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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느니 퇴사하겠습니다, 이사님!-50화 (50/150)

50화

많은 정보가 생략된 문장이었다. 서진우는 아리송해졌다.

“유학을 남 대신 가셨다고요……?”

유학을 가기로 내정되어 있던 학생이 갑자기 못 가게 되어 다음 순위였던 백의현이 대신 갈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인 걸까? 평범하게 말했다면 서진우도 부러워할 만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백의현의 표정을 보니 서진우는 차마 그가 부럽다고 말할 수 없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 빈 접시를 내려다보고 있는 백의현은 어쩐지 침통해 보였다.

“……뭐, 운이 좋았죠.”

잠시 말을 아낀 채 침묵하던 백의현이 쓰게 미소 지었다. 그 표정을 마주하자 이 이상 질문을 하면 안 되겠다는 직감이 일었다. 별 뜻 없이 던진 질문이었는데, 너무 깊은 곳을 건드려 버린 것일까. 서진우는 물컵을 들어 올리며 슬쩍 눈을 돌렸다. 대화를 돌릴 필요가 있었다.

“―뭔가 인지 부조화 오는데요. 이사님이 어린 시절에 논밭을 뛰어다니셨다니.”

서진우가 선택한 것은 농담이었다. 백의현이 의아한 눈으로 서진우를 향해 눈을 돌렸다. 서진우가 뺨을 긁적이며 부러 머쓱하게 웃었다.

“저는 지금까지 이사님이 미국에서 나고 자라신 분인 줄 알았거든요. 그래서 좀 더 무섭다고 생각했나 봐요. 거리감 느껴져서.”

“제가 무섭습니까?”

백의현이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되물었다. 그의 눈빛에 순수한 의문의 빛이 떠올라 서진우는 괜스레 억울해졌다.

“그야…… 이사님은 이사님이고 저는 일개 대리인 걸요. 이력도 화려한 데다 일까지 엄청 잘하시고, 최근 1년간 계약한 해외 브랜드 제휴 건은 전부 이사님이 따 오신 거잖아요. 그래서 회사에 소문이 자자했거든요. 회사에서 엄청 유능한 해외파 인재를 모셔왔다고 하는.”

물론 얼굴마담으로 들어 앉힌 낙하산이라는 소문이 더 거셌지만, 서진우는 그 말을 본인 앞에서 떠들지 않을 정도의 지능은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그 소문이 사실이라고 믿지도 않았다. 그냥 얼굴마담 낙하산이라고 하기에는 백의현의 업무 강도가 지나치게 높았으므로. 그래서 서진우는 쓸데없는 말을 덧붙이는 대신 그냥 헤설피 웃었다.

“그런 대단한 분이 어린 시절에는 논밭에서 개구리와 잠자리를 잡았다는 게 신기하고 재미있어요.”

“…….”

백의현이 움직이던 손을 멈추었다. 그가 입을 다물고 말없이 서진우를 응시했다. 이크, 너무 바보같이 웃었다. 무표정한 얼굴에 괜스레 찔려 웃음을 거둔 서진우가 어색하게 제 뺨을 매만졌다. 말을 돌리려 한 거지만 괜한 이야기를 했나, 미약한 자괴감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을 때쯤이었다.

“저는 서진우 씨가 훨씬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나긋한 목소리가 차분하게 테이블을 건넜다. 서진우는 손바닥으로 뺨을 누른 채 멍하니 눈을 들었다. 백의현이 등받이에 편안하게 등을 기대며 양손으로 깍지를 꼈다.

“돌려 말하려고 애써 준 건 고맙지만, 나도 나에게 붙은 소문 정도는 압니다. 그룹 이미지 혁신을 위한 얼굴마담 낙하산. ―뭐, 완벽히 맞는 문장은 아니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니죠. 낙하산이 맞으니까요.”

“진짜 낙하산이셨다고요?”

서진우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백의현의 입가에 특유의 오만한 웃음이 걸렸다. 비웃음 같기도, 장난스러워 보이기도 하는 미소를 띤 채 그가 말을 이었다.

“황운열 회장이 제 할아버지라고 하면 믿으실 겁니까?”

“네?”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엄청난 질문에 서진우의 사고가 멎었다. 황운열 회장. 그는 YK그룹의 창립자이자 현 회장이었다. YK푸드뿐 아니라 모든 YK 계열사를 아우르는 거대 기업가로 TV 뉴스나 신문에서 쉽게 이름을 접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요, 대한민국 10대 재벌가 중 한 가문의 수장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백의현의 할아버지라고? 하지만 성이 다른데 어떻게?

“……외가인가요?”

서진우가 긴가민가하며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하지만 황 회장에게는 딸이 없지 않나……? 대학생 시절 기업을 연구했던 기억을 필사적으로 더듬으며 머리를 굴리는데, 별안간 맞은편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사님?”

서진우는 놀라 입을 벌렸다. 백의현이 입을 벌려 웃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도 웃기는지 고개까지 젖혀가며 웃는 모습은…… 무척이나 생경했다. 서진우의 가슴에 당황스러움과 뒤섞인 이상한 감정이 차올랐다. 말로 형용할 수 없이 정의를 내리기 어려운, 혼란스러운 감정이 쾌활한 웃음소리를 타고 둥실둥실 떠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하하, 그렇게 되묻는 사람은 서진우 씨가 처음입니다.”

간신히 웃음을 멈춘 백의현이 손으로 눈가를 닦아내며 대답했다. 여전히 목소리에 웃음이 고여 있었다. 서진우는 뒤늦게 찾아온 민망함에 귓불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두 손을 모아 쥐었다.

“혹시 제가…… 무슨 이상한 말이라도……?”

외가냐고 물어본 게 그렇게 이상한 말이었을까. 어색해하는 서진우를 바라보던 백의현이 이내 피식 웃으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면 대개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거짓말이라고 의심하거나, 사생아냐며 호기심을 가지거나.”

“……아.”

“하지만 그렇죠, 황운열 회장이 평범한 노인이었다면 성이 다르니 외조부인지 묻는 반응이 정상인 거겠죠.”

백의현의 표정이 부드러웠다. 서진우는 민망함에 제 엄지를 서로 문질렀다. 하기야, 황 회장이 보통 사람도 아니고 재벌가의 수장인데 갑자기 가족관계를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의심하는 게 보통일 만도 했다.

‘하지만 닮았는데…….’

서진우는 흘긋 백의현을 곁눈질했다. 생김새가 닮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분명 비슷한 데가 있었다. 회사에서 만나는 백의현에게서는 쉬이 거스르기 어려운 위압감이 느껴졌다. 비록 TV나 인터넷 영상으로 접한 것이 전부였지만, 황 회장에게도 그러한 위압감이 있었다. 괜히 온 언론이 그에 대해 이야기할 때 제왕이 어떠니 카리스마가 어떠니 하는 수식어를 붙여 대겠는가. 그러니 갑자기 황 회장이 할아버지니 하는 뜬금없는 소리를 들었을 때도 별반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아까 한 말은 농담입니다.”

“네?”

그래서 백의현이 갑자기 제가 던진 말을 수습했을 때 서진우는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당연히 혈연관계라고 생각했는데. 혼란스러워하는 서진우를 보며 백의현이 두 팔을 테이블 위에 올려 상체를 기대었다.

“황운열 회장은 제 할아버지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사람과 제가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맞습니다. 실제로 YK푸드에 입사한 것도 황운열 회장의 입김이 작용했으니, 결과적으로 저는 황운열 회장의 낙하산인 셈이죠. 그러니 소문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마도 비밀일 것이 분명한, 중대한 이야기를 일개 대리에게 털어놓은 백의현이 홀가분한 표정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서진우는 그가 편안한 자세로 등받이에 등을 기대는 것을 보며 금붕어처럼 입술만 벙긋댔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걸까. 그렇군요, 인맥이 대단하십니다? 역시 낙하산이었구나, 멋지십니다?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황망해하는 서진우를 보던 백의현이 피식 웃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러니까 서진우 씨가 나 같은 낙하산보다 훨씬 정당하게 살고 있다는 겁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백의현이 던진 폭탄 발언의 여파 탓에 사소하게 나누었던 자신의 이야기를 깜박 잊었다. 서진우는 어색한 표정으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백의현이 그런 서진우를 보며 미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서진우 씨는 대단한 사람이 맞습니다. 아까 교수님과 이야기를 나눠 보니, 4년 동안 장학금을 놓친 법이 없는 수재였다던데요.”

“잘못 들으셨는데요…….”

3, 4학년은 장학금을 다니며 학교에 다녔다. 하지만 2학년 때까지는 서진우도 평범하게 노는 것을 좋아했던 대학생일 뿐이었다. 아무래도 교수가 백의현에 등장에 고무되어 괜히 과장된 무용담을 들려준 모양이었다. 민망함에 목이 어깨 사이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서진우가 몸을 움츠리며 설명을 덧붙이자 백의현이 물잔을 집어 들며 평온하게 대꾸했다.

“그렇다고 해도 대단합니다. 졸업만 간신히 하는 사람도 부지기수인데, 가장 바쁠 고학년 시기에 장학금도 놓치지 않은 데다 취업까지 바로 성공했잖습니까.”

“……그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누구나 다 할 수 있다는 식으로 스스로를 낮추지 마세요.”

잔에 고여 있던 물을 비워낸 백의현이 컵을 내려놓으며 서진우의 말을 잘랐다. 그의 까만 눈동자가 반짝였다.

“서진우 씨의 이력서를 보았습니다. 봉사활동에, 아르바이트에. 치열하게 살아온 흔적이 종이 한 장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더군요. 누구나 다 서진우 씨처럼 열심히 살아왔다면, 서진우 씨의 이력서가 어떻게 인사부의 눈에 띄었겠습니까? 서진우 씨는 너무 쉽게 자신을 깎아내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가지세요. 서진우 씨는 충분히 잘 해나가고 있습니다.”

백의현의 음성은 진중했고, 어딘가 딱딱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서진우는 백의현이 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했다.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서진우가 눈을 내리며 중얼거렸다. 백의현의 말은 이상했다. 봉사활동, 아르바이트, 학업, 장학금, 취업. 서진우는 자신이 열심히 살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고작 이런 일을 해낸다고 해서 스스로가 대단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정도는 누구나 다 해나가는 일들이 아닌가. 그는 자신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해나가는 것이 누군가에게 칭찬을 받을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나뿐인 아들을 지극히 아끼고 사랑하는 부모조차도 서진우에게 잘하고 있다는 말을 해준 적이 없었다. 그것은 그저 자랑스러운 아들이 당연히 해낼 수 있어야 하는 일이었으므로. 그건 반드시 부모에게만 국한된 말도 아니었다. 친구도, 동료도 서진우의 일상을 대단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건 어른이면 당연히 해나가는 일이어야 하니까.

그래서 백의현이 건넨 말이 이상했다. 그런 뻔하고도 다정한 격려를 들어 본 적이 없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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