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게다가 임기현 상무님은 국내 유통사 이슈로 상당한 골머리를 앓고 계신 거로 알고 있는데요.”
백의현은 태연한 표정으로 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 이 맛없는 차는 입가심으로라도 마시기 싫었지만 그런 내색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황치택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백의현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의 속내를 모르는 바 아니었다. 임 상무는 최근 유통사 관리에 실패해 그 일을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잘해 봐야 본전인 일을 더 끌어안고 싶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제 이름에 오점이 남을까 봐 걱정했을까. 백의현이 생각해 봤을 때, 임 상무는 차라리 열심히 상황을 수습해 본전 찾기라도 하는 것이 나았다.
하지만 황치택이 곁에 둔 사람에게 책임감이 있을 리 만무하다. 황치택도 임 상무가 그 일을 잘 마무리하지 못할 것을 알기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리라. 망할 것 같은 사업으로 고꾸라지기 전, 성공할 것이 분명한 사업을 쥐여 줌으로써 목숨 줄을 붙여 놓겠다는 심산이 빤했다.
‘어쩌면 임기현이 그렇게 해 달라고 아첨을 떨었을지도 모르지.’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황치택이 해 달라는 대로 순순히 사업을 넘길 생각은 조금도 없었으므로.
“바쁘신 분께 일을 더 얹어 드릴 수는 없지요.”
백의현이 길쭉한 다리를 꼬며 등받이에 등을 기대었다. 황치택의 이마에 힘줄이 솟았다. 백의현이 여유로워지면 여유로워질수록 황치택은 더욱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백의현은 황치택이 이를 악무는 모습을 느긋하게 지켜보았다.
“-거만 떨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백 전무.”
문득 황치택이 허, 하고 웃었다. 그가 몸을 뒤틀자 소파 가죽에서 끼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회장님이 너를 자주 찾는다고 해서, 그게 널 받아들였다는 뜻은 아니거든.”
백의현의 입가에 희미하게 머물러 있던 웃음이 사그라졌다. 황치택이 한쪽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탐욕으로 주름진 얼굴에 비뚠 웃음이 걸렸다.
“전무이사 타이틀 달아 주니까 네가 뭐라도 된 줄 착각하나 본데……. 이 회사에서 넌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외부 영입 인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그러니까 주제넘게 굴지 않는 게 좋을 게다.”
황치택이 느물거리는 음성으로 한껏 이죽거렸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 말을 듣던 백의현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상준이는 아직도 주식 공부합니까?”
“뭐?”
황치택의 웃는 얼굴에 금이 갔다.
“아, 이제는 코인이던가요? 요즘은 얼마 법니까. 30억 원? 아니다, 30원이었댔나?”
“이 새끼가…….”
황치택이 이를 갈며 으르렁댔다. 백의현이 표정 없는 얼굴로 질문을 이었다.
“수빈이는 파리에 있다고 들었는데, 학업에 진척은 좀 있습니까? 작년에는 워닝 레터를 받았다고 들었습니다만. -아, 영어로 말씀드리면 이해가 어려우시겠죠. 한국어로 뭐라고 하더라, 학사 경고였던가?”
“네놈이 감히, 어디서 그 더러운 입에 애들 이름을 올려?”
황치택의 목소리가 급기야 부들부들 떨렸다. 고작 이 정도 도발에도 분을 못 참을 거면서. 백의현은 속으로 조소하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나이 서른에 변변한 직업 하나 없이 코인이다, 주식이다 하면서 있는 자산 갉아먹는 손자나, 남들 다 돈만 주면 졸업한다는 유럽 대학에서 학사 경고로 잘리기 직전인 손녀보다야 아무래도 제가 낫지 않겠습니까.”
백의현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우득, 황치택의 이가 갈리는 소리가 커피 테이블 너머까지 들려왔다. 아니, 어쩌면 턱이 어긋나는 소리였을지도 모르겠다. 백의현은 못 들은 체하며 꼬아 두었던 다리를 풀었다.
“더 하실 말씀 없으시다면 일어나겠습니다. 바빠서요.”
“앉아.”
황치택이 이를 악문 채로 명령했다. 백의현은 보란 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가볍게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기껏 사장실까지 부르시기에 무슨 중요한 이야기를 하시려나 했는데 사업 아이템 갈취라니. 좀…… 사장치고는 위선이 안 서는 행동이지 않았나 싶습니다만.”
황치택이 소파 가죽을 손으로 쥐어 비틀었다. 듣기 싫은 마찰음이 귀를 찔렀다. 백의현은 슬쩍 눈살을 찡그리며 그를 일별했다.
“오늘 이야기는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백의현이 걸음을 옮겼다. 뒤편에서 자리를 지키고 서 있던 황치택의 비서가 소리 없이 뒤로 물러나 길을 열어 주었다. 뚜벅, 뚜벅. 매끈한 대리석 바닥에 느릿한 구둣발 소리가 울렸다. 그렇게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와장창!
무언가 묵직한 것이 머리카락을 스친다 싶더니 이윽고 진열장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백의현은 구둣발 앞을 뒹구는 금색 파편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몇 초 전까지는 우아한 찻잔이었던 다기가 손잡이로 원형을 겨우 추측할 수 있을 정도로 형편없이 조각난 채 흩어져 있었다.
“천박한 사생아 새끼가, 어디서 그따위로 눈을 건방지게 굴려?”
등 뒤에서 씩씩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백의현은 천천히 걸음을 돌렸다.
“가진 거라곤 지 에미 닮은 기생오라비 같은 얼굴밖에 없는 놈이, 어딜 황가에 고개를 비비적대고 있느냔 말이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황치택이 성큼성큼 백의현에게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온 그는 키가 너무 작아서 백의현이 눈을 내리깔아야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넌 네가 진짜 잘나서 이 자리까지 온 줄 알겠지만, 착각하지 마.”
황치택이 짧고 퉁퉁한 검지를 들어 올려 백의현의 어깨를 쿡 밀었다.
“아버지가 진짜 널 예뻐해서 여기 꽂아 넣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너 스무 살 될 때까지 얼굴 보려고도 안 했던 영감이, 인제 와서 퍽이나 너 같은 새끼를 손주라고 끼고 살겠어? 주제 파악 잘하고 살아. 젊은 나이에 불의의 사고로 골로 가고 싶지 않으면.”
황치택의 눈동자가 노여움으로 이글거렸다. 백의현은 표정 없는 얼굴로 그 눈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조용히 되물었다.
“-황치헌 이사님처럼 말입니까?”
“!”
백의현은 황치택의 얼굴이 찰나 굳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과연 아득바득 대표 이사 자리를 쟁취해 낸 인물답게, 황치택은 금방 제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래, 황치헌처럼.”
낮은 목소리로 대꾸한 그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알면 적당히 몸을 사려야지, 백의현 이사님도.”
“…….”
백의현은 말없이 눈앞의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날것의 적의가 손에 잡힐 듯했다. 누군가는 소름 끼쳐 할 만큼 경직된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았다.
“-뭐, 그러죠.”
이윽고 백의현이 피식 웃었다. 황치택이 눈썹을 찌푸렸다. 백의현은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 황치택과의 거리를 벌리며 재킷 칼라를 매만졌다.
“비서님도 보고 계신 앞에서 찻잔을 집어 던지면서 욕을 하는 것보다 더 천박한 것이 무엇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황 사장님께서 사리라면 사려야지요.”
특유의 나긋하고 우아한 음성으로 빈정거린 백의현이 고개를 까닥여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그가 다시 일그러지려는 황치택의 얼굴을 마주하며 싱긋 웃었다.
“건네주신 충고, 잘 기억해 두겠습니다. 전 오래 살고 싶으니까요.”
“…….”
“그럼 이만.”
웃음기 어린 마무리까지 빼먹지 않은 백의현이 몸을 돌려 사장실을 걸어 나갔다. 달칵, 문을 닫고 복도로 나서자마자 등 뒤로 다시 와장창하는 소리가 들렸다. 황치택이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새 찻잔을 집어 던진 모양이었다.
“미친 새끼.”
낮게 욕설을 중얼거린 백의현이 미간을 찌푸린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뼛속까지 귀족인 척해도 하는 짓은 천민이 혀를 찰 정도건만, 황치택은 저 자신이 얼마나 상스러워 보이는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애초부터 그 정도 지능이 있었다면 회사를 이 지경까지 말아먹지는 않았겠지.’
황 회장이 물밑에서 백의현에게 접근한 이유를 아직까지 모른다는 것이 우스웠다. 백의현은 굳은 얼굴로 텅 빈 고요한 복도를 가로질렀다.
***
“오셨습니까.”
이사실로 돌아오니 대기 중이던 비서 송재희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문을 열어 주었다. 백의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사무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괜찮으십니까? 표정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의자에 몸을 던지듯 앉아 엄지로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짓누르고 있자니 송재희가 조심스럽게 시선을 맞추어 왔다. 백의현은 송재희를 곁눈질하다 고개를 흔들었다.
“역겨운 공기에 너무 많이 노출됐어.”
음성에서 답지 않게 불쾌한 감정이 여실히 묻어났다. 빠르게 상황을 이해한 송재희가 몸을 돌렸다. 백의현은 송재희가 두통약을 챙기는 동안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았다.
황치택에게서는 항상 썩은 나무 냄새가 났다.
그것이 진짜 그의 몸에서 나는 냄새인지, 오직 백의현만이 느끼는 착후각증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백의현은 황치택을 마주할 때마다 젖은 나무 안쪽이 썩어들어 가며 나는 역겨운 냄새를 맡았다. 그 냄새는 언제나 백의현의 발목을 잡아채고 그를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 속으로 내던지고는 했다. 언제나 희미해졌다고 믿지만 사실은 단 한 번도 흐려진 적 없는, 장마철 낡은 오두막 안에서 지새운 일주일 속으로.
“드십시오.”
눈앞에 불쑥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백의현은 천천히 눈을 떴다. 송재희가 한 손에는 컵을, 다른 손에는 약을 든 채 바투 서 있었다. 백의현은 몸을 일으켜 송재희가 내민 약을 받아 들었다.
“특이 사항은?”
입안에 알약을 털어 넣으며 묻자 송재희가 자세를 고쳐 섰다.
“네 시에 예정되어 있던 양서제분과의 미팅이 익일 오전 11시로 변경되었습니다. 그리고 7시에 코닉엔지니어링 대표가 저녁 식사 자리를 요청했습니다.”
“가겠다고 해.”
“알겠습니다. 그 외에 다른 특이 사항은 없습니다.”
송재희의 말에 백의현이 왼손을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그가 피로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럼 지금부터 30분 정도는 시간이 빈다는 소리군. 좋아, 나가 봐.”
“……네.”
잠시 망설이는 듯 침묵하던 송재희가 이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송재희의 좋은 점은 눈치가 빠르다는 것이었다. 그는 백의현과 황치택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백의현이 침잠했을 때 혼자 두어야 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백의현은 송재희가 문을 여닫는 소리를 들으며 느릿느릿 눈을 깜박였다. 두개골을 정으로 두드리는 양 머리가 아팠다. 하지만 그렇다고 맥없이 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미팅이 취소되어 생긴 시간에는 밀린 보고서를 검토해야 했다.
‘일이 바쁘니 차라리 다행인가.’
우울한 감정에 사로잡히느니 정신없는 것이 낫다. 백의현은 한숨을 쉬며 가장 가까운 곳에 놓인 서류철로 손을 뻗었다.
“……아.”
막 덮개를 열어 보고서를 확인한 백의현이 손을 멈추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우측 상단에 강 과장이 손수 찍은 도장이었다. 백의현의 눈이 자연적으로 그 아래 적힌 보고서 작성자의 이름으로 향했다.
서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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