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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느니 퇴사하겠습니다, 이사님!-40화 (40/150)
  • 40화

    “……그럼, 제가 팀에서 퇴출된다는…….”

    “합의를 이루지 못하면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인사과장이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서진우는 담담하게 인사과장을 바라보았다. 안경 너머의 표정은 완고하고 무뚝뚝했다.

    이미 각오한 일이었다. 회사에서는 일을 크게 만들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 뻔했다. 그러니 선택지를 주는 척 프로젝트를 인질 삼아 두 사람을 적당히 화해시키겠다는 전략을 내놓았으리라.

    “과, 과장님.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하성민이 덜컥 상체를 숙였다. 그는 평정을 잃은 표정이었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다 실수였습니다. 그때 서진우 대리님 컴퓨터가 켜져 있어서……!”

    “실수로 폴더를 삭제했다면 휴지통에서 복구했어야지요. 영구 삭제를, 그것도 남의 컴퓨터를 이용해서, 어떻게 실수로 합니까?”

    “……그건…….”

    “자꾸만 말이 안 되는 변명을 하시면 평가에 악영향만 미칠 겁니다, 하성민 대리님.”

    인사과장의 목소리가 냉랭해졌다. 서진우는 아마도 그가 심정적으로는 자신의 편을 들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기야, 회사원이라면 하성민이 한 짓이 얼마나 나쁜 일인지를 모를 리 없었다.

    하성민 또한 서진우와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드물게 흥분에 찬 그가 검지를 들어 서진우를 손가락질했다.

    “하지만 그렇게 치면 서 대리님이 컴퓨터를 안 잠그고 간 것부터가 보안 위반 아닙니까!?”

    “-하성민 대리님.”

    인사과장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그가 두 손을 깍지 껴 잡았다.

    “‘굳이’ 꼬치꼬치 따지자면 하성민 대리님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보통은’ 산업 스파이가 아닌 이상, 동료의 컴퓨터가 잠겨 있지 않은 것을 보고 파일을 건드려야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

    하성민이 입을 다물었다. 서진우는 다소 한심해하는 눈으로 하성민을 돌아보았다.

    말할수록 하성민이 불리해지는 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인사과장의 말은 당연했다. 하성민이 한 행동은 아무리 좋게 봐 줘도 고의적인 업무 데이터 손실이었다. 게다가 그것이 자신의 컴퓨터가 아닌 서진우의 컴퓨터를 이용했기에 더욱 질 나쁜 짓으로 평가된다는 사실을, 오직 하성민만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서진우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하성민에게 서진우는 동료가 아니었으니까.

    차마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기만 하는 하성민을 바라보던 인사과장이 낮은 한숨을 쉬며 서진우에게로 몸을 돌렸다.

    “서진우 대리님은 어떻게 하고 싶으십니까.”

    “……저는.”

    서진우는 잠시 고민했다. 상황을 보아하니 지금 이 분위기는 분명 서진우에게 유리했다. 하성민이 계속 멍청한 말을 하고, 그로 인해 인사과장이 조금 더 서진우의 편이 되어 준다면 이번 기회에 프로젝트 팀에서 하성민을 내쫓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별도의 징계 처분을 원치 않습니다. 하성민 대리님과 합의하겠습니다.”

    하지만 이 이후 하성민이 김 부장을 이용해 서진우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다.

    서진우는 조금 전 인사과장이 했던 말을 상기했다. 만일 하성민이 불공정 처분을 문제 삼는다면 서진우도 프로젝트 팀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고. 그 말은 아마도 협박이 아닌 진실일 것이다. 그리고 하성민은 어떻게든 서진우를 끌어내리려 애를 쓸 터였다.

    서진우는 더는 하성민에게 휘둘려 원하는 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프로젝트를 끝까지 완수해 내고, 당당하게 성공을 만끽하고 싶었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전부 묻고 갈 생각은 없다.

    “하성민 대리님이 제게 직접 사과해 주셨으면 합니다.”

    서진우가 하성민을 쏘아보며 말을 갈무리했다. 하성민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선배.”

    그의 동공이 당황으로 떨렸다. 서진우는 냉담하게 대꾸했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호칭 똑바로 하세요, 하성민 대리.”

    “…….”

    서진우의 답변에 하성민이 입을 다물었다. 서진우는 조용해진 하성민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인사과장을 향해 재차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진심 어린 사과를 들으면 없던 일로 할 수 있습니다.”

    고작 사과 한마디로 이 모든 일을 없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잃을 것 하나 없이 간단하게 해결할 방법이 생겼다. 날린 데이터? 그까짓 거 밤새워서 복구 끝냈다. 사람 패는 인간으로 오해받은 일? 어차피 위에서 CCTV 다 까 봐서 진실도 밝혔다. 사과 한 번으로 이 모든 일을 무마시켜 주겠다고 하는데, 그깟 말로 하는 사과 못 할 이유가 없었다. 하성민이 정말로 프로젝트 팀에서 쫓겨나기 싫다면야 당연히 해낼 수 있을 과제였다.

    그에게 일말의 양심이 남아 있다면 말이다.

    서진우는 가라앉은 눈으로 하성민을 응시했다. 하성민은 잔뜩 화가 난 것 같기도, 당황한 것 같기도 한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안면 근육이 일그러졌다 풀어지기를 연방 반복했다. 사과 한 번 하는 게 어지간히도 싫은 표정이었다. 하긴, 호구 새끼인 줄 알았던 놈 앞에서 납작 기는 게 어디 쉬울 리가 있을까.

    “서진우 대리님이 이렇게까지 양보하는데, 하성민 대리님도 한 번 고려해 보시죠.”

    인사과장이 은근하게 압박을 주었다. 논란 없이 원만한 화해가 이루어지기 직전이니 마음이 조급해질 만도 했다.

    하성민이 고개를 숙였다. 내면에서 격렬한 갈등이 이는 모양인지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서진우는 기가 차 내심 헛웃음을 토했다.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하는 게 그렇게 싫으면 애초에 고개 숙일 일을 저지르지 말았어야지.’

    아무리 생각이 짧다지만 이쯤 되니 진짜 회사에는 어떻게 입사했는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서진우는 그를 호인으로 알았던 과거 시절을 떠올리며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이렇게 멍청한 놈을 좋아했다고? 죽기 전 서진우 자신도 어지간히 눈이 삐었던 것이 분명했다.

    “하성민 대리님.”

    불필요한 침묵이 길어지자 인사과장이 보란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을 부르는 무감정한 목소리에 움찔 놀란 하성민이 고개를 들었다. 그가 충혈된 눈으로 서진우를 바라보았다. 빠득, 이를 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죄송합니다. 서진우 대리님…….”

    이윽고 하성민이 이를 악문 채 떨리는 목소리로 사과를 건넸다. 서진우는 책상 위로 올린 하성민의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심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전혀 만족스럽지 못한 사과였지만 안 받는 것보다는 나았으니 되었다.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마세요, 하성민 대리님.”

    그리하여 서진우는 하성민에게 사수이자 동료로서 마지막 충고를 건넸다.

    “본인 실력으로 정정당당하게 사세요.”

    그를 좋아했던 과거의 자신이 더는 부끄럽지 않을 수 있도록.

    서진우는 진심으로 아꼈던 후배이자 동료 하성민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아마 하성민은 서진우의 말이 마지막 진심인 줄도 모르겠지만.

    ***

    사옥 1층에 자리한 커피숍 카운터 너머 벽면에 달린 메뉴판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서 대리님.”

    누군가가 어깨를 톡톡 두드려 서진우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다. 언제 온 것인지 등 뒤에 여수정이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서진우는 반가이 여수정을 맞이했다.

    “아, 수정 씨. 식사 벌써 하셨어요?”

    “네. 서 대리님은요?”

    “저도 뭐 적당히…….”

    “또 김밥으로 때우신 거 아니에요?”

    안경 너머 여수정의 눈이 의심으로 가늘어졌다. 서진우는 뜨끔해 입술을 다물었다. 쌓인 업무를 처리하다 보니 점심시간을 밥 먹다 보내기가 아까워, 대충 근처에서 김밥으로 점심을 해치운 것이 사실인 까닭이었다.

    ‘김밥이 뭐가 어때서.’

    백의현도 여수정도 애꿎은 김밥만 구박한다. 서진우는 내심 볼멘소리를 투덜거리며 눈을 돌렸다. 여수정은 선뜻 제 말을 부정하지 않고 애매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하는 서진우를 흘겨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걸어 나섰다.

    “서 대리님은 뭐 드실 거예요.”

    “아, 저는 그냥 아메리카노 마실까 했……. 아니, 제 건 제가 살게요.”

    반사적으로 대꾸하던 서진우는 그를 지나치고 캐셔에게 곧장 카드를 내미는 여수정을 보고 깜짝 놀랐다.

    “됐어요.”

    무뚝뚝하게 서진우의 만류를 무시한 여수정이 아메리카노 두 잔을 주문했다.

    “제 쿠폰, 도장 세 번 더 찍으면 무료 커피 받을 수 있어요. 딱히 빚 지울 마음으로 사는 거 아니니 그냥 받아요.”

    기어코 결제까지 마친 여수정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서진우를 향해 명함 크기의 종이 쿠폰을 흔들어 보였다. 그의 말대로 명함 뒤편에는 푸른색 스탬프가 빼곡히 찍혀 있었다. 서진우의 부채감을 덜어 주기 위해 이렇게까지 부연 설명을 덧붙이니 어쩔 도리가 없다. 서진우는 결국 웃으며 여수정을 붙들었던 손을 거두었다.

    “다음번에는 제가 사겠습니다.”

    “그래요.”

    새침하게 대꾸한 여수정이 계산대 옆에 있는 픽업 카운터로 걸음을 옮겼다. 서진우가 여수정의 뒤를 따르는 사이, 카운터 앞에 멈춰 선 그가 빨대와 휴지 몇 장을 챙겼다.

    “하 대리님은 몸이 안 좋아서 반차 쓰신다더라고요.”

    “아, 그래요?”

    서진우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하성민이 무슨 일을 하든 이제 서진우는 별 관심이 없었다. 쉬고 싶으면 마음껏 쉬라지. 그러는 편이 괜히 회사에 앉아 일을 방해해 대는 것보다는 백배 나을 테니까.

    서진우의 건조한 반응에 여수정이 슬쩍 그를 돌아보았다. 어쩐지 눈치를 살피는 듯한 기색에 서진우는 담백한 미소를 되돌려 주었다.

    “대리…….”

    “284번 손님 아메리카노 두 잔 나왔습니다.”

    여수정이 입술을 달싹이는 사이, 직원이 카운터 너머로 커피 두 잔을 내밀었다. 서진우가 반색하며 커피를 집어 들었다.

    “저희 거네요. 잘 마실게요, 수정 씨.”

    “……빨대 챙기세요.”

    자연스러운 인사에 여수정이 어색한 표정으로 빨대를 내밀었다. 두 사람은 각각 커피를 손에 쥐고 나란히 카페를 나섰다.

    “……서 대리님. 괜찮으신 거 맞죠?”

    “네?”

    1층 로비로 막 나왔을 무렵이었다. 여수정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커피를 마시던 서진우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수정은 입을 꾹 다문 채 서진우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썹을 아래로 늘어뜨린 그의 표정에서 걱정스러움이 전해져 왔다.

    “그럼요, 완전 쌩쌩합니다.”

    서진우는 해맑게 대꾸하며 부러 활기차게 팔을 들어 보였다. 여수정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기에, 괜히 우울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서진우를 바라보던 여수정이 시선을 떨어트렸다.

    “어제, ……솔직히 저도 많이 놀랐어요. 그런 일이 있던 줄 정말 몰랐거든요. 과장님은 말씀하시지 않았지만, 팀원들도 당시 상황 알음알음 전해 들었고……. 다들 걱정 많이 했어요.”

    여수정이 두 손으로 커피를 매만지며 머뭇머뭇 말했다. 서진우는 겸연쩍게 팔을 내렸다. 여수정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다. 아마 강 과장과 같은 이야기겠지. 걱정했다는 말.

    “음……. 솔직히 어제는 괜찮지 않았지만, 지금은 정말 아무렇지 않아요.”

    서진우가 여수정을 향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여수정이 눈을 들어 올렸다.

    “걱정 끼쳐서 미안합니다, 수정 씨한테도, 다른 분들한테도.”

    서진우의 진심 어린 말에 여수정의 눈빛에 복잡한 감정이 깃들었다. 이윽고 그가 에휴, 하고 어깨를 늘어뜨리며 푹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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