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아, 너 그 강의 서기로 했어? 별거 아니야. 나도 했어.
“너까지 그렇게 말하기냐?”
이해신의 태평한 말에 서진우가 헛웃음을 흘렸다. 집에 돌아와 막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이해신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요지는 결혼식에 와 줘서 고맙다는 인사 연락이었다. 결혼식장에서는 거의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던 까닭에, 단순 답례 전화가 이런저런 이야기로 길어진 참이었다.
“하긴, 선배도 그러더라. 이해신 너도 한 거니까 쉬울 거라고.”
서진우는 말리지 않은 머리를 매만지며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이해신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괜한 소리가 아니라 진짜 뭐가 없더라고. 나는 그냥 창업을 어떻게 하게 됐는지, 비즈니스 모델을 어떻게 잡았는지, 직원들 면접 볼 때는 어떤 기준으로 보는지 이런 이야기나 잔뜩 떠들다 왔어. 그냥 학생들이랑 수다 떤 거에 가까웠달까? 영 감이 안 오면 그때 발표 자료 만들었던 거 좀 보내 줄까?
“어어, 그래. 보내 주면 고맙지.”
―알겠어. 이따 밤에 보낼게.
“천천히 보내. 밤에는 자야지. 신혼여행 내일 새벽 비행기라고 하지 않았어?”
―어, 맞아. 그래서 밤새려고.
이해신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서진우의 시선이 절로 핸드폰을 향했다.
“뭐? 여행지에서 졸다 오려고? 제수씨는 너 밤새워도 괜찮대?”
―같이 새우기로 했으니까 괜찮아. 그리고 지우가 왜 네 제수씨야? 형수지. 내가 너보다 두 달 생일 빠르거든?
동갑 친구끼리 따지는 것도 많았다. 서진우는 적당히 알겠다고 하고 넘겼다. 시시껄렁한 승리를 거두고 킬킬대던 이해신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화제를 바꾸었다.
―그나저나 너 회사는 계속 다니는 거야? 퇴사하기로 안 했던가?
갑작스러운 질문에 서진우가 입을 다물었다.
“아……. 그 이야기 말이지.”
음,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서진우가 턱 끝을 긁적이며 머쓱하게 웃었다.
“어쩌다 보니 당분간은 계속 다니기로 했어.”
―그래? 아쉽다. 나 진짜 우리 회사에 자리 하나 만들려고 했는데.
이해신이 과장된 한숨을 쉬었다. 누가 들어도 농담 섞인 어조에 서진우는 그냥 웃었다. 수화기 너머 이해신이 의아함이 섞인 어조로 질문을 했다.
―그나저나 왜 생각을 바꾼 거야? 그때 너 엄청 힘들어했잖아. ―아, 혹시 그 후배 놈이 퇴사했냐?
금세 말투에 희망이 섞였다. 서진우는 하하 웃으며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그러면 좋겠지만 멀쩡히 다녀.”
―아 그래? 하여튼 뻔뻔한 새끼.
실망한 이해신이 노골적으로 투덜거렸다. 서진우는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맞아, 뻔뻔하지. ……그런데 이제는 그냥 신경 안 쓰려고.”
―오, 뭐야. 갑자기 어른스러워졌는데.
“무슨 소리야. 우리 올해 서른이다.”
서진우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에 화답하듯 이해신이 영양가 없는 농담 몇 개를 늘어놓았다. 그 말을 듣던 서진우가 몸을 모로 굴리며 눈을 깜박였다.
“그냥…… 크게 의미를 안 두려고. 그동안은 사람한테 너무 많은 기대를 했던 것 같아. 나한테 의미 없는 사람이면 실망할 필요도 없잖아. 괜히 사람에게 절절매느니……. 그거보다 가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게 맞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하성민을 오랫동안 좋아했다. 아니, 좋아했었다. 사실 그 감정은 아주 오래전, 하성민이 처음 서진우의 보고서를 훔쳤을 때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과거의 서진우가 인정하지 못했을 뿐이다. 미련에 사로잡혀서 그런 일이 있고 난 후에도 하성민을 좋아한다고 믿었고 그랬기에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나쁜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에 너무 큰 상처를 받았다. 그래서 죽었다 살아난 이후에도 하성민에게 휘둘렸던 것이다. 그를 의식하는 행동 자체가 과거에 남긴 미련의 잔재라는 것을 몰랐으니까.
하지만 하성민이 제게 아무 의미도 없는 사람이 된 지금은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지 않을 수 있었다. 경계하고 두려워하던 일조차 하성민을 여전히 제 안의 커다란 존재라 착각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서진우는 이제 잘 알았다. 그러니 의미를 두지 않으면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있다. 고작 그 작은 깨달음이 서진우에게 안온한 평화를 주었다.
―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무조건 응원한다. 만약에 그 새끼가 또 못된 짓 하면 확 뒤통수라도 후려갈겨 버려! 다시는 쓰레기 같은 짓거리 생각도 못 하게.
이해신이 열성적이고 바보 같은 응원을 했다. 서진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사람 함부로 때리는 거 아니야. 잘못하면 사내 괴롭힘으로 잘릴 수도 있다고. 아니면 설마 이 대표……. 부하 직원들 뒤통수 때리고 다녀?”
―아 뭔 말을 하고 있냐! 우리 직원들 내가 모시고 산다 아주. 지난번에는 횟집에서 단체로 회식을 했는데, 아니 이놈들이 무슨 사장 등골을 빼먹을 기세로…….
서진우는 이해신의 하소연을 한 귀로 흘리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제 안에서 하성민을 가치 없는 사람이라 간주하고 나니 확실히 이전보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하지만 만일 서진우가 이 사실을 혼자 깨달아야 했다면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어쩌면 끝내 하성민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인정하지 못한 채 회사에서 쫓겨나듯 퇴사해 버렸을지도 몰랐다. 심지어는 죽었다 살아난 뒤로도 한동안 하성민을 의식하느라 제 감정을 쏟아붓지 않았던가.
‘백의현이 깨달음을 주지 않았더라면.’
잘못된 짓을 한 사람이 나쁜 것이다. 서진우는 잘못하지 않았다. 필요 없는 사람은 서진우가 아닌 하성민이었다.
―……아, 통화 너무 오래 했네. 이제 슬슬 끊자. 오늘 고마웠고, 신혼여행 다녀와서 한번 보자!
“그래. 결혼 축하하고, 여행 조심히 잘 다녀와.”
서진우는 전화를 끊고 손을 내렸다. 오랜 통화로 달아오른 핸드폰이 뜨끈뜨끈했다. 잠시 거북이처럼 끔벅거리며 느리게 눈을 깜박이던 서진우가 손을 움직여 메시지를 확인했다.
[백의현 이사님].
몇 주 사이 익숙해진 이름이 화면에 떠올랐다. 서진우는 엄지로 액정을 밀어 쌓인 대화를 둘러보았다. 최근 며칠 사이 주고받은 메시지가 이어지다 끊어지기를 반복했다. 서진우는 잠시 손을 멈추고 백의현이 보낸 메시지에 시선을 고정했다.
[―오늘 컨디션은 어떻습니까?]
[―오늘 회의 4시 맞습니까?]
[―강원채 과장님께 저도 참석한다고 전해 주십시오.]
[―점심은 뭐 먹었습니까?]
업무 이야기가 대다수였지만 중간중간 사소한 일상에 관한 질문들이 끼어 있었다. 서진우는 메시지 하나하나를 곱씹어 읽다 이내 손을 내렸다.
자신을 걱정하고, 필요로 한다고 말해 주는 사람의 존재가 이토록 큰 힘이 된다는 것을 서진우는 처음 알았다. 회사에서 서진우는 단 한 번도 자신이 중요한 존재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단순히 거대한 회사를 굴리기 위한 부품 중 하나였고, 언제든 대체 가능한 톱니바퀴에 불과했다. 그래서 아등바등 버티는 게 전부였고 동시에 모든 것을 쉽게 내던지려 했다.
‘나를 도와주세요.’
백의현이 그토록 간절하게 서진우를 잡아 준 덕분에 모든 것이 괜찮아졌다. 서진우 자신조차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변화였다. 그제야 서진우는 자신에게 필요했던 것이 이런 사소한 말 한마디였음을 깨달았다.
서진우가 이 자리에 있어도 좋다.
아니, 서진우는 이 자리에 있어야 한다.
그 말이 흔들리던 자신을 붙들고 뿌리 내리게 만들어 주었다.
“……그래도 너무 잘해 주는 건 좀 그런데.”
서진우가 엎드려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푹 한숨을 쉬었다. 백의현의 다정함이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곤란했다. 왜냐하면 서진우는 게이였고…….
‘……자칫하다간 좋아하게 될 것 같다고.’
결국 문제는 이것이다. 조금만 여지를 주면 상대가 헤테로여도 사랑에 빠져 버리는 그의 나약한 성정.
서진우는 앓는 소리를 내며 애꿎은 매트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자꾸 이루어지지도 못할 상대에게 눈이 돌아가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프로젝트가 끝나면 진짜 연애라도 해야 할 성싶었다.
***
순풍에 돛을 단 배만큼은 아니었지만, 프로젝트는 나름대로 순탄하게 진행되는 중이었다.
몇 가지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1차 패키지 디자인을 마친 시제품이 완성되었다. 그와 동시에 조금 한가했던 서진우도 다시금 바빠지기 시작했다. 물론 가장 바빠진 사람은 마케팅 1팀과 공조해서 업무 중인 여수정이었다. 신규 푸드 프로젝트 총괄 판매전략 및 마케팅 콘셉트 관련 임원진 참관 회의일이 10월 첫째 주 수요일에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강의 괜히 하겠다고 했나.’
수요일 아침, 서진우는 퀭한 얼굴로 지난날 제 결정을 후회했다. 일이 바빠짐에 따라 당연히 야근도 늘었다. 그래서 서진우는 요즘 투 잡을 뛰고 있는 기분이었다. 회사에서는 종일 뛰어다니며 회의를 하거나 자료를 만들고, 퇴근해서는 곧장 강의 자료를 제작하려니 그야말로 몸이 두 개여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오늘 임원 회의 잘 끝내면 소비자 선호도 조사 전까지는 야근 좀 덜 하지 않을까요.”
곁에 선 여수정이 좀비처럼 팔을 늘어뜨린 서진우를 격려했다. 그러는 그도 눈 밑에 짙은 다크서클을 매단 채였다. 서진우는 여수정을 안쓰러운 눈으로 돌아보았다.
“수정 씨가 지금 절 다독일 때가 아니에요. 마케팅부 쪽에서 넘어오는 일감도 장난이 아니던데.”
“일이 많은 건 괜찮은데……. 아시잖아요.”
서진우의 말에 여수정이 허허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서진우는 덧없이 입맛을 다셨다. 프로젝트가 마케팅 단계로 넘어가며 조 과장도 프로젝트 회의에 참여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 말인즉슨 조 과장에게 프로젝트 관련 사항에 말을 얹을 기회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조 과장은 그 기회를 결코 그냥 흘려보내지 않았다. 사소하게는 디자인된 로고의 배치부터 시작해, 크게는 제품의 콘셉트까지 꼬투리를 잡아대는 통에 강 과장이 폭발해 회의에서의 말씨름이 싸움으로 번질 뻔한 적만 세 번이나 있었을 정도였다.
그 광경을 회의 시간에만 보는 서진우도 지겹다는 생각이 들 지경인데, 마케팅부에서 직접 독대하며 업무를 해야 하는 여수정의 피로도는 얼마나 클까. 모르긴 몰라도 웃으며 넘길 수준은 아닐 터였다.
“뭐지, 그 눈빛. 별론데? 동정할 거면 일 대신 해 줘요.”
서진우의 시선에서 측은해하는 기색을 읽은 여수정이 눈을 가늘게 떴다. 농담 기가 다분한 타박에 서진우가 과장되게 손을 내저으며 고개를 모로 흔들었다.
“어우, 제 코가 석 자입니다. 돕긴 누굴 도와요.”
“그런데 무슨 자신감으로 남을 동정했지요?”
“그러게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알았으면 됐습니다.”
옆구리 찔러 절 받기에 성공한 여수정이 뿌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회의실로 들어섰다. 서진우는 작은 여성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짓고는 그 뒤를 따랐다. 친해지기 전에는 몰랐는데 여수정은 퍽 장난기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어, 안녕하세요. 이사님.”
회의실에 들어섰을 때, 여수정이 어딘가로 고개를 돌려 인사하는 모습이 보였다. 무심코 시선을 돌린 서진우는 회의실 한편에 앉은 백의현을 발견하고 반가운 얼굴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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