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10월
이해신의 결혼식에는 사람이 많았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서진우는 자신이 축제를 맞이한 대학생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그 정도로 식장에는 인파가 바글거렸다. 그야 이해신이 사업가이고 상대는 교사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친구가 많은 이에게 축복받는 결혼식을 올린다는 건 좋은 일이었지만…….
‘멀미 난다.’
서진우는 약간 질린 기분으로 결혼식장 뒤편 그늘에 몸을 숨기고 섰다. 사람이 많아 기가 빨리기는 했지만 앉을 자리가 없다고 친구 결혼식을 안 보고 가는 것도 도리가 아닌 데다, 조금 전까지 얼이 빠진 채 손님을 맞이하던 이해신을 떠올리니 도무지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결혼식 중에도 내내 긴장한 듯 굳은 표정으로 서 있던 이해신은 축가가 끝나고 신부와 동시 행진을 할 때야 비로소 마음을 놓은 듯 환히 웃었다. 그 표정이 제법 행복한 새신랑 같아 보였다. 서진우는 버진 로드 위에서 손을 흔들며 웃는 이해신을 보며 피식 미소 지었다.
‘그래도 얼굴 좋아 보여 다행이네. 사진만 찍고 집에 가야겠다.’
친구의 행복을 축하해주는 일도 중요했지만 이 이상 인파에 치이는 것은 사양이었다. 황금 같은 주말에는 모름지기 집에 누워 아무 일도 안 하고 보내야 마땅했다. 그러나 사진만 찍고 도망치겠다는 서진우의 야망은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꺾이고 말았다. 당연하게도 이해신과 교우관계가 겹쳐, 함께 사진을 찍은 이들이 거의 다 아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어 서진우! 너 서진우 아니야?”
“뭐? 진우가 왔어? 이야, 오랜만이다. 어떻게 취업한 뒤로 얼굴 한 번을 안 비쳐?”
“아, 하하, 오랜만이다. 아, 선배도 오셨어요…….”
한동안 일에 치여 동창회고 뭐고 두문불출했던 탓에 서진우는 지나치게 많은 관심을 끌고 말았다. 결국 서진우는 동문 손에 끌려가다시피 피로연까지 참석하고 말았다.
“아니, 진우야. 너는 못 본 사이에 왜 이렇게 말랐냐. 아주 피골이 상접했네? 팍팍 좀 먹어, 팍팍.”
옆자리에 앉은 선배가 서진우의 등을 손바닥으로 퍽퍽 내리치며 말했다. 서진우는 사레가 들릴 것 같다고 생각하며 애써 웃었다.
“선배는 그사이 몸이 많이 좋아졌네요…….”
“하하, 그래? 와이프가 운동 좀 다니라고 하도 구박을 해서 요즘 헬스 다니거든. 그런데 이게 이야, 근육 만드는 재미가 은근 쏠쏠하다.”
선배는 자신의 몸을 과시할 기회가 생긴 것이 퍽 기쁜 모양이었다. 그가 입에 숟가락을 문 채 과장되게 팔을 구부려 알통을 과시했다. 그래 봐야 셔츠 너머로는 잘 보이지도 않건만. 서진우는 젓가락으로 새우 하나를 집어 입안에 밀어 넣었다. 자극적인 소스 맛이 입안에 퍼졌다. 서진우가 눈을 내리깐 채 한참을 우물거리고 있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동기가 면박을 주었다.
“너 진짜 밥 맛없게 먹는다. 그렇게 별로야? 여기 음식 맛있지 않아?”
“……―응, 맛있어.”
서진우가 간신히 음식을 씹어 삼키며 대답했다. 이해신 부부가 하객들에게 제대로 대접하고 싶어 결혼식장을 선정할 때 음식이 맛있기로 유명한 곳을 골랐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서진우는 뷔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어차피 음식 맛을 잘 못 느끼는 체질인데다, 뷔페에 있는 메뉴는 어딜 가든 비슷비슷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주변인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더더욱 식욕이 떨어졌다. 서진우가 결국 젓가락을 놓아 버리자, 그 광경을 지켜보던 다른 동기가 끌끌 혀를 찼다.
“쯧쯧, YK도 어지간히 사람 갈아가면서 일 시킨다고는 들었는데, 회사 생활 많이 힘드냐? 너 있는 데가 푸드였던가? 거기도 엄청 험하게 굴리는 편이야?”
“뭐……. 안 힘든 곳이 있나.”
서진우가 겸연쩍게 웃으며 대꾸했다. 이런 자리에서 괜히 힘들다는 어필을 했다가는 대기업 다니면서 유세 떤다는 뒷말을 들을 수도 있으니 대답은 겸손한 편이 나았다.
“뭐, 진우 너 YK 다닌다고?”
그러나 기대하지 않던 반응은 전혀 예상외의 곳에서 튀어나왔다. 별안간 한 테이블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던 선배가 서진우를 돌아보며 소리친 것이다. 서진우는 화들짝 놀라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네에.”
“아 진짜? 어디 계열사? 무슨 일 하는데?”
“푸드…… 기획부 소속인데요.”
“와, 그랬구나! 몇 년 차야? 졸업하고 바로 들어간 거면 어디 보자……. 4년 차 정도 된 건가? 대리는 달았겠네, 그렇지?”
“네……. 잘 아시네요.”
서진우는 침까지 튀겨가며 꼬치꼬치 캐묻는 선배에게 휘말려 어영부영 대답했다. 서진우의 긍정을 들은 선배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가 급기야 서진우가 앉은 방향으로 의자를 돌려 앉으며 한쪽 팔을 식탁에 기대었다.
“진우, 요즘 많이 바빠?”
갑자기 목소리가 은근해졌다. 서진우는 어안이 벙벙해 눈을 깜박였다.
“글쎄요, 그냥저냥……? 프로젝트 하나 하는 게 있어서요.”
“혹시…… 많이 안 바쁘면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라.”
선배의 상체가 가까워졌다. 모두의 시선이 선배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그는 서진우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진지한 목소리로 폭탄 발언을 했다.
“강의 하루만 맡아줘.”
“네에?”
서진우가 놀라 목소리를 높여 되물었다. 갑자기 강의? 무슨 강의? 당황해 굳어 버린 서진우 대신, 그 옆자리에 앉아 있던 다른 선배가 한심해하는 표정으로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저 새끼 저거, 요즘 경영 임 교수님 밑에서 일하거든. 시간 강사도 뛰고, 박사 준비도 하고 그러면서. 그래서 대기업 다니거나 사업하는 애들만 보면 저렇게 눈까지 뒤집으면서 달려든다니까. 진우 너도 기억나지? <경영 실무와 창업의 이해>.”
“아…….”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서진우가 입을 다물었다. <경영 실무와 창업의 이해>라면 서진우도 익히 아는 강의였다. 졸업하기 위해 3, 4학년 때 필수로 수강해야 하는 교양 과목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경영 실무와 창업의 이해>는 개인 사업으로 성공한 각종 명사 및 대기업에 취직한 모교 선배들이 매주 번갈아 가며 면접과 창업 노하우를 전해주는 일종의 일회성 취업 강좌였다.
“하지만 그 강의는 4년 차 직장인이 안 하지 않나요? 인사팀이라면 모를까.”
서진우가 당혹감 어린 표정으로 곁에 있는 선배를 돌아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서진우가 기억하기에 그 수업은 매해 취업, 창업 시장 트렌드를 반영하기 위해 막 취업한 새내기 직장인들 또는 임원급 이상이 진행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중요한 강의를 애매한 4년 차 직장인이, 그것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진행해도 괜찮은 것인가?
“괜찮아, 뭐 어때! 그냥 실무가 어떤 건지 아는 척 좀 해 주고, 질의응답 몇 번 해 주면 돼.”
떨떠름해하는 서진우의 표정에서 거절의 뜻을 읽은 선배가 급기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제 앞의 접시를 서진우 근처 좌석으로 척척 옮긴 후 저 자신도 빈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본격적인 호소를 시작했다.
“아니 그게, 너 이유성 기억해? 너보다 두 학번 아래인가 그럴걸. 걔가 신진화학 다니거든. 그래서 걔한테 반년 전부터 부탁해 뒀었는데……. 아니, 그제 갑자기 해외 출장을 가게 됐다면서 강의에 참여를 못 한다는 거야! 당장 다음 주 강의인데 그걸 이제 알려주면 어떻게 하냐고?”
“아……. 많이 당황하셨겠어요.”
“당황하다마다! 강의계획서에 라인업 쫙 빼다가 이름까지 딱 박아 놓았는데. 아니 뭐, 펑크 나서 강사 바뀌는 거야 드문 일도 아니다마는. 문제는 주변에 대체할 인물이 없다, 인물이. 교수님은 수업 펑크 나면 안 된다고 밤낮을 안 가리고 닦달을 해 대는데, 주변인들은 이미 다 한 번씩 강의했거나 시간이 없어서 안 된다고만 하고.”
선배가 과장되게 울먹이는 표정을 했다. 난감해진 서진우가 목덜미를 긁적이며 상체를 뒤로 물렸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당장 다음 주 강의를 제가 어떻게 메워요. 강의 같은 건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데…….”
“대단한 거 없어! 그냥 조별 과제 발표할 때처럼 하면 돼. 진짜야. 지난 학기엔 해신이도 했었다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이해신을 깎아내린 선배가 양손을 기도하듯 깍지 껴 붙들었다. 그가 간절한 눈으로 서진우를 바라보았다.
“응? 진우야, 내가 진짜 급해서 그래. 강의비 넉넉하게 챙겨 줄게. 밥도 살게! 어떻게 안 될까?”
“…….”
서진우는 착잡한 눈으로 선배를 마주 보았다. 당장 다음 주에 해 본 적도 없는 강의를 해 달라니 막막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일에 구멍이 났을 때 담당자가 느낄 초조함과 스트레스 또한 서진우는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지난주에 그 자신이 하성민의 뒤처리를 하느라 밤을 새우지 않았던가.
“……정확히 뭘 하면 되는데요?”
결국 서진우는 어깨를 늘어뜨리며 그렇게 물었다. 선배가 이렇게까지 매달리는데 계속 거절하는 것도 도리가 아닌 것 같았고, 학창 시절에는 나름 친하게 지내기도 했던 사람인지라 마음이 약해졌다. 서진우의 대답에 선배의 얼굴이 환해졌다. 서진우는 제 곁에 붙어 본격적인 설명을 늘어놓는 선배의 이야기를 들으며 속으로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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