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반차를 쓴 덕에 회사로 다시 돌아갈 필요가 없어 다행이었다. 서진우는 쏟아지는 햇빛을 피하려 손으로 차양을 만들었다. 푸르게 빛나는 너른 잔디가 시야를 가득 메웠다.
‘학교에서 담배 피워도 되나…….’
서진우가 학교를 다닐 때는 금연 구역과 흡연 구역의 경계가 모호했다지만 지금은 자신이 학생인 것도 아니고 학교 규정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근방에 흡연 구역이 있을 법한데, 생각하며 서진우가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였다.
“서진우 씨.”
멀리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서진우는 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보았고, 건물 뒤편 그늘에 숨어 제게로 손짓하는 백의현을 발견했다.
“이사님, 가신 거 아니었어요?”
서진우가 백의현에게로 가까이 다가가며 물었다. 자신과 생각이 같았던 듯, 백의현의 손에는 타들어 가는 담배가 들려 있었다.
“아, 서진우 씨가 바쁜 것 같아서 먼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를 기다리셨다고요?”
서진우가 어리둥절해하며 되물었다. 백의현은 대답하는 대신 씩 웃으며 서진우에게 턱짓했다.
“여기 흡연 구역입니다.”
“아.”
서진우는 그제야 자신의 목적을 상기하고 품 안에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 한 대를 빼 물고 라이터를 찾아 품속 주머니 여기저기를 뒤적이고 있노라니 백의현이 불쑥 제 라이터를 내밀었다.
“여기, 불.”
“……아, 네. 감사합니다.”
보통 담배와 라이터를 같이 넣어 놓는데, 오늘은 강의를 하느라 잠깐 정신을 놓은 사이 두 개를 분리해 둔 모양이었다. 아마 자신의 라이터는 가방 한구석에서 굴러다니고 있을 가능성이 컸지만, 서진우는 구태여 라이터를 꺼내는 대신 백의현이 내민 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작게 치익, 하는 소리가 나며 금세 마른 끄트머리에 불이 옮겨붙었다.
“……이사님 정말 이 학교 나오셨어요?”
한 모금을 빨아들였다 뱉어낸 후, 서진우는 마침내 내내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곁에 서서 제 몫의 담배를 태우고 있던 백의현이 심상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네. 2학년까지 다니고, 3학년 1학기 중간에 그만뒀습니다.”
서진우는 머리를 굴려 백의현의 나이를 계산해 보았다. 만일 그가 군대에 가지 않은 채로 학교에 다녔다면 자신과 시기가 겹치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 그럼 서진우가 몰랐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우리 같이 수업 들은 적도 있는데.”
백의현의 다음 말이 서진우의 계산을 흐트러뜨렸다. 서진우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떨어뜨릴 뻔했다. 그가 눈을 끔벅이며 고개를 들어 올리자, 서진우를 돌아보고 있던 백의현이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진짜 몰랐습니까? 난 기억하는데.”
“……진짜, 로요?”
서진우가 어물어물 되물었다. 이렇게 훤칠하고 잘생긴 사람을 몰랐을 리 없는데. 아무리 도중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해도 백의현을 아는 사람이 분명 있었을 것이고, 서진우도 분명 그의 얼굴을 기억 못 할 리 없었다. 당황한 듯한 서진우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백의현이 담배를 꺼트렸다.
“9년 전쯤이던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과목. 같이 들었습니다.”
“그 수업에 계셨다고요?!”
서진우가 놀라 되물었다. 백의현이 말한 강의는 전면 토론 수업으로, 매주 개인 발표와 조별 발표를 해야 했던 기억이 있었다. 즉 웬만하면 모두가 한 번씩 같은 수업을 듣는 사람들 앞에 서서 이야기를 해야 했다는 뜻이다. 그런 강의를 함께 들었는데 백의현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아무리 십 년 전 이야기라지만 어렴풋하게나마 떠오르지 않는 건 이상했다. 아리송해하는 서진우를 곁눈질로 돌아보며 백의현이 씩 웃었다.
“네. 비록 수업 세 번 듣고 바로 미국으로 가는 바람에 직접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지만.”
“아.”
그렇다면 이해가 갔다. 서진우는 눈을 내리깔고 손가락 사이에 끼운 담배를 굴렸다. 피어오른 연기가 허공에 흩어졌다.
두 사람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잠시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백의현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때도 인상 깊었습니다, 서진우 씨는. 네댓 살은 더 많은 선배에게도 져 주는 법 없이 당당하게 본인 의견을 피력하는 모습이 뇌리에 오래 남았죠.”
“아…….”
비록 백의현을 기억해내지는 못했지만, 서진우는 그가 말하는 ‘인상 깊은 모습’을 금세 떠올려낼 수 있었다. 스물한 살, 삼월에 있었던 일이었다. 운 나쁘게 강의에서 첫 발표를 맡게 되었다. 개강한 지 3주 만에 개인 발표라니, 대학은 무시무시한 곳이다 따위의 생각을 하며 반쯤 울다시피 준비를 했다. 안 그래도 전공 필수 과목이었던지라 자신처럼 2학년인 학생보다 재수강을 하는 고학번 선배가 훨씬 많았던 수업이었다.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혈안이 된 이들은 날카롭고 공격적이었다. 홀로 그 질문들을 하나하나 답변하며 얼마나 진땀을 흘렸던가.
“그, 있었잖아요. 오탈자 하나까지 아득바득 짚어내면서 어떻게든 흠잡으려고 했던 사람.”
백의현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피식 웃었다. 서진우는 그제야 백의현이 어떤 순간을 이야기하는지 정확히 알아차렸다. 딱 한 명, 개중에서도 어떻게든 흠집을 내고 싶어 안달이 난 것 같은 선배가 하나 있었다. 오죽하면 교수가 중간에 두 사람의 대화를 가로막았을 정도로 그는 서진우를 몰아붙여 댔다. 서진우로서는 자신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이렇게까지 꼬리를 물고 늘어지나 궁금해질 정도의 집착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서진우가 이겼다. 꼬리를 잡는 데에 혈안이 된 선배는 자신의 논리가 순환 중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서진우가 그 지점을 파고들어 무의미한 토론을 끝냈다. 정확히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 순간 느꼈던 해냈다는 성취감과 통쾌했던 기분만큼은 또렷했다.
“그때 서진우 씨가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타인의 의견에 반박하기 위해서라도 스스로의 논점 오류를 극복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였던가요.”
그런데 서진우도 잊고 있던 말을 백의현이 기억하고 있었다. 서진우는 놀라 눈을 깜박였다. 백의현이 서진우를 곁눈질하며 미소 지었다.
“멋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분이 이상했다. 서진우는 부끄러움과 뿌듯함, 그리고 기이한 친근감을 느끼며 백의현을 마주 보았다. 항상 함께 일을 해도 아득히 먼 사람처럼 느껴졌던 사람이 갑자기 가깝게 느껴졌다.
“……그렇게까지, 상세하게 기억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저는 이사님이…… 같은 수업을 들었다는 사실도 몰랐는데.”
어쩐지 목덜미가 달아올라 중얼거리던 서진우가 퍼뜩 눈을 동그랗게 떴다. 프로젝트 시작 전 이사실에서 백의현이 던졌던 아리송한 질문이 떠올랐다.
“그럼 그때, 나 모르냐고 물어보셨던 게…….”
서진우의 질문에 백의현이 고개를 돌렸다.
“그걸 이제야 알았습니까?”
피식 웃는 얼굴 옆선을 따라 맑은 햇살이 드리웠다. 서진우는 순간 강렬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지금 눈에 담은 옆얼굴이 뇌리에 강하게 새겨졌음을. 그렇기에 이번에는 잊기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
털어내는 것을 잊는 바람에 담뱃재가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오늘 알게 된 의외의 사실이 놀라워서 넋을 놓아 버린 까닭이었다. 서진우는 당황해 발로 재를 문질러 털어낸 후 꽁초를 쓰레기통에 비벼 껐다.
“그럼 이제 뭐 합니까?”
꽁초를 버리고 접어 두었던 소매를 정리하고 있노라니 백의현의 가벼운 질문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서진우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허둥지둥 대답했다.
“아, 집에 갑니다.”
“기껏 여기까지 나왔는데?”
백의현의 목소리는 여전히 나긋했다. 아무 생각 없이 대답하려던 서진우는 움찔 몸을 굳혔다. ‘기껏 나왔는데’……? 그 말에 담긴 뉘앙스가 이상했다. 마치 뭐라도 해야 한다는 것 같지 않은가.
“예……?”
서진우가 미심쩍어하며 되물었다. 백의현은 어느새 그늘을 벗어나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부시는지 한 손으로 차양을 만든 그가 시선을 하늘에 고정한 채 태평하게 말을 이었다.
“금요일이고, 날도 좋은데.”
까만 동공이 서진우를 향해 데굴 굴렀다. 그가 매끈한 눈매를 접었다.
“데이트나 하죠.”
“네?”
뭘 하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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