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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느니 퇴사하겠습니다, 이사님!-51화 (51/150)

51화

“……이사님이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그런가, 진짜 엄청난 일을 한 것 같잖아요.”

정말로 필사적으로 노력한 자신이 대단하다고, 착각을 할 것 같았다.

서진우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부끄럽고 쑥스러우면서도 어쩐지 울컥하는 기분이 비누 거품처럼 몽글거려 상황을 무마하고 싶어졌다.

“진짜 엄청난 일 맞으니 자신을 가지세요.”

그러나 백의현은 웃지 않았다. 그가 서진우에게 꼿꼿하게 시선을 맞춘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신뢰도 낮은 말 따위를 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반들거리는 까만 동공 속에 서진우가 고스란히 담겼다. 그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았기에, 서진우는 마치 백의현의 눈 속에 자신이 들어간 것 같다는 기분을 느꼈다.

“나는 열심히 하는 서진우 씨가 좋습니다.”

이윽고 그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니, 속삭였다고 느낀 것은 서진우뿐일지도 모르겠다. 순간 그의 귀에서 모든 소리가 멀어졌다. 오직 남은 것은 백의현의 말이 남긴 잔상뿐이었다.

어쩐지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서진우는 벼락을 맞은 양 척추를 내달리는 오싹함을 느끼며 숨을 삼켰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가슴을 쿵쿵 두드려대는 것 같았다.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다.

“―남한테는 그렇게 좋은 조언을 해주고, 본인은 왜 그렇게 못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고지식한 점도 마음에 듭니다.”

백의현이 앞치마를 벗어 테이블 위에 되돌려 놓으며 가벼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가 여전히 얼어붙은 듯 꼼짝도 못 한 채 앉아 있는 서진우를 보며 씩 미소 지었다.

“아까 학생한테 해 준 말 말입니다. ‘열심히 했으면 티를 내라’고 했던가요?”

아. 서진우는 속으로 탄식했다.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과 질의를 하던 때 자신이 그런 말을 해준 기억이 났다. 백의현은 수업이 끝난 후 바로 자리를 떠났다고 생각했는데, 어딘가에서 서진우의 말을 듣고 있었던 걸까.

민망스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백의현이 발갛게 달아오른 서진우의 뺨을 발견하고 하하, 소리를 내어 웃었다.

“어려우면 서진우 씨는 하던 대로 열심히만 해요. 내가 발견했으니까, 이제는 억지로 티 내지 않아도 내가 서진우 씨를 알아보겠습니다.”

그가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서진우를 바라보았다. 서진우는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백의현을 마주 보았다. 뱃속이 울렁거렸다.

아무 사심 없이 어떻게 이런 말들을 할 수가 있을까.

어떻게 해야 오해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백의현이 그냥 좋은 사람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다잡을 수 있을까.

“곧 해가 지겠군요. 슬슬 일어날까요?”

흘긋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한 백의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진우는 허겁지겁 백의현의 뒤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 보니 아직도 저 혼자 촌스러운 앞치마를 두른 채였다. 서진우가 허둥대며 앞치마를 벗는 사이 백의현은 어느새 결제까지 마친 상태였다.

“제, 제가.”

“수업하느라 고생했잖습니까. 이 정도는 사는 축에도 못 듭니다.”

아주머니에게 여유롭게 인사까지 건넨 백의현이 유리문을 열며 서진우를 내려다보았다. 나가시죠. 그는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자리를 비켜섰다. 몸에 밴 사소한 배려. 서진우는 그 작은 행동에도 가슴이 칼에 찔린 듯한 욱신거림을 느끼며 바깥으로 나섰다.

큰일 났다.

머릿속에서 위기 경보가 울렸다. 서진우는 백의현 몰래 축축하게 젖어 든 손을 셔츠에 닦으며 난처한 숨을 삼켰다.

살아 돌아온 후 다시는 가망 없는 짝사랑 따위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서진우 씨가 좋습니다.’

이대로라면 돌이킬 수 없는 감정을 품는 실수를 반복하고 말 것 같았다.

***

“이 근처에 오락실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 저 가게는 아직 있군요.”

당장이라도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백의현은 역시나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서진우는 본격적으로 학교 인근을 구경하는 백의현을 보며 가방을 움켜쥐었다.

“회사…… 안 돌아가 보셔도 되나요?”

울 것 같은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머니에 손을 밀어 넣은 채 턱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던 백의현이 느긋하게 대꾸했다.

“오후 일정 다 정리해 두었으니 돌아가지 않아도 됩니다. 저도 가끔은 해를 보면서 퇴근하고 싶거든요.”

“아, 그러시구나…….”

서진우는 어깨를 늘어뜨리며 울적하게 중얼거렸다. 아, 집에 가고 싶다.

지금 이 남자 옆에 붙어 있는 것은 서진우에게 독이 될 뿐이었다. 헤테로인 이에게 빠지는 건 너무 힘들고 괴로운 일이다. 그들은 자신이 건네는 말,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가 얼마나 서진우에게 큰 타격을 주는지 알지 못했다.

‘서슴없이 좋아한다고 말하고, 친근하게 몸을 만지고.’

그럴 의도가 없는 것을 알면서도 서진우는 그 말과 행동에서 여지를 읽었다. 명백한 오독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서진우에게 있어 짝사랑을 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작은 행동들에서 의미를 만들어내고, 점차 그 오해 속으로 깊이 빠져들어 가고 만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서진우는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마음이 도무지 달갑지 않았다. 특히나 헤테로는 절대 안 되었다.

‘다시는 상처받고 싶지 않아.’

서진우는 감정을 잘 숨기지 못했다. 그러니 헤테로를 좋아한다는 건, 상대에게 자신을 경멸할 기회를 만들어 준다는 뜻과 진배없었다. 서진우는 회귀하기 전 자신이 겪었던 수많은 모욕을 상기하려 애썼다. 하성민을 좋아한다는 것을 들켰기 때문에 받아야 했던 수많은 모욕과 폭언, 그리고 잔혹한 거절까지.

‘헤테로는 안 돼. 절대 안 돼, 서진우.’

서진우는 다시금 자신을 매섭게 꾸짖었다. 백의현은 좋은 사람이니 서진우의 감정을 안다고 해서 하성민처럼 못되게 굴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같은 남자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달가워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니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백의현을 멀리하는 일이 최선이었다.

다행히 아직은 기회가 있었다. 지금 백의현에게서 멀어져 혼자 차분히 마음을 정리한다면, 이 정도 감정은 단순한 호감이라고 생각하며 흐지부지 지워 버릴 수도 있을 터였다.

마음 한구석에서 울려 퍼지는 이미 늦은 것 같다는 탄식을 애써 무시하며 서진우는 고개를 내저었다. 좋아, 결심했으니 집에 가겠다고 해야겠다. 이 정도 어울려줬으면 됐잖아. 그렇게 생각하며 서진우가 비장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저, 이사…….”

“와, 실내 야구장이 아직도 있군요.”

당당하게 귀가를 선언하려던 서진우의 목소리는 백의현이 토한 탄성에 묻혀 버렸다. 백의현은 골목 한구석에 자리한 작은 가게에 시선을 붙들린 채였다. 서진우는 재차 집에 가겠다는 이야기를 하려 입을 떼다 그대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토록 들떠 보이는 백의현은 처음 보았다. 검은 눈동자가 가라앉는 햇빛을 반사해 반짝거렸고, 뺨은 기대로 인해 한껏 위로 솟았다. 서진우는 백의현이 바라보는 방향을 따라 제 시선을 돌렸다.

실내 스크린 야구 사격장. 어딜 가나 흔히 발견할 수 있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관리를 소홀히 했는지 구시대적으로 디자인된 노란 간판이 조금 기운 채였다. 유리창에 붙어 있는 글씨도 모두 한구석이 해져서 너덜거렸고, 창 안쪽에 배치된 인형들은 오래되고 조악해 보였다. 안쪽에 불이 켜져 있어 가게 안에 누군가 있음은 알 수 있었지만 그뿐인, 어디에나 있는 낡은 오락실.

그런데도 백의현은 마치 어린아이가 지을 법한, 설렘으로 빛나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같이 가 보지 않겠습니까?”

백의현이 불쑥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서진우의 시선이 그와 정통으로 마주쳤다.

“!”

심장이 철렁했다. 서진우는 황급히 눈을 돌리려 했다. 하지만 들뜬 백의현의 말이 그를 붙들었다.

“어린 시절에 많이 했었는데, 아직도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간만에 해 보고 싶은데, 같이 가 주지 않겠습니까?”

같이 가보자는 말이 가달라는 청원으로 바뀌었다. 서진우는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백의현을 올려다보았다. 가고 싶다는 말은 진심인지 백의현의 눈이 처음 보는 기대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럼요……. 같이 가요. 인형도 땁시다.”

그 눈을 보고 어떻게 거절을 하겠는가. 자신이 대리가 아닌 회장이었어도 거절하지 못했을 것이다.

서진우의 대답에 백의현이 활짝 웃었다. 그가 서진우의 손목을 꽉 움켜쥐고 걸음을 옮겼다.

“어엇……! 잠시만요, 손은 놓고…….”

“서진우 씨는 야구 잘합니까? 저는 어린 시절 형과 종종 했습니다. 미국으로 넘어간 이후로는 완전히 잊고 살았는데…… 저걸 보니 갑자기 기억이 나네요.”

백의현이 전에 없이 흥분한 모양새로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으며 걸음을 옮겼다. 발의 움직임이 어찌나 경쾌하던지, 항상 느긋하고 위엄있는 모습만 봐 온 서진우로서는 눈앞의 인물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이렇게도……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그렇게 생각하자 어쩐지 애틋함이 밀려들었다. 그래, 하루 정도는 괜찮다. 언제 또 자신이 백의현과 이렇게 회사 밖에서 함께 다닐 날이 오겠는가.

‘마음고생은 다 반한 내 잘못이지.’

솔직히 말해 백의현은 아무 잘못이 없었다. 감정 단속은 오로지 서진우 자신의 몫이니까. 그러니 오늘 하루만큼은 밀어내지 말고 그냥 어울려 주자.

서진우는 자신이 한 발자국 더 늪으로 걸어 들어갔다는 사실을 반쯤은 자각했으면서도 백의현에게 이끌려 그의 뒤를 따랐다.

……그나저나 여기 영업하는 건 맞겠지.

가까이서 본 가게 꼴은 멀리서 볼 때보다도 훨씬 처참했다. 정말 원래 목적대로 영업 중인 장소가 맞을까? 서진우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백의현과 가게를 번갈아 돌아보았다.

“여기 말고 다른 곳도 있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굳이 다른 곳을 찾아서까지 가는 것도 좀 우스우니까요.”

백의현이 시원하게 인정했다. 다른 곳으로 갈 생각은 없구나. 서진우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유리문에 손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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