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백 이사님.”
“서진우 대리, 여수정 씨.”
먼저 자리한 팀의 보고서를 훑고 있었던 건지, 손에 든 서류를 가볍게 넘기던 백의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는 척은 그것으로 끝이라는 양 다시 서류로 눈을 돌리는 젊은 임원을 보고 입을 다문 여수정이 서진우를 돌아보았다.
“직원용 자료는 제가 돌릴게요.”
서진우에게 속삭인 여수정이 곧장 빈 좌석을 찾아 돌아다니며 프린트물을 올리기 시작했다. 서진우는 손에 들고 있던 임원 배부용 보고서 중 한 권을 조심스레 내밀었다.
“저희 팀 발표 자료입니다.”
“거기 두면 나중에 보겠습니다.”
넵, 그러시겠죠. 서진우는 눈을 내리깔고 보고서를 탁상 위에 내려놓았다. 호감이 생긴 것과는 별개로, 일에 집중 중인 백의현은 여전히 다가가기 어려운 존재였다. 빨리 자료 배부하고 자리에 앉아 있어야겠다. 그렇게 생각한 서진우가 막 걸음을 돌리려 뒤로 물러섰을 때였다.
“서진우 대리는 여수정 씨와 사이가 참 좋군요.”
불쑥 그렇게 말한 백의현이 서류에서 눈을 떼고 슬쩍 턱을 들어 올렸다. 시선이 마주친 서진우가 눈을 깜박였다.
“……네, 친한 편입니다.”
혹시 회의장 앞에서 너무 큰 소리로 수다를 떨었다고 문제 삼으려는 걸까? 백의현이 그럴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모를 일이었다. 긴장으로 등 뒤에 힘이 들어갔다.
“흐음.”
잠시 말없이 서진우를 관찰하듯 바라보던 그가 가볍게 목을 울리며 다시 시선을 내렸다. 뭐지? 서진우는 어리둥절해졌다. 잠시 어쩔 줄을 모르고 손을 꿈질대던 그가 조심스럽게 목을 움츠렸다.
“……그……. 무슨 문제라도…….”
“아닙니다. 직원들끼리 사이가 좋아 보이니…… 보기 좋아서요.”
잔뜩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도 백의현의 대답은 가볍고 태평했다. 그야말로 맥 빠지는 대답에 서진우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 하하, 보기 좋아서요. 넵. 알겠습니다.”
이상한 데서 사람이 실없다. 서진우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몸을 돌렸다. 빨리 준비를 마치고 자리에 앉아서 조금이라도 쉴 생각이었다. 터덜터덜 돌아다니느라 등 뒤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은 까닭에, 서진우는 백의현이 서류 너머로 자신을 빤히 살폈다는 사실을 끝내 깨닫지 못했다.
발표 자료를 미리 올려 두고 빈자리에 앉기 무섭게 다른 임원들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반은 알고 반은 모르는 상사들이 차례로 들어오는 걸 보고 있던 서진우는 마지막에 들어온 이를 발견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황 사장의 뒤를 따라 이사 두어 명과 김 부장이 들어오고 있었다.
‘뭐지, 저 거들먹거리는 태도는?’
잔뜩 어깨를 들어 올린 김 부장은 퍽 기분 좋아 보였다. 그는 시종일관 황 사장에게 말을 걸고 싶어 안달이 난 기색이었는데, 그 작태가 새삼 한심해 보였다. 서진우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며 눈썹을 늘어뜨렸다. 비록 임원 회의에 얼굴을 잘 내비치지 않는다지만 어쨌든 사장이니 황 사장이 회의실에 못 들어올 이유는 없다. 김 부장도 일을 잘하든 못하든 기획개발부의 부장이니 당연히 회의에 참석하리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부서 직원들도 다 보는 자리에서 사장과의 사이를 저토록 과시하고 싶어 할 줄이야.
간신처럼 황 사장 뒤꽁무니를 따르던 김 부장이 시선을 눈치챈 듯 고개를 돌렸다. 서진우와 눈이 마주친 그가 얼굴을 찡그리며 비웃음을 흘렸다. 나이를 저렇게 먹어도 하는 행동이 유치하기가 짝이 없다. 서진우는 김 부장에게서 눈을 돌려 보란 듯이 그를 무시했다.
“김 부장 빡쳐 보이는데요.”
여수정이 몸을 기울여 귓속말을 했다. 서진우가 일부러 눈앞의 자료를 정리하며 대꾸했다.
“그래요? 무시하세요.”
감히 자신을 무시했네, 어쨌네 하는 말을 하고 있겠지만 굳이 알아줄 필요는 없었다. 서진우의 태연한 대답에 여수정이 눈을 굴리며 자세를 바로 했다.
임원들이 모두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회의실에 뛰어 들어온 강 과장이 여수정 옆 빈자리에 앉았다.
“미안, 회의가 지금 끝나서. 아직 시작 안 했지?”
“네. 과장님 괜찮으세요?”
회의에, 회의에, 또 회의. 회의 러시나 다를 바 없는 일정을 소화하는 상사가 서진우는 안쓰러웠다. 그러나 묻는 말에 강 과장은 씩 웃을 뿐이었다.
“걱정하지 마.”
강 과장의 말과 거의 동시에 회의실 불이 꺼지고 임원진 참관 회의가 시작되었다.
***
“건강한 저칼로리 비건 푸드를 표방한 저희 상품은 그린푸드 콘셉트에 초점을 맞추어, 환경운동에 관심이 많은 10대부터 40대 여성들을 주요 고객으로 포지셔닝했습니다. 이에 따라 어렵게 느껴지고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화학 용어를 최대한 배제하고…….”
강 과장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너른 회의장을 가득 채웠다. 서진우는 강 과장의 발표를 들으며 자신들이 몇 주간 열심히 준비한 자료를 넘겼다.
최근 젊은 환경운동가들이 증가하는 추세인데다 다양한 사회 불안 요소가 교차적으로 결합하기 시작한 현재, 그들이 진행하는 프로젝트는 사내에서 집중하는 신규 사업 중 하나로 부상했다. 그래서인지 임원진 한 명 한 명의 태도가 평소보다 진중해 보였다. 하기야 그럴 만도 했다. 라이벌 기업의 노이즈 마케팅이 본격적으로 미디어를 타기 시작하면서 이미 판매 중인 상품 중 일부가 크고 작은 타격을 입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 임원진으로서는 기획 단계부터 해당 노이즈 마케팅을 경계해서 기획을 발전시킨 강 과장의 신규 프로젝트가 눈에 들어올밖에.
‘아무리 그래도 관심이 좀 과하지 않나.’
서진우는 강 과장의 발표가 끝나기 무섭게 쏟아지는 매서운 질문들을 들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본디 날카로운 질문의 귀재인 백의현은 물론이요, 평소에 회의는 그냥 자리 지키는 용으로 참석하는 것처럼 보였던 이들 또한 한 마디씩 얹지 못해 안달이었다. 서진우는 자신이 발표자면 피가 말랐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다행히 프로젝트의 선장은 강 과장이었고, 처음부터 뭐든 철저한 강 과장은 결코 어설픈 꼬투리에 붙들리는 법이 없었다.
“―다른 의견 없다면 이쯤에서 마무리하시죠. 각 팀 여러분은 오늘 이야기 나온 피드백 반영하여 수정한 보고서 목요일까지 이메일로 공유 바랍니다.”
다른 팀보다 배는 길었던 질의응답은 백의현이 선제적으로 마무리 지어줌으로서 마침내 끝이 났다. 서진우와 여수정은 당당하게 돌아오는 강 과장을 향해 소리 나지 않게 박수를 쳤다. 세 팀 중 강 과장의 발표가 가장 마지막이었기에 회의 또한 그대로 끝이었다. 서진우는 탁상 위 자료를 그러모아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장님, 제가 모시겠습니다.”
멀리서 알랑거리는 듯한 역겨운 목소리가 들려 왔다. 고개를 들어 보니 어느새 회의실을 나서는 중인 황 사장의 뒤를 김 부장이 허겁지겁 뒤따르고 있었다. 꼬리만 달렸으면 그야말로 개새끼가 따로 없었다. 서진우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진짜 간신배 같다.”
강 과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얌전한 척 눈을 내리깔고 있던 여수정이 참지 못하고 풋, 웃음을 터뜨렸다. 서진우와 강 과장, 여수정은 들키지 않게 킬킬대며 회의실을 나섰다.
“그래도 크게 수정할 부분 없이 바로 진행해도 되니 다행이야.”
“그러게요. 다른 팀은 거의 말로 얻어맞던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복도로 걸음을 옮겼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서진우는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아, 잠시만요.”
양해를 구하고 메시지를 확인한 서진우가 자리에 멈춰 섰다. 학교 선배가 보내 온 메시지였다.
[―수요일까지 강의 자료 보내줄 수 있지?]
별 인사도 없이 툭 들어온 본론을 보아하니 이 선배도 어지간히 바쁜 모양이다. 서진우는 자료를 옆구리에 끼우고 양손으로 핸드폰을 붙들었다. 오늘…… 밤까지…… 보내…… 드릴게요. 열심히 손을 움직여 답장을 보내는 데 몰두하고 있을 때였다.
“누구와 그렇게 열심히 연락합니까?”
낮은 음성이 뒷덜미에 훅 끼쳤다. 귓가에 숨이 닿는 느낌에 소스라친 서진우가 고개를 돌렸다.
“―아, 이사님.”
백의현이 한 손은 주머니에 넣고 다른 손으로는 서류를 든 채 서진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평소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서 대리, 안 와?”
조금 앞서 걷던 강 과장과 여수정이 서진우를 돌아보았다. 그에 서진우 역시 당황해 강 과장과 여수정을 돌아보았다.
“아, 저 잠깐 할 일이 있어서 먼저 가시면 따라갈게요.”
“응? 그래. 이사님도 들어가세요.”
강 과장이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이고는 이내 걸음을 돌렸다. 서진우는 멀어지는 여수정과 강 과장을 지켜보다가 슬쩍 눈을 들어 올려 백의현을 올려다보았다.
“……그, 이사님은…….”
“같이 갑시다.”
백의현이 기다렸다는 듯 시선을 마주치며 대꾸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으로 물었기에 서진우는 고개를 주억거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곧 백의현의 묵직한 구두 소리가 곁에서 들려 왔다. 서진우는 괜스레 뛰기 시작한 심장을 가라앉히려 몰래 심호흡을 했다.
“그래서 무슨 강의 자료를 만듭니까?”
“네?”
불쑥 들려온 백의현의 질문에 서진우가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로봇처럼 삐걱거리며 고개를 드는 서진우를 마주하며 백의현이 씩 웃었다.
“미안합니다. 내용이 보여서요.”
백의현이 가볍게 턱짓했다. 서진우는 그가 가리킨 방향을 향해 눈을 내렸다. 휘적휘적, 손에 들린 채 맥없이 흔들리는 핸드폰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바보같이 놀라 화면을 끄지도 않은 것이다. 서진우는 민망함에 목덜미가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제 뺨을 긁적였다.
“아……. 모교에서 취업 강연을 부탁받아서요.”
“취업 강의?”
백의현이 가벼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서진우가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대단한 건 아니고 일회성 강의예요. 보통은 신입사원들이 면접 노하우 같은 걸 알려주는 강의인데, 펑크가 나서 대타로 한 번만 서기로 했어요.”
“흐음. 언제 합니까, 그건?”
서진우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백의현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서진우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게…… 이번 주 금요일이요.”
“―과연, 제법 갑작스럽군요.”
두 사람의 걸음이 나란히 복도 커브를 돌았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턱을 매만지며 천장을 올려다보던 백의현이 문득 싱긋 웃었다.
“그럼 이번 주에 반차 쓰는 것도 강의 때문입니까?”
“아, 네. 맞습니다.”
서진우는 얼굴이 홧홧해지는 것을 느끼며 어색하게 목을 문질렀다. 지난번 결근 사태로 당분간 쉴 수 없었음에도 반차를 끌어 사용하는 자신이 게을러 보일까 봐 괜스레 민망스러웠다. 백의현이 제 목을 매만지며 눈을 굴리는 서진우를 부드러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준비 열심히 하세요. 뭐, 서진우 씨라면 알아서 잘 하겠지만.”
커다란 손이 격려하듯 서진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듬직하고도 부드러운 손길에 서진우의 심장이 덜컹, 튀어 올랐다. 서진우는 제 표정이 어색하게 보이지 않기를 빌며 뻣뻣해진 뺨을 억지로 끌어 올려 미소 지었다.
“하, 하하. 이사님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해야겠네요.”
작위적으로 주먹까지 불끈 쥐고 들어 올리며 씩씩하게 말하는 서진우를 내려다보던 백의현이 눈가를 접어 웃었다.
“그래요. 기대 하겠습니다. 그럼 점심 맛있게 먹어요.”
때마침 땡, 하고 엘리베이터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멈추어 섰다. 백의현이 엘리베이터를 타며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서진우는 승강기 문 너머로 사라지는 백의현을 완전히 배웅한 후 사무실로 가기 위해 걸음을 돌렸다. 심장은 여전히 주제를 모르고 쿵쾅거렸고, 손길이 닿았던 어깨가 어쩐지 화끈거리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진정하기 위해 잠시 자리에 멈춰서서 손바닥으로 가슴을 꾹 누르고 있던 서진우가 문득 고개를 들어 올렸다. 조금 전 대화에서 이상한 점을 깨달은 까닭이었다. 그가 멍청히 입을 벌린 채 눈을 끔벅였다.
“그런데 뭘 기대한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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