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백의현은 보고서 끄트머리를 검지로 의미 없이 팔락댔다. 깔끔한 구조와 이해하기 쉬운 문장이 보고서의 주인이 서진우의 것임을 재차 증명하고 있었다. 백의현은 문득 1층 로비에서 마주쳤던 서진우의 모습을 떠올렸다. 동료들에게 둘러싸여서 황치택과 함께 걸어가는 자신을 보며 조금 놀란 표정을 짓던 청년.
백의현이 손수 발품을 팔면서까지 곁에 두고자 한 인재.
‘이사님, 면목 없지만 도움이 필요합니다.’
강 과장이 백의현의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다시피 하며 그렇게 애원했던 것은 이틀 전 오후의 일이었다. 서진우가 김 부장과 다투고 회사를 뛰쳐나간 뒤 그대로 복귀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전하는 강 과장의 얼굴은 퍽 참담해 보였다.
‘CCTV를 보기 위해서는 김 부장님의 승인이 필요하지만……. 부장님께서 전혀 인가해 주려 하지 않으십니다.’
강 과장이 입술을 깨물었다. 백의현은 강 과장의 핼쑥한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면 과장이 CCTV를 확인하겠다고 하는데 부장이 막을 이유가 없을 텐데, 대체 이번에는 얼마나 못된 짓을 저지른 것일까.
……그러고 보니 서진우 혼자 밤을 새웠더랬지.
불편한 자세로 곤히 잠들어 있던 남자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새근댈 때마다 날개 뼈가 솟았다 가라앉는 모습이 묘하게 눈에 남았더랬다. 백의현은 문득 호기심이 동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같이 가시죠, 보안실로.’
‘네? 아, 아닙니다. 그냥 전화 한 통만 넣어 주시면 됩니다.’
백의현의 말에 강 과장이 당황해 고개를 들었다. 설마 백의현이 직접 행차하겠다고 말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백의현은 재킷에 팔을 끼우며 무심하게 강 과장을 돌아보았다.
‘제가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게 문제 해결에 더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백의현은 정말로 제 말을 지켰다. 그길로 보안팀에 찾아가 CCTV를 확보하고, 강 과장의 업무용 패드로 파일을 옮기도록 지시한 후 함께 내용물을 확인했다. 소리 없는 영상 안에는 서진우가 말한, 혹은 끝내 말하지 않은 정황이 고스란히 녹화되어 있었다. 서진우가 자리를 비운 사이 그의 자리로 이동해 마우스를 몇 번 움직이던 하성민의 모습, 돌아온 서진우가 하성민의 멱살을 움켜쥐는 장면, 그리고 대화를 나누던 중 갑자기 홱 고개를 돌리며 제 뺨을 붙드는 하성민의 행태까지. 지난밤의 일을 여과 없이 기록한 CCTV를 보며 강 과장은 탄식을 금치 못했다.
‘이런 일이 있었으면 이야기를 했어야지…….’
그렇게 중얼거리던 강 과장의 목소리를 들으며 백의현은 서진우를 생각했다. 혼자 남아서 하는 야근에도 불평 한마디 없던 이가, 자신이 겪은 불합리한 일을 곧이곧대로 상사에게 전할 성격인가? 서진우는 아마도 강 과장을 신뢰하기에 더더욱 이 일을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데이터는 어차피 복구했으니, 굳이 속상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을 터다. 어쩌면 프로젝트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칠까 두려웠을 수도 있겠지. 그 작은 머리로 굴렸을 계산이야 너무도 뻔했다.
‘김 부장에게 가죠.’
백의현은 강 과장을 이끌고 곧장 기획개발부로 내려갔다. 기획개발부에는 여전히 화가 난 듯 오만상을 찌푸린 김 부장과 그 옆에 얌전히 서 있는 하성민이 있었다. 혹시나 하성민이 프로젝트 팀 사무실로 돌아갔으면 좀 귀찮을 뻔했는데 마침 다행이었다. 백의현은 자신을 보고 놀라 몸을 일으키는 김 부장에게 인사를 건네는 대신 강 과장에게 CCTV 영상을 재생하라고 지시했다.
비록 소리가 없는 영상이었지만 증거는 명백했다. 백의현은 김 부장과 하성민의 안색이 새하얘지는 것을 지켜본 후 낮지만 또렷한 음성으로 물었다.
‘한 사람의 말만 듣고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것이 김석환 부장님이 부서를 운영하는 방식입니까?’
비록 사무실은 고요했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사원이 앉아 있었다. 백의현은 그들이 모두 자신의 말을 놓치지 않도록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맞지도 않았는데 맞았다고 말하면, 무조건 편들어 주는 게 상사로서 걸맞은 행동입니까?’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음성이 조용한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 김 부장은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술을 뗐다 붙이기를 반복했다. 그 멍청해 보이는 표정이 지겨웠다. 백의현은 하성민에게로 눈을 돌렸다. 이토록 공개적으로 질타당하는 것이 처음인지 하성민의 표정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이 일은 무조건 인사부로 넘길 겁니다.’
‘하, 하지만 그러면 프로젝트가……!’
당황한 김 부장이 고개를 들었다. 백의현은 하성민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차갑게 대꾸했다.
‘프로젝트 존폐를 빌미로 나를 설득하려는 거라면 하지 마세요. 어차피 이런 얄팍한 짓이나 궁리하는 팀원이 소속되어 있는 한, 잘 진행될 일도 고꾸라질 겁니다.’
‘…….’
‘그리고 하성민 대리, 그쪽은 처분이 어떻게 되든 인사 평가는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겁니다.’
백의현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슬쩍 눈을 들어 올리려던 하성민이 시선이 마주치자 움찔 놀라 다시 고개를 숙였다.
‘하성민 대리는 본인이 저지른 일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장난 정도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고의로 데이터를 삭제하고 벌어지지 않은 폭력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짓을 그냥 넘어가 주는 회사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간 얼마나 편하게 회사 생활을 해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그런 요행은 기대하지 마십시오.’
백의현의 말은 칼처럼 매서웠다. 그가 말을 멈추자, 냉기가 어린 사무실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흔한 마우스 클릭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을 보아하니 사무실 안에 있는 이들이 백의현의 말을 들었음은 자명해 보였다. 그리고 그 사실을 하성민도 깨달은 모양이었다.
‘……죄, 송합니다. 저는 그저…….’
‘하성민 대리.’
부들부들 떨리는 하성민의 말을 가로막으며 백의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사과는 내가 아니라 서진우 대리에게 하세요. 나는 하성민 대리에게 들을 말 없습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음에도 하성민의 표정이 왈칵 일그러지는 것이 보일 지경이었다. 백의현은 모른 척 발길을 돌려 버렸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대대적으로 모욕을 준 것은 지극히 고의적인 행동이었다. 김 부장이 찍어 누르고 싶어 하는 직원들에게 으레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직접 보고 듣지 않은 일은 금세 머리에서 잊는다. 특히 김 부장이나 하성민처럼 실질적인 권력을 쥔 이가 상황을 조종하면, 실제로 보고 들었더라도 눈을 가리고 귀를 막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서진우가 두 눈 멀쩡히 뜨고 기획서를 도둑맞았던 일을 보고서도 이때껏 못 본 척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백의현은 이제 불합리한 일이 그저 흘러가게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특히나 서진우 같은 이의 입지가 고작 ‘라인을 타지 않는 얼간이’ 수준에 머무르도록 놔둘 의향은 조금도 없었다. 무너져야 할 사람은 김 부장과 하성민이다, 서진우가 아니라.
‘그래도 서진우의 집까지 찾아갈 생각은 없었는데.’
백의현은 한 손으로 느릿하게 제 턱을 매만졌다.
솔직히 집에 찾아간 것은 그가 생각하기에도 조금 과했다. 백의현은 본디 타인의 사생활을 쉬이 침범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애초에 타인에게 관심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진우의 결백을 밝혔다고 생각했던 다음 날, 여전히 서진우가 출근하지 않았으며 전화도 꺼져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는…….
글쎄, 그때 느낀 기분을 무어라 설명하면 좋을까.
비록 기획 회의 때부터 꾸준히 퇴사하고 싶어 하는 기색을 내비치기도 했고, 백의현을 눈에 띄게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런 방식으로 도망친다고?
서진우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받고 기분이 좋아졌던 게 고작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자신에게 굳게 닫아 두었던 마음을 드디어 조금씩 열기 시작하던 게 눈에 보일 정도였는데, 이대로 무단결근 퇴사를 감행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백의현이 알고 있는 서진우는 그런 무책임한 행동을 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전날 겪은 일이 충격적이기야 했으리라. 하지만 이렇게 모든 것을 다 내버리고 도망칠 만한 일이냐고 한다면 그 정도는 아니지 않은가.
실망감에 화가 났고, 동시에 오기가 일었다.
냉정히 말하자면 서진우가 꼭 놓치면 안 될 만큼 대단한 인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꾸준히 좋은 기획안을 제출하고 성실하게 일을 하는 사람이 많지야 않다지만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 하지만 백의현은 이대로 서진우가 도망가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놓치면 그간 들인 공이 아깝잖아.’
차라리 연애 상대를 꼬시다 실패한 거면 억울하지나 않지. 솔직히 부하 직원한테 이 정도 했으면 적당히 넘어와야 하는 게 아니냔 말이다. 퍽 과감했던 인센티브 제안도 뿌리치고, 나름대로 꾸준히 베풀었던 친절함에도 기어코 곁을 내주지 않겠다는 모양새가 얄미웠다.
아마 보통 사람이었다면 이쯤에서 포기했겠지만…….
그래서 서진우를 찾아갔다. 보통 사람처럼 그를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생각하니 백의현도 나름 그답지 않은 짓을 한 셈이었다.
‘서진우에게 충동 운운할 입장이 못 되는군, 나도.’
백의현은 웃으며 서류철을 덮어 책상 위에 던지듯 올려놓았다. 약 덕분인지, 다른 생각에 빠져든 덕인지 그새 두통이 조금 가셨다. 백의현은 등받이에 몸을 묻고 두 손을 깍지 껴 배에 올렸다.
서럽게 울며 울분을 쏟아 내던 서진우의 얼굴은 백의현이 볼 수 있을 거라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날것의 감정을 담고 있었다.
서진우가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그 고통이 내면을 얼마나 일그러뜨렸는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백의현은 뒤늦게 서진우를 이해했다. 그리고 동시에 기이한 공감을 느꼈다. 끊임없이 타인에게 부정당하는 경험이 사람을 어떻게 망가뜨릴 수 있는지, 백의현 또한 잘 알고 있었으므로.
백의현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꺼풀 너머로 밝은 빛의 잔상이 먼지처럼 떠다녔다. 잠시 희미해지는 잔상을 지켜보던 그가 문득 혼잣말을 뇌까렸다.
“……그래도 웃는 얼굴이 낫지.”
다행히 로비에서 마주쳤던 서진우는 웃고 있었다. 전일 그토록 목 놓아 운 사람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는 얼굴로, 동료들과 대화하며 평범하게 웃고 있었다. 황치택과 함께 있어 금방 시선을 돌려야 했지만 백의현은 내심 안도했다. 그가 알던 서진우는 본디 저런 사람이었으므로.
언뜻 평범해 보이지만 대화 몇 마디로 주위에 사람을 모으던 사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던 사람.
백의현이 ‘알던’ 서진우란 그런 사람이었다.
‘-여기 자리 있어요?’
불현듯 맑은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한동안 잊고 있던, 떠올릴 줄도 몰랐던 작고 사소한 기억의 편린이었다. 지금보다 조금 더 앳되고 힘 있던 음성과 총기 있게 빛나던 눈동자가 뇌리에 떠올랐다.
만일 그때 서진우에게 말을 걸었더라면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까.
멍하니 학창 시절의 기억을 반추하던 백의현이 이내 피식 웃으며 눈을 떴다. 지나간 과거를 곱씹어 봐야 소용없다. 이제는 상념을 접어 두고 다시 일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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