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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느니 퇴사하겠습니다, 이사님!-49화 (49/150)

49화

‘데이트’.

백의현이 선택한 단어의 충격이 준 여파는 대단했다.

서진우는 간만에 반차를 사용한 김에 집에서 뒹굴거리며 밤새 드라마나 보려던 계획을 침착하게 접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몸이 제 의지를 배반하는데 머리가 생각을 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할 일 없으면 학교 주변 구경 좀 시켜 주시죠. 저는 잘 모르니까.’

백의현은 서진우가 멍해진 틈을 놓치지 않았다. 덕분에 서진우는 거절할 틈을 놓쳤고, 그 결과 그는 지금 대학생들이 바글거리는 분식집 한구석에 앉아 있었다. 그것도 맞은편에 정장을 갖춰 입은 채 앉은 상사를 두고.

누가 봐도 직장인으로 보이는 정장 차림의 두 사내는 자연히 주변의 이목을 끌었다. 서진우는 뒤통수로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며 침음을 삼켰다.

‘등이 따끔거린다…….’

그냥 정장 차림의 남자 둘이 분식집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위화감이 들 텐데, 심지어 백의현은 외모까지 문제였다. 잘생긴 것이 문제라는 뜻이 아니라, 누가 봐도 이런 추레한 가게에 다닐 것 같지 않은 우아함과 위압감이 문제였다.

이게 다 눈앞의 망할 헤테로가 아무 말이나 해서 그렇다. 서진우는 속으로 백의현을 원망했다. 데이트라니, 그런 단어는 친구끼리도 사용하지 않는 게 정상 아닌가? 비록 백의현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게 친해졌다는 뜻은 아닌데, 데이트는 무슨 데이트란 말인가. 아니면 혹시 미국에서는 동성과 약속을 잡을 때도 거리낌 없이 데이트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걸까? 자신이 한국은커녕 경기권 바깥도 벗어나 본 적 없는 무지렁이 수도권 촌놈이라 모를 뿐인 것일까?

“하하, 그럴 리가 없지.”

“뭐가 말입니까?”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속으로 웃는다는 게 그만 말로 해 버린 모양이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백의현의 질문에 퍼뜩 정신을 차린 서진우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잠시 이상하다는 듯 서진우를 바라보던 백의현이 손바닥만 한 크기로 접힌 짙은 초록색 천을 내밀었다.

“앞치마 두르세요.”

“아, 넵.”

이상하다. 그냥 모든 게 다 이상하다……. 혼란스러워하는 서진우와는 달리 백의현은 야무지게 앞치마를 두르고 젓가락을 꺼내 접시와 함께 각자의 앞에 놓았다. 백의현의 행동이 어찌나 능숙하던지 서진우는 그가 테이블 세팅을 하는 동안 종이컵에 물만 겨우 따를 수 있었다. 이런 곳에 어울리지 않는 외양과는 달리 직접 상을 차리는 게 제법 익숙해 보이는 동작이었다. 서진우는 백의현의 앞에 종이컵을 놓으며 슬쩍 그의 눈치를 살폈다.

“……떡볶이 좋아하시나 봐요.”

“아, 네. 좋아합니다. 서진우 씨도 앞치마 하시죠. 셔츠 상합니다.”

백의현이 물잔을 받아들며 웃었다. 서진우가 순순히 앞치마를 두르는 동안, 그는 이제 벽면에 빼곡하게 쓰인 낙서를 둘러보고 있었다. 서진우가 학교에 다니던 시절부터 이미 더러웠던 벽에는 십여 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 백의현은 그 무의미한 낙서를 읽으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분위기가 좋네요, 학창 시절 생각이 납니다.”

그리움이 묻어나는 시선이 작은 가게를 꼼꼼히 훑었다. 서진우는 어쩐지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이토록 풀어진 백의현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이전까지는 조금 집요하고 매서운, 능력은 확실하지만 딱딱한 이사 정도로 여겼었는데.

“아이고, 오래 기다렸지. 여기 떡볶이 나왔습니다아.”

“감사합니다.”

호들갑스러운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상념을 깨트렸다. 서진우는 좁은 테이블 사이를 능란하게 파고드는 아주머니의 기백에 밀려 벽으로 상체를 붙였다. 아주머니가 전골냄비를 버너 위에 올려두며 호호 웃었다.

“두 사람 다 여기 학교 졸업생들인가? 인물이 훤칠하네그려. 역시 명문대 출신은 달라.”

“하하, 칭찬 감사합니다.”

“많이들 드시고, 부족하면 말해요. 다 익은 거니까 떡 말랑해지면 바로 먹으면 돼.”

아주머니가 앞치마에 손을 문질러 닦으며 몸을 돌렸다. 서진우는 버너 위에 얹어진 전골냄비를 보며 미간을 긁적였다. 떡볶이 재료가 한가득 담긴 냄비는 언뜻 봐도 푸짐했기에 절대 부족할 일은 없어 보였다.

“요즘은 떡이 이런 식으로 나오는군요.”

능숙하게 버너에 불을 붙인 백의현이 집게와 가위를 집어 들었다. 서진우는 당황해 백의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제, 제가 하겠습니다, 이사님.”

“옷에 튑니다. 가만히 있으세요.”

아니, 누가 봐도 이사님 옷이 백 배는 더 비싸 보이는데요.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백 배는 더 비싸 보이는 슈트 차림인 주제에, 집게로 길쭉한 떡을 집어 든 백의현은 서진우의 만류를 칼같이 끊어냈다. 어이가 없어진 서진우가 다시 손을 내밀었다.

“제가…….”

“제가 합니다.”

또 한 번 가로막혔다. 백의현은 서진우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떡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연구원인 줄 알겠다. 서진우는 어쩐지 맥이 빠져 손을 거두었다. 슬쩍 눈을 굴려 서진우가 포기했음을 확인한 백의현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래, 될 대로 돼라. 여기가 회사도 아니고, 업무 시간도 아닌데 이사가 떡 좀 자를 수도 있지 뭐.’

서진우는 사회생활에 찌든 회사원의 자아가 자꾸만 들이미는 죄책감을 힘겹게 무시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백의현은 신중하게 떡을 자르는 중이었다. 서진우는 심드렁하게 팔을 테이블에 올리고 손바닥으로 턱을 괸 채 백의현이 떡을 자르는 모습을 구경했다. 그나저나 무슨 떡을 이렇게 오래 자른담.

“?”

툭, 툭. 검지 정도의 일정한 크기로 재단된 떡이 냄비 속으로 느리게 떨어졌다. 멍하니 눈앞의 광경을 응시하던 서진우가 눈을 깜박였다. 백의현은 말 그대로 떡의 길이를 재고 있었다. 그는 가위 날로 떡의 길이를 계산한 후, 자르는 행동을 반복 중이었다. 서진우는 어안이 벙벙해져 고개를 들었다. 서진우의 황당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떡을 재단 중인 백의현의 표정은 심각했다.

“―푸핫.”

반사적으로 웃음이 터졌다. 서진우의 웃음소리를 들은 백의현이 눈을 들어 올렸다.

“무슨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렇게 묻는 목소리는 진중하고 나긋했다. 한 손에는 떡을 쥔 집게, 다른 손에는 가위를 들고서 저런 엄중한 음성이라니. 서진우는 혀를 깨물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죄송, 큭, 합니다. 떡볶이를…… 그렇게 열심히, 자르는 사람은, 처음, 풋, 봐서, 하하!”

한 번 터져 나온 웃음이 가라앉지 않아서 서진우는 고개를 숙였다. 백의현은 얼굴을 가린 채 어깨를 떨며 웃는 서진우를 보며 조금 당황한 듯 제 손을 돌아보았다. 이윽고 그가 비장하게 대답했다.

“……더 빨리 잘라보겠습니다.”

“하핫, 하하하!”

잠시 멈췄던 서걱거리는 가위 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서진우는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어 버렸다.

***

백의현의 정성이 듬뿍 담긴 떡볶이가 완성되었다. 서진우는 백의현이 첫술을 드는 모습을 조마조마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맛있군요.”

국물을 맛본 백의현이 산뜻하게 평가했다.

“기본 고추장과 설탕뿐 아니라 과일 베이스가 들어간 모양이군요. 매실인가요? 맵고, 짜고, 달고. 자극적이고 평범한 맛일 뻔한 것을 상큼함이 적절하게 끼어들어 독특한 풍미를 줍니다.”

과연 식품 회사 이사다운 평이었다. 서진우는 그제야 안심해 어깨를 늘어뜨리며 환히 웃었다.

“그쵸? 여기가 학교 학생들만 아는 맛집이에요. 시험 기간에는 사람이 많아서 줄을 서야 할 정도라니까요. 맛있는데 가격도 저렴해서.”

서진우 또한 줄을 서서 먹는 학생 중 한 명이었다. 서진우의 말에 백의현이 그럴 법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이사님도 떡볶이 자주 드시는 편인가요?”

떡을 입안에 밀어 넣던 서진우가 문득 질문을 던졌다. 조금 전 백의현이 떡볶이를 좋아한다고 말했던 것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떡볶이 유행은 잘 따라잡지 못한 것 같은데. 길쭉한 떡을 자르는 데 오 분이나 쓰는 건 떡볶이를 좋아하는 사람이 할 만한 행동은 아니지 않은가.

“지금은 아무래도 먹을 기회가 별로 없지만, 학창 시절에는 저도 떡볶이를 가장 많이 먹었습니다.”

백의현이 서진우의 의문을 알아차린 듯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의 앞에 높인 접시가 벌써  비어가는 중이었다. 맛있다는 말은 정말인가 보군. 서진우는 속으로 흐뭇해하며 백의현의 말을 경청했다.

“이사님은 해외파라고 알고 있었는데…… 그럼 고등학교는 한국에서 나오신 건가요?”

“네. 아까 잠깐 이야기했듯 미국으로 건너간 건 스물네 살 때 일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딱히 해외파라고 할 수도 없겠군요.”

백의현이 떡을 정갈하게 들어 올려 우아하게 입안에 밀어 넣었다. 그가 먹는 것이 떡볶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의 귀족적인 움직임이었다. 누가 봐도 선천적으로 해외에서 나고 자란 사람 같은데……. 서진우가 의심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똑같은 땅에서 나고 똑같은 쌀을 먹으면서 자랐다면, 백의현은 저리도 흠 하나 없이 무결한 모습을 한 반면 자신은 맛집이라는 말에 분식집부터 떠올리는 소시민이라는 차이는 대체 어디에서 오는 걸까.

‘역시 재력인가…….’

괜스레 마음이 쓸쓸해졌다. 서진우는 입맛을 쩝 다시며 떡볶이를 우적우적 씹어 넘겼다. 별스러운 박탈감이야 어쨌든 음식에는 죄가 없는 법이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당진에서 살았습니다.”

서진우의 생각을 알 리 없는 백의현이 불쑥 이야기했다. 서진우는 움직이던 턱을 멈추고 눈을 들었다. 백의현이 물을 홀짝였다.

“외할머니가 혼자 사셔서, 어머니가 일찍 결혼하시고 아버지와 함께 귀농을 했거든요. 그래서 저도 시골에서 뛰어놀면서 살았습니다. 그때는 떡볶이 같은 건 정말 원 없이 먹었죠. 학교 앞에 분식집이 많았거든요.”

문득 그립다는 듯 그의 눈매가 휘어졌다. 허공을 응시하는 시선은 기억 너머 어린 시절을 보고 있는 듯했다. 그가 생각났다는 듯 서진우를 향해 눈을 돌렸다.

“어릴 때는 잠자리 잡고 노는 걸 좋아했었는데, 서진우 씨도 해본 적 있습니까?”

“잠자리요? ―아, 그러고 보니 저도 잡아본 적 있는 것 같네요.”

조금 놀라 눈을 둥글게 떴던 서진우가 이윽고 뇌리 한구석에 갇혀 있었던 기억의 파편을 떠올리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고 보니 아주 어렸을 때는 학교 뒤뜰 같은 곳에서 잠자리나 나비, 커다란 벌레 같은 것들을 잡고 놀았던 기억이 있었다. 백의현이 빙긋 웃었다.

“저는 그 짓을 중학생 때까지 했습니다. 지금이야 잠자리가 씨가 말라서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제가 살던 곳은 워낙 시골이라 여치나 귀뚜라미, 사마귀 같은 곤충들이 흔하게 널려 있었거든요. 그러고 보니 논밭에서 개구리를 잡겠다고 뛰어다니다 이웃집 아주머니에게 크게 혼이 난 적도 있었군요.”

백의현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서진우는 눈을 깜박였다. 그는 도시에서 나고 자랐던 터라 실제 논밭은 명절 때 시골을 오가며 차 너머로 본 것이 다였다. 그래서인지 백의현의 이야기는 묘하게 현실감이 동떨어진 느낌이었다. 눈앞의 고급 슈트 차림의 사내가 어린 시절에는 논밭을 뒹굴었다니,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미국에는 어쩌다 가신 거예요?”

이런 걸 물어도 되는 걸까 싶었지만 호기심이 조심성을 앞질렀다. 서진우의 말에 백의현이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말을 고르듯 음, 하고 목을 울렸다.

“……원래 가기로 한 사람이 있었는데 문제가 있어, 제가 대신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대학 졸업 전에 급하게 떠났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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