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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느니 퇴사하겠습니다, 이사님!-41화 (41/150)

41화

“서 대리님도 삶이 피곤하겠어요, 진짜. 그렇게 참고만 사니까 병이 생기죠.”

여수정이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음을 옮기며 서진우를 구박했다. 그 음성에 깃든 장난기를 알아챈 서진우가 장단을 맞추려 약한 소리를 했다.

“그러게요. 이제 안 참으려고 하다 보니까 더 풍선처럼 터지나 봐요. 잘 조절해야 할 텐데.”

“제가 한 수 알려 드려요?”

앞장서서 걷던 여수정이 흘긋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안경 너머 눈빛이 번뜩이는 듯했다. 서진우는 어색하게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아니요…… 정말 괜찮습니다.”

여수정이 폭발하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는 죽기 전에 이미 두 눈으로 똑똑히 본 바 있었다. 퇴사하기 전 김 부장과 조 과장의 만행을 조목조목 사내 게시판에 폭로하고 인사팀에 회부되었던 그 시절 여수정을 떠올리자 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아마 서진우는 다시 한번 죽었다가 깨어나도 여수정처럼은 대처할 수 없을 것이다.

“뭐지, 왜 그렇게 떨떠름해하지? 제가 무서워요? 저처럼 회사 생활 착하게 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서진우의 표정을 확인한 여수정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서진우가 적당히 그를 달랬다.

“알죠, 알죠. 수정 씨 일도 잘하고-.”

“어, 서 대리님. 수정 언니!”

등 뒤에서 들려온 호들갑이 서진우의 변명을 가로막았다. 두 사람은 동시에 소리가 들려온 곳을 돌아보았다. 김기호와 임상하가 손을 흔들며 두 사람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사무실 올라가시는 길이에요? 같이 가요! 그런데…….”

단숨에 거리를 좁혀 온 임상하가 눈을 가늘게 뜨고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왜 또 둘만 있지? 수상해요?”

“뭐래. 그렇게 치면 상하 씨랑 김 주임님도 둘만 있었잖아요.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예요?”

여수정이 무표정한 얼굴로 임상하의 추측을 반박했다. 그 말에 김기호가 화들짝 놀랐다.

“네, 네에?!”

“무슨 말이에요, 언니도 참. 저 남친 있어요.”

김기호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 임상하가 까르르 웃으며 답을 차단했다. 서진우는 시무룩해진 김기호를 구경하며 커피를 쪽 빨아들였다.

‘뭐지, 방금 핑크빛 기류가 피어오르려다 엎어진 것 같은데.’

“하여튼 요즘 두 분 너무 자주 붙어 다녀요. 설마…… 사내 연애의 전조인가?”

김기호가 등 뒤에서 시무룩해하거나 말거나, 추리에 불이 붙은 임상하는 끈질겼다. 서진우가 하하 웃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상하 씨. 그냥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거예요.”

애초에 게이인데 여자와 붙어 다닌다고 정분이 날 리가 없다. 게다가 이런 추측은 여자인 여수정에게 더 불리한 법이었다. 서진우는 가볍게 손을 내저어 임상하의 말이 틀렸음을 확실히 했다. 여수정도 무표정한 얼굴로 임상하를 응시하며 엄격하게 대꾸했다.

“자꾸 쓸데없는 말 하면 화낼 거예요.”

“알았어요, 농담이에요 언니.”

임상하가 여수정의 팔짱을 끼며 헤헤 웃었다. 서진우는 헛웃음을 지었다. 임상하도 참 대단한 사람이었다. 표정 없는 여수정은 남자가 보기에도 꽤 무서운데, 언니라고 부르며 팔짱까지 끼다니.

“어, 뭐지?”

갑자기 어수선해진 분위기에 김기호가 고개를 돌렸다. 서진우도 김기호가 돌아본 방향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정문에서부터 정장을 입은 몇 명의 사내가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점심시간이라 로비는 사람으로 바글거렸지만, 그들이 지나가는 길 주변은 마치 교통정리라도 한 것처럼 텅 비어 있었다.

“사장님이랑……백 이사님 아닌가요?”

여수정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서진우도 금방 백의현을 찾아냈다. 백의현 혼자 머리가 툭 튀어나와 있었으니 못 알아보기가 더 어렵기는 했다. 그리고 여수정의 말대로, 그 옆에 선 땅딸막한 중년 사내는 YK푸드의 대표 이사이자 사장인 황치택이었다.

‘나는 뿌리부터 썩은 이 회사를 뒤집어엎을 계획입니다.’

불현듯 자신의 머리 위에 그림자를 드리운 채 백의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진우의 도움이 필요하다던 말 또한. 서진우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황 사장의 뒤를 따라 걷는 백의현을 바라보았다. 저보다 키가 작은 사내의 뒤에서 묵묵히 보폭을 맞추는 백의현에게서는 어제 보았던 위압적인 기운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슨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걸까.’

백의현의 머릿속이 궁금했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백의현의 걸음 하나하나를 살폈다. 그는 오늘도 일말의 흐트러짐 없는 슈트 차림이었다.

그때 문득 백의현의 눈이 서진우를 향했다.

“!”

그 찰나에 곧은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서진우는 숨을 삼켰다. 그러나 이윽고 백의현은 무심하게 눈을 돌려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마치 서진우라는 존재는 알아본 적도 없다는 듯한 냉담한 일별.

뚜벅, 뚜벅. 고요해진 로비를 가로지르던 발걸음 소리가 곧 멈추었다. 중앙 검색대 너머에 있는 임원 전용 엘리베이터가 무리를 태우고 문을 닫았다. 황 회장과 백의현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얼어붙어 있던 로비가 다시 소란해졌다.

“와, 압박감 지린다. 오너 일가라더니 분위기 장난 아니네.”

“백 이사 키 진짜 크다. 과연 얼굴마담으로 뽑힌 인사다워.”

“아니야. 나 어디서 들었는데 백 이사도 오너 일가 일원이래.”

“뭐? 백 이사는 백 씨잖아.”

“외가인가 보지, 뭐.”

“막 이런 거 아니야? 사장이 몰래 숨겨 두었던 사생아라거나.”

“하하, 뭔 소리들을 하는 거야. 무슨 아침 드라마도 아니고.”

“하여튼 혈연은 확실하다더라. 그러니까 괜히 얼굴마담 소리 하다가 큰일 안 나게 조심하라고.”

“역시 혈연, 학연, 지연 낙하산이 최고구나. 좋겠다-. 누구는 30대에 이사 타이틀도 달고. 누구는 과장도 못 달았는데.”

“억울하면 너도 부모님한테 재벌 돼 달라고 조르지 그랬어.”

주변에 있던 이들이 저들끼리 수군거리며 킬킬대는 소리가 서진우에게까지 들렸다. 서진우는 그 이야기를 훔쳐 들으며 복잡한 기분으로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정말 백의현이 그런 사람이라면 황 사장을 굳이 왜 내치려는 걸까. 저들의 말은 그저 아무 근거 없는 소문에 불과할까? 아니라면…….

“저는 백 이사님이 단순한 낙하산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여수정의 고요한 목소리가 서진우의 상념을 끝냈다. 서진우는 여수정에게 눈을 돌렸다. 여수정은 평소처럼 무뚝뚝한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오직 서진우에게만 들릴 정도로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백 이사님은 적어도…… 회사 실무를 중요하게 여길 줄 아시는 분이세요. 라인 만들어서 잇속만 챙기려는 다른 임원들과는 분명 달라요.”

여수정의 목소리는 작았으나 힘이 있었다. 그 힘은 백의현에 대한 확신에서 오는 것이리라. 서진우는 백의현이 사라진 로비를 응시했다. 하기야 여수정이 이렇게 백의현을 신뢰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터다. 그가 당장 프로젝트를 위해 발휘하는 추진력만 해도 김 부장의 방해를 짓누를 정도이니, 손 놓고 구경만 하는 다른 임원들과는 분명 다른 점이 있었다.

“……그리고 그제 서 대리님 그렇게 사무실에서 뛰쳐나갔을 때도.”

“네?”

뜻밖의 이야기에 서진우는 놀라 눈을 내렸다. 서진우를 돌아본 여수정이 그의 의아해하는 표정을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아니에요, 이건.”

“무슨 일이…….”

“엘리베이터 왔네요, 타죠.”

어색하게 말을 돌린 여수정이 서진우가 되묻기도 전 성큼 걸음을 옮겼다. 얼떨결에 올라탄 엘리베이터가 만원이었기에, 서진우와 여수정은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눌 수 없게 되었다. 서진우는 얼떨떨한 눈으로 동그란 여수정의 뒤통수를 내려다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그제 서진우가 기획개발부 사무실에서 뛰쳐나간 뒤?

백의현이 대체 무슨 일을 했는데?

***

YK푸드의 사장실은 사옥 맨 꼭대기 층에 있었다.

언제 보아도 쓸데없이 크기만 한 사무실이었다. 대회의장만큼이나 너른 사무실 한쪽에는 골프 연습을 위한 잔디가 깔려 있었는데, 그 잔디 크기가 사무실 총 너비의 절반을 차지했다. 그리고 벽면에는 트로피와 상패, 표창장 등이 빼곡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무슨 방송사 브랜드 대상, 정부 기관 표창장 등 겉치레가 요란한 수식어들이 역겨울 정도로 과시적이었다. 이름값의 절반은 회사의 로비로 이루어졌음을 모르지 않는데도. 사무실은 그야말로 제 주인을 닮아 비효율적이고 요란스럽기만 했다.

‘이래서 오기 싫어. 기분이 나쁘다고.’

백의현이 속으로 투덜거리는 동안 비서가 그의 앞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오금이 드러날 정도로 짧은 치마가 보기에도 불편할 정도로 허벅지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보통 정장 치마는 무릎까지 오지 않나? 무심코 그렇게 생각하며 돌아서는 비서에게 시선을 주었을 때였다.

“한 비서는 참 몸매가 예뻐. 백 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맞은편에 앉아 있던 황치택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이죽댔다. 백의현은 쟁반을 든 채 한 발 물러나 선 비서를 곁눈질했다. 노골적인 성희롱을 들었는데도 한 비서라 불린 이는 무표정했다. 이런 상황을 한두 번 겪어 본 게 아닌 듯 프로페셔널한 태도였다.

비서가 모욕을 견디라고 있는 직종은 아닐 텐데. 괜스레 입맛이 써서 백의현은 제 앞에 놓인 찻잔을 집어 들었다.

“좀 추워 보였을 뿐입니다.”

직원의 몸매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는 표현을 돌려 말한 백의현이 찻잔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코끝에 닿는 가향차의 풍미가 진했다. 백의현이 소리 나지 않게 입가로 잔을 기울였다가 곧 내려놓았다. 얼마나 우렸는지 지나치게 썼다. 백의현이 잔을 내려놓자 기다렸다는 듯 황치택이 넓은 등받이에 팔을 걸며 상체를 푹 기대었다.

“북미 진출 건, 임 상무에게 맡겨.”

바로 본론이군.

“싫습니다.”

백의현이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황치택의 눈썹이 위로 솟았다.

“왜지? 백 전무, 안 그래도 할 일 많잖아. 유럽 부문도 백 전무가 전담하다시피 하고 있고. 요즘 매일같이 새벽에 출근해서 새벽에 퇴근한다던 보고를 들었는데 굳이 그 많은 일을 혼자서 끌어안을 이유가 있나? 좀 나눠 줘, 욕심내지 말고.”

“하인트 사에서 저를 믿고 거래하겠다는 말씀, 조금 전 미팅 때 듣지 못하셨습니까? 통역해 주시는 분께서 그 말은 전달해 드리지 않았던가요? 아무리 잘 풀리고 있는 거래라지만 갑자기 책임자가 바뀌면 리스크가 커집니다. 저는 굳이 그 리스크를 감당하면서까지 업무를 넘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요.”

“그 부분은 백 전무가 잘 말하면 해결될 문제 아닌가.”

“글쎄요. 전 잘 말할 자신이 없어서요.”

백의현이 우아한 자세로 잔을 재차 들어 올렸다. 입가에 잔을 가져가기 전 그가 가볍게 탄성을 토했다.

“아, 그리고 회장님께서도 이번 건은 제가 전반적으로 지휘하기를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

황치택의 입가가 움찔했다. 백의현은 그의 미간에 생긴 주름이 깊어지는 것을 구경하며 차를 마셨다. 역시나 더럽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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