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4년여 만에 찾은 모교는 변한 듯 변한 것이 없어 보였다. 서진우는 희미한 향수를 느끼며 강당을 둘러보았다. 과거에는 학생으로 앉아 수업을 듣던 공간이었는데, 막상 강단에 서 보니 느낌이 전혀 달랐다.
“여기가 이렇게 넓었었나…….”
빈 의자를 바라보며 소회를 느끼고 있노라니, 지난번 이해신의 결혼식 하객으로 만났던 선배가 헐레벌떡 문을 열고 들어와 서진우를 반겼다.
“어, 진우 왔어? 미안, 내가 늦었다. 발표 자료는 어디다 들고 왔어? 메일에 첨부했나?”
“아, 혹시 몰라서 USB에 담아 왔어요.”
“잘했다, 잘했어. 요즘 학교 네트워크 상태가 영 별로라서 말이야. 교수님께 인사는 드렸지?”
“네. 교수님은 잠깐 들를 곳이 있으시다고 해서 먼저 내려왔어요.”
“좋아, 좋아.”
강단 위에 뛰어오른 선배가 두 손을 쉴 새 없이 비벼 대며 초조하게 주위를 점검했다.
“강의 시작 전까지는 저기 맨 앞줄 구석에 앉아서 기다리면 되고, 교수님이 들어와서 너 소개하면 그때 나와서 시작하면 돼. 마이크는 단상에 올려 둔 거 쓰면 되고, 노트북 세팅해줄 테니까 파일은 이따 거기에 옮겨 놓고. 그리고 혹시 또 필요한 건…… 없지? 있으면 바로 말하고.”
“알겠으니 숨 좀 쉬고 말씀하세요, 선배.”
서진우가 눈썹을 휘며 웃었다. 그 말에 선배가 어깨를 늘어뜨리며 울상을 했다.
“박사 논문에 강사 일도 바빠 죽겠는데 이 나이 먹고 교수님 조교 일까지 해야 하니…… 삶이 참 녹록지가 않다, 진우야.”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대학원은 무슨, 나도 취업이나 할 걸.”
“……그, 힘내세요.”
취업한다고 딱히 삶이 녹록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서진우는 반박하는 대신 선배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눈앞에서 죽어가는 사람에게 굳이 자신도 힘들다는 어필을 해서 무안을 줄 필요는 없었다.
노트북에 강의 자료를 세팅해 둔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학생들이 한두 명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강당이 언제 비어 있었냐는 듯 가득 찼다. 서진우는 손바닥으로 제 가슴을 누르고 조심스레 심호흡을 했다. 발표야 대학 시절에도 원 없이 했고, 회사에 들어와서도 수십 번은 해 왔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 선 적은 처음인지라 긴장이 되었다. 갑자기 머리가 새하얘져서 아무 말도 못 하면 어떡하지. 막연히 불안한 상상에 빠져들 때쯤, 강의를 맡은 교수가 앞문을 통해 모습을 나타냈다.
“서진우 군.”
“교수님, 안녕하셨……?!”
인사하려 반갑게 자리에서 일어선 서진우는 채 말을 끝맺지 못하고 얼어붙어 버렸다. 교수 뒤를 따라 들어온 훤칠한 사내의 얼굴이 지나치게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서진우의 경악한 표정을 발견한 교수가 허허, 소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표정이 왜 그런가. 학교에서 회사 사람을 만나서 놀란 게야?”
너무도 당연한 질문이었다. 서진우는 교수에게 대답하는 대신 그의 등 뒤에 선 사내를 올려다보며 멀거니 중얼거렸다.
“……백, 이사님이 여긴 어떻게…….”
“오전에 이 근처에서 볼일이 있어서요, 나온 김에 서진우 씨가 강의를 한다고 했던 게 생각나서 잠시 들렀습니다.”
백의현이 싱긋 웃으며 매끄럽게 대답했다. 나긋한 저음이 가볍게 주위를 울렸다. 서진우는 근처에 앉은 학생 몇 명이 백의현을 흘끔거리는 모습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기대한다는 게 이런 의미였어?
“그, 렇군요. 그런데 대학 강의……에 학생이 아닌 분이 참석해도 되는 건지 잘 모르겠네요.”
서진우는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며 교수를 향해 웃었다. 아무 관계도 없는 외부인이 이렇게 쉽게 강의실에 들어와도 되냐는 말을 돌려 한 것이었으나, 대답을 한 이는 이번에도 백의현이었다.
“뭐 어떻습니까, 저도 이 학교 출신인데.”
“네?!”
이번에는 정말로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진우는 깜짝 놀라 입을 벌린 채 백의현을 올려다보았다. 백의현이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졸업은 못 했지만 입학은 했으니까요.”
“허허, 알고 보니 백의현 군이 2학년 때까지 우리 학교에 다녔다지 뭔가.”
교수가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설명을 덧붙였다. 서진우는 할 말을 잃고 눈을 끔벅였다. 백의현이 눈매를 접어 웃었다.
“간만에 학생 기분을 느껴 보고 싶어서 교수님께 요청드렸습니다. 제가 있어도 괜찮겠지요?”
괜찮겠냐고, 당신이라면 괜찮겠냐고?! 서진우는 반박하고 싶었지만 차마 행동으로 옮길 용기를 내지는 못했다. 서진우가 금붕어처럼 입만 벙긋대는 사이, 조교로부터 시간을 전달받은 교수가 강의를 시작해야겠다며 휑하니 두 사람에게서 돌아섰다.
“곧 수업이 시작되겠군요. 앉으시죠.”
백의현이 우아하게 서진우를 빈자리로 이끌었다. 반쯤 끌려가다시피 자리에 앉은 서진우는 제 옆자리에서 길쭉한 다리를 꼬고 앉은 백의현의 구두를 시야 끄트머리에 담으며 혼란에 빠졌다.
‘진짜 백 이사님이 나와 동문이라고? 아니, 그 전에 취업 강의를 임원 앞에서 하는 게 말이 되나?’
서진우의 머리가 복잡해지다 못해 얼굴까지 새하얗게 질려가는 순간에도 강단에 오른 교수는 학생들과 한가로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손바닥으로 서진우를 가리키며 오늘의 강사를 소개했다.
“경영학과 졸업생이자 현재 YK푸드에서 근무 중인 서진우 선배를 소개할게요.”
호명과 동시에 서진우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졸업생으로서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고 싶다거나, 첫인사는 어떻게 해야겠다거나 하는 시뮬레이션은 모두 날아간 지 오래였다. 그저 버튼을 눌러서 기동을 시작한 로봇처럼 강단에 오른 서진우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수많은 시선을 마주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바, 반갑습니다. 서진우라고 합니다.”
다행히 없는 시간을 쪼개 가며 미리 준비한 보람이 있었다. 발표 자료를 보며 잡다한 이야기를 두서없이 늘어놓는 동안 서진우는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학생들도 지루해하는 기색 없이 열의에 찬 눈으로 설명을 들어 주었고, 덕분에 서진우는 큰 실수 없이 기획한 발표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그럼 질의는 여기까지 받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추가적으로 서진우 선배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 학생은 수업 종료 후 앞으로 나와서 개별적으로 문의하세요.”
강의가 마무리되자 훌쩍 강단 위로 올라온 교수가 노련하게 수업을 끝냈다. 서진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제가 가져온 자료를 정리했다. 그러는 사이 열정적인 학생 몇 명이 서진우에게로 다가왔다.
“YK푸드 지원하실 때 쓰신 이력서 참고용으로 공유해주실 수 있을까요?”
“이번에 YK산업 특채 최종 면접을 앞두고 있는데요, 어떤 부분을 어필하는 게 좋을까요?”
학생들의 질문은 직설적이고도 절박했다. 서진우는 차분히 한 사람 한 사람의 질문에 답변하며 곁에 모여든 이들을 둘러보았다. 졸업한 지 고작 4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학생들은 자신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자신도 이렇게 희망에 차 있던 시절이 있었는데. 묘한 그리움을 느끼고 있노라니 한 학생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혹시 어떻게 해야 회사 생활을 잘할 수 있을까요? 저는 아싸라서 사회생활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일순 뺨이 경련했다. 서진우는 한 손으로 이마를 매만지며 난처하게 웃었다.
“……음, 글쎄요. 저도 학과 생활을 엄청 열심히 했던 건 아니라서……. 열심히 최선을 다하면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을까요.”
틀에 박힌 대답을 해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안타깝고 미안했다. 하지만 서진우는 정말 그 이상의 대답을 해 줄 수가 없었다. 서진우의 모토는 항상 변한 적이 없었다. 묵묵히 열심히 하면 누군가는 분명 알아줄 것이다. 그 믿음 하나로 여러 부당한 처우를 견디며 사회생활에 임했다.
“……그래도 너무 조용히 열심히만 하지는 말고, 열심히 잘한 일은 티를 내세요. 남한테 너무 공을 돌리는 것도 좋지 않아요. 그리고…….”
조언을 덧붙인 서진우가 문득 눈을 내리깔았다. 어린 시절의 자신처럼 느껴지는 이 학생에게 한 마디라도 더 도움이 되는 말을 해 주고 싶었다.
“……혼자서 모든 걸 다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주변 사람들과 친해지려고 조금이라도 노력한다면, 회사에서도 좋은 사람들과 함께 일할 수 있을 거예요.”
세상에 그냥 이루어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말하지 않으면 공이 묻히고, 다가가지 않으면 고립되기에 십상이었다.
서진우의 말에 질문을 던졌던 학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서진우는 자신의 말이 그 학생에게 도움이 되었기를 바랐다. 너무 뻔한 말을 들었다고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서진우가 과거의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이런 뻔한 이야기가 전부였다.
마침내 학생들의 개별 질문도 모두 끝이 나자 강당은 처음 왔을 때처럼 금세 텅 비어 버렸다. 백의현도 그새 어디로 갔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서진우는 제 짐을 챙긴 뒤 선배와 교수에게 인사를 했다.
“고마워, 진우야. 덕분에 살았다, 진짜. 밥 살게, 시간 한번 맞춰 보자.”
“선배 시간에 맞춰요. 교수님, 전 가보겠습니다.”
한 시간밖에 흐르지 않았으나 그새 또 한 줌 말라 버린 것 같은 선배를 달랜 후 교수에게로 돌아서자, 문 근처에 서 있던 교수가 빙긋 웃었다.
“수고했어. 역시나 열심히 하던 학생다운 발표였다네. 후배들한테도 큰 힘이 되었을 거야.”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뻔한 인사치레라는 것을 알면서도 괜히 귓불이 달아올랐다. 멋쩍게 고개를 숙이며 목덜미를 긁적이는 서진우를 보며 교수가 고개를 내저었다.
“내 학생이 사회에서 멋지게 제 몫을 해내고 있는 모습을 보는 건 언제나 보람차고 즐거운 일이지. 백의현 군도 어찌나 자네 칭찬을 했는지 몰라.”
“……이사님이 제 칭찬을요?”
“그래. 아주 입이 마르도록 자네 이야기를 하던걸. 회사에서도 알아주는 인재라면서 말이야.”
내년에도 시간이 된다면 꼭 강단에 서 주길 바라네. 마지막 인사를 남긴 교수가 조교인 선배와 함께 돌아섰다. 그들을 따라 밖으로 나온 서진우는 복도에 홀로 남아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백의현이 교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이 어쩐지 이상하게 느껴졌다.
“……빈말이라도 좋긴 하네.”
멋쩍으면서도 조금 기뻤다. 서진우는 목덜미를 긁적이며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열이 오른 피부가 뜨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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