 비비탄 사격 공간이 설치되어 있고 중앙이 뻥 뚫린 오락실은 겉과는 달리 안쪽으로 깊은 모양새였다. 확실히 영업 중인 가게는 맞는 모양이었다.
문 근처 카운터에 앉아 졸고 있던 중년 사내가 문 열리는 소리에 퍼뜩 눈을 떴다. 서진우는 백의현이 지갑을 열기 전 후다닥 카운터 앞을 차지했다.
“야구 2명이요. 여긴 제가 계산할게요.”
서진우가 제 지갑을 꺼내며 백의현을 흘긋 돌아보았다. 백의현은 대답 대신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서진우의 등 뒤에 섰다. 가격표가 인쇄된 코팅지를 찾아 내밀던 가게 주인이 뒤늦게 백의현을 발견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게 입고 타격할 거유?”
목소리에 못마땅함이 서려 있었다. 서진우는 머쓱한 웃음을 흘렸다. 손님이 어떻게 입든 가게 주인이 참견할 일은 아니지마는, 대낮부터 꽉 조여 맨 넥타이에 베스트, 재킷 단추까지 꼼꼼하게 잠근 이가 배트를 휘두르러 왔다고 하니 이상하게 느껴질 만도 했다.
“아. 네, 그렇습니다만.”
자신을 가리켜 던진 질문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백의현이 심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잠시 생각하듯 입맛을 다신 주인이 서진우에게 거스름돈을 건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리해서 휘두르다간 옷 찢어질 수도 있으니 조심하슈. 따라와요들.”
그렇게 말한 사내가 복도로 걸음을 옮겼다. 서진우와 백의현은 그 뒤를 따랐다.
“배트는 저쪽에 있는 걸 쓰고, 요기 바닥에 보이는 버튼을 발로 누르면 공이 나오니까 조절해서 치면 되고. 장갑은 저기 배트 옆에 걸려 있는 것 중에서 맞는 거 찾아서 끼고, 옷걸이는 이쪽에 있수다.”
“네에…….”
“한 사람 끝나고 다음 사람 할 때는 여기 이 버튼 눌러서 한 게임 리셋하면 됩니다잉.”
복도 안쪽, 실내야구용 펜스 문 자물쇠를 열어 준 주인장이 간단한 설명을 마치고 돌아섰다. 서진우는 멀어지는 주인장을 돌아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스크린 야구라고 쓰여 있지 않았나요……?”
어쩐지 금액이 많이 싸다 했다. 대학가 인근이라 그런 줄 알았더니만. 서진우는 고요한 타석을 올려다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타석 반대쪽 중앙에 피칭 머신이 놓여 있고, 그 옆에 어색하게 선 3D 투수 영상이 보였다. 그 외에는 스크린이라고 할 만한 데가 없었다. 심지어는 투수 영상 위에 설치된 점수 계산기도 스크린과는 하등 상관없는 전자 숫자판이었다.
“그래도 어렸을 때보다는 조금 발전했네요. 던져 주는 투수도 있지 않습니까.”
올라가죠. 백의현이 재킷 단추를 풀며 말했다. 서진우는 백의현과 함께 펜스 안쪽으로 들어섰다.
희미하게 텁텁한 먼지 냄새가 났다. 서진우는 얌전히 구석에 비치된 의자에 앉았다. 그러는 사이 재킷과 베스트를 벗어 옷걸이에 건 백의현이 배트를 들고 돌아왔다.
“추억을 되살리며 놀기에는 이 정도로 오래된 분위기가 좋습니다.”
그가 가볍게 어깨를 돌리며 씩 웃었다. 그런가. 서진우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확실히 이십 년 전쯤 이런 놀이를 즐기던 사람이라면 좋아할 법한 낙후된 분위기였다.
‘이런 걸 좋아하신다니 의외네.’
그러고 보면 오늘 백의현에게서 생각지도 못한 모습을 많이 보고 있었다. 그래, 놀고 싶다는 본인이 마음에 들면 된 거지. 서진우는 마음 편히 생각하기로 하며 백의현이 소매를 걷는 모습을 구경했다.
“야구 좋아하시나 봐요.”
“어릴 때는 좋아했습니다. 형이 야구를 했었거든요.”
배트를 들고 자세를 잡던 백의현이 대꾸했다. 그는 신중하게 피칭 머신을 쏘아보고 있었다. 스포츠에 문외한인 서진우가 보기에는 퍽 전문적으로 느껴지는 자세였다. 잠시 배트를 흔들며 각도를 재던 백의현이 곧 발로 버튼을 눌렀다.
펑, 피칭 머신에서 공이 튀어나왔다. 그 폭발적인 소리에 서진우가 깜짝 놀란 사이 백의현이 있는 힘껏 팔을 휘둘렀다.
탁.
백의현을 지나친 공이 펜스에 부딪혀 발치를 데구루루 굴렀다. 서진우는 눈을 깜박였다.
“……생각보다 엄청 빠르네요.”
“아쉽네요. 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백의현이 미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서진우는 그가 실망을 거두고 다시 자리를 잡는 모습을 구경했다. 허공에 늘어진 넥타이가 백의현의 움직임을 따라 흔들거렸다. 이윽고 다시 펑, 머신에서 공이 튀었다. 백의현은 이번에는 공을 놓치지 않았다.
딱!
배트와 공이 부딪치며 요란하고도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오른쪽으로 튀어 나간 공이 천으로 된 벽을 때리고 바닥을 굴렀다. 서진우가 경이로워하며 손뼉을 쳤다.
“와, 두 번 만에 치시다니 대단해요.”
“실제였다면 파울이겠지만요.”
백의현이 넥타이 고리에 손가락을 밀어 넣고 느슨하게 잡아당기며 씩 웃었다. 항상 정갈하게 넘겨 두었던 머리칼이 격렬한 움직임 탓에 몇 가닥 흘러내린 모습이 보였다. 서진우는 숨을 삼키며 입을 다물었다.
무뚝뚝하고 단정한 인상이 조금 흐트러졌을 뿐이다. 그 사소한 변화에 가슴이 술렁였다. 서진우는 슬쩍 눈을 돌려 자극적인 장면에서 시선을 돌렸다.
‘백의현은 헤테로다. 나한테 아무 사심이 없다. 나는 백의현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다. 가망 없는 짝사랑 안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나대지 말고 가만히 좀 있자, 정신머리야. 응?’
주문 같은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자신을 애써 다스리고 있을 때였다. 다시금 펑, 딱! 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서진우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백의현이 연속적으로 힘껏 배트를 휘둘러대고 있었다.
“와…….”
공격적인 스윙에 절로 입이 떡 벌어졌다. 서진우는 멍하니 백의현의 움직임을 바라보았다.
소매를 걷어 올려 드러난 팔뚝 근육이 팽팽하게 부푼 모습이 보였다. 그가 배트를 휘두를 때마다 돌아가는 허리가 셔츠 아래에서 선명한 라인을 드러냈다. 게다가 벨트 아래로 뻗은 엉덩이는 또 어떠한가. 몸에 딱 맞춘 슈트는 격렬하게 움직일 때마다 피부에 달라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덕분에 서진우는 옷감 너머 허리부터 엉덩이까지 이어지는 탄탄한 몸의 모양을 볼 수 있었다.
서진우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시각적 자극이 너무…… 심했다.
‘아니지, 미쳤냐고. 이성 어디 갔냐고!’
서진우는 황급히 주먹을 말아쥐고 이를 악물었다. 백의현은 잘못하지 않았다. 잘못은 모조리 음탕한 눈으로 사람을 보는 저 자신에게 있었다! 서진우는 차라리 눈을 질끈 감고 이 자리를 뛰쳐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이성을 포기해 버린 정신머리는 뇌의 명령을 따를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이 분명했다.
‘……몸 진짜 좋다.’
아마도 이런 고강도 운동에 익숙한 것이겠지. 옷태로 보이는 근육의 형태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얇은 셔츠 너머로 몸 선이 진해졌다 옅어지기를 반복했다. 있는 힘껏 팔을 움직여 댄 탓에 백의현의 옷차림은 퍽 엉망이었다. 그 덕에 서진우는 점점 더 눈 둘 곳을 잃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비유적 표현이었다.
“―몇 점부터 인형을 받을 수 있다고 했죠?”
마침내 타격을 모두 마친 백의현이 배트를 바닥에 내던지며 가볍게 숨을 헐떡였다. 넋 놓고 백의현을 구경하던 서진우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아마도 300점……. 다 치신 거예요?”
“네. 오랜만에 하니까 재미있어서 그만 몰입을 해버렸습니다. 기다리느라 지루하셨겠군요.”
백의현이 턱 끝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눈썹을 휘어 웃었다. 미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서진우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었어요!”
빈말이 아닌 진심이었다. 백의현이 배팅에 몰두하는 동안 서진우도 충분히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니까. 하지만 ‘이사님을 반찬 삼아 즐거웠습니다’ 따위의 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서진우는 겸연쩍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엄청 잘 치시는 거 아니에요? ―와, 510점! 인형 큰 것도 받을 수 있겠는데요?”
점수를 확인한 서진우가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막연히 잘 치는 것 같다고는 생각했지만, 백의현의 점수는 인형을 받아 갈 수 있는 점수를 크게 상회했다. 호들갑을 떠는 서진우를 보며 백의현이 싱긋 웃었다.
“그거 다행이군요. 빈손으로 돌아가면 어쩌나 했는데. 그럼 이제 서진우 씨 차례군요.”
“네?”
백의현의 말에 서진우가 맹하게 대꾸했다. 넥타이를 완전히 풀어내던 백의현이 의아해하며 서진우를 향해 눈을 들어 올렸다.
“아까 두 명분 결제하셨잖습니까. 서진우 씨 차례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랬던 기억이 났다. 서진우는 낭패감에 입을 다물었다. 눈앞에서 이렇게 잘 치는 사람을 봤는데, 야구의 ‘야’자도 모르는 자신이 다음 순서로 배트를 휘둘러야 한다니. 그야 어린 시절에는 술에 취해 친구들과 몇 번 장난으로 휘둘러 본 적 있다지만, 그것도 벌써 십 년 전 과거 이야기였다.
아…… 하기 싫은데. 슬쩍 눈을 굴리는 서진우를 본 백의현이 배트를 주워 들어 가까이 다가왔다.
“어렵지 않아요. 재미있을 겁니다.”
“―아, 하하. 저는 운동 신경이라는 게 전혀 없어서요……. 진짜 안 해도 괜찮습니다. 아, 이사님 혹시 부족하시면 더 치셔도 괜찮아요.”
“아니요. 서진우 씨의 기회를 뺏을 수는 없습니다.”
다시 단호한 상사의 얼굴로 돌아온 백의현이 진지하게 서진우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가 손수 서진우의 손에 배트를 쥐여 주며 말을 이었다.
“제가 느끼는 해방감을 서진우 씨에게도 맛보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도 서진우 씨를 구경해보고 싶거든요.”
낮은 목소리로 나긋하게 속삭인 백의현이 시선을 맞추며 싱긋 웃었다. 서진우가 뻣뻣하게 몸을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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