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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느니 퇴사하겠습니다, 이사님!-39화 (39/150)

39화

“기획서를 훔치려고 했다던 일도 들어 놓고, 성실하게 일하는 것처럼 보여서 내가 방심했어. 서 대리는 이런 일 한두 번 겪어 본 게 아니었을 텐데.”

위로하듯 손등을 토닥여 주는 손길이 다정했다.

“상사랍시고 이런 것도 못 알아채고 일만 맡긴 거, 정말 미안해.”

서진우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제 다 말라 버렸다고 생각한 눈물이 다시 흐를 것만 같았다. 서진우의 표정을 확인한 강 과장이 이해한다는 양 부드럽게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래도 앞으로는 무슨 일 생기면 꼭 말을 해. 혼자서 견뎌 버릇하지 말고. 그러라고 내가 있는 거잖아.”

강 과장의 목소리가 다시금 엄격해졌다. 서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네.”

안 그러겠다고 마음먹었는데도 견디는 일이 어느새 만성이 되어 버린 모양이었다. 혼자 참고 삭이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도 몸소 체험했으면서, 그래서 강 과장 말대로 견딜 필요 없도록 원하는 이들로 팀까지 꾸렸음에도.

서진우의 긍정을 얻은 강 과장이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으로 등받이에 풀썩 몸을 기댔다.

“그래도 정말 다행이다. 나 정말 이대로 서 대리 퇴사할까 봐 가슴 졸였다고.”

“……정말 죄송…….”

“죄송하단 말 그만 듣고 싶어. 앞으로 안 그러면 되는 거야.”

강 과장이 지겹다는 듯 손까지 내저어 가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서진우는 강 과장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려는 배려가 눈에 빤히 보여서 더 말을 얹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인사부에 한 번은 가야 할 거야.”

문득 강 과장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가 푹 한숨을 쉬며 허리를 세웠다.

“서 대리가 어지간히 크게 엎고 나갔어야지. 서 대리 출근이야 뭐, 그제 어제 병가로 어떻게 처리하기는 했지만 문제는 폭력 건이야. 서 대리가 한 말이 여기저기 소문이 나서, 위에서 결국 진짜로 CCTV를 까 봤다나 봐. 그래서 아마 대대적인 분쟁 위원회까지는 아니지만, 간이로 인사부 주관 면담을 하기는 할 모양인가 봐. 서 대리 말대로 하 대리가 서 대리 없을 때 서 대리 컴퓨터 건드린 장면도 찍혔고, ……서 대리가 하 대리 멱살 잡은 영상도 나왔고.”

“그랬군요.”

서진우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하성민이 삭제했으리라는 것은 굳이 보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정말로 물증이 남아 있다니 어쩐지 씁쓸했다.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던 강 과장이 불현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 대리 그 자식…… 아니, 걔가 뭐라는 줄 아니? 폴더를 삭제한 건 맞는데, 고의가 아니고 실수였단다. 서 대리 네가 너무 화를 내니까 무서워서 사실대로 말하지 못했다나 뭐라나. 그래도 다행히 서 대리가 잘 참아 준 덕분에 폭력 사태로 비화하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강 과장이 전에 없이 비장한 표정으로 홱, 서진우를 돌아보았다.

“말 잘해야 해. 난 이 프로젝트 서 대리 없이 해낼 자신 없으니까.”

“……네, 각오하고 있겠습니다.”

서진우가 덩달아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표정을 확인한 강 과장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말해 주니 든든하네. 그럼 이제 일할 준비나 하자고. 어제 갑자기 결근한 바람에 서 대리 오늘 야근 각이야.”

강 과장이 기지개를 켜며 농담을 했다. 서진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블라인드를 걷으러 가는 상사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문득 가슴이 뭉클해졌다. 일찍 출근할 필요가 없었음에도, 강 과장은 서진우와 이야기할 시간을 만들기 위해 굳이 사무실에서 그를 기다렸다. 백의현이 백의현의 방식대로 서진우를 배려해 준 것처럼, 강 과장 또한 강 과장의 방식대로 서진우를 생각한 것이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곁에 두고서도 누구도 믿지 못했던 자신이 새삼 바보 같았다. 서진우는 괴로이 보냈던 지난 시간을 새삼 아까워하며, 강 과장을 도와 사무실을 정리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

본격적인 업무 시간이 도래하기 전 서진우는 하루 동안 쌓여 있던 일을 하나둘 처리했다. 다행히 이틀 전 가장 급한 일을 마무리 지어 두었던 터라 업무량 자체가 많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팀원들이 속속들이 사무실에 도착했다. 서진우는 그를 발견하고 놀라거나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팀원들을 웃으며 마중했다. 다행히 강 과장이 일찍부터 업무 분위기를 조성해 준 덕에 서진우에게 불필요한 질문이 쏟아지는 일은 없었다. 서진우는 불편한 상황을 뒤로 미뤄 준 동료들의 배려에 내심 고마워하며 차근차근 일들을 정리해 나갔다. 온종일 감정을 모두 쏟아 낸 뒤 기절하듯 수면한 덕분인지 몸과 마음이 한층 개운했다. 그래서인지 일이 평소보다 더 잘 되는 것 같았다.

‘아니, 꼴 보기 싫은 얼굴이 안 보여서 그런가?’

그러고 보니 출근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하성민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서진우는 빈 의자를 잠시 응시하다가 곧 눈을 돌렸다.

강 과장이 언질 준 대로, 점심시간이 도래하기 전 인사부 직원으로부터 호출이 왔다. 미리 마음을 다잡고 있던 서진우는 모니터를 끄고 비장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서진우의 말에 팀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서진우를 향했다. 안 그런 척 하면서도 역시나 서진우의 눈치를 보고 있던 모양이었다. 강 과장이 잘 다녀오라며 가볍게 턱을 까딱여 인사를 했다. 서진우는 가볍게 묵례를 되돌려 준 후 사무실을 나섰다.

꼬박 4년을 꽉 채운 회사 생활이었다. 그동안 서진우는 단 한 번도 인사부 사무실에 방문해 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서진우는 그 흔한 병가나 휴직계 한 번 내 본 적이 없었고 김 부장의 폭력적인 언행을 고발했던 적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관리직도 아닌 서진우가 인사부 사무실을 방문할 기회는 정말 사소한 심부름 정도가 아니면 생길 일이 없었다.

‘그나마도 해 본 적 없었지.’

메신저나 메일을 통해서 업무를 주고받은 적이야 당연히 있지만, 사무실을 찾아간 적은 처음이었다. 낯선 곳에 처음 방문할 때 으레 느껴지는 긴장감에 손바닥에 땀이 차기 시작했다. 서진우는 마른침을 삼키고 슬쩍 사무실을 열었다. 시끌벅적한 기획개발부와는 사뭇 다른 진중한 분위기가 그를 맞이했다.

“아, 그…… 실례합니다.”

“기획개발부 서진우 대리님이시죠?”

서진우가 겸연쩍게 주위를 둘러보기 무섭게 문 인근에 앉아 있던 남자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진우는 신입 사원이 된 기분으로 남자의 뒤를 따라 안쪽에 있는 회의실로 향했다.

“과장님께서 면담 진행하실 겁니다.”

남자가 친절하게 사무실 문을 열어 주며 말했다. 서진우는 쭈뼛대지 않으려 노력하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

어느 정도 예상하기는 했지만 회의실 안에는 하성민이 앉아 있었다. 서진우는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말없이 하성민을 바라보았다. 문 여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하성민이 서진우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하며 시선을 돌렸다.

“서진우 대리님, 앉으시죠.”

가장 안쪽에 앉아 있던 검은 정장 차림의 사내가 서진우의 주의를 돌렸다. 서진우는 사내가 가리킨 자리에 천천히 앉았다. 서진우가 제 맞은편에 자리하자 하성민은 더욱 불편해진 듯 고개를 모로 돌려 버렸다.

세 사람만 앉아 있는 작은 회의실은 퍽 고요했다. 문밖에 끊임없이 타자 소리가 들리는 사무실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서진우는 사내가 서류를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하성민을 빤히 응시했다. 바른 자세로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성민의 시선은 줄곧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묘하게 뻣뻣한 태도와 굳은 얼굴. 서진우가 연락을 두절한 사이 하성민에게도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평소의 자신만만하고 사근사근한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하성민은 조금 주눅이 들어 보였다. 단둘만 있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자기 관리를 못 하는 것 같은 하성민의 모습이 신기하고 우스웠다. 서진우가 하성민을 면밀하게 뜯어보는 사이, 정리를 마친 듯 사내가 헛기침을 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진우 대리님, 하성민 대리님. 그럼 면담을 시작하죠.”

자신을 인사부 소속 과장이라 소개한 사내가 손에 든 서류를 넓은 테이블에 늘어놓았다. 서진우는 정자세로 앉은 채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 한 장 한 장을 내려다보았다. 종이에는 지난 새벽을 촬영한 CCTV 캡처 이미지가 칸칸이 인쇄되어 있었다.

“……이렇듯 CCTV 확인 결과 서진우 대리님이 하성민 대리님을 폭행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하성민 대리님은 갑자기 멱살을 잡혀 놀란 마음에 자신이 맞은 것 같다고 착각했다고 말씀하셨죠.”

“……네.”

인사과장의 어투에 질책 등의 감정 같은 것은 전혀 섞여 있지 않았다. 그의 말은 오히려 사실 적시에 가까웠다. 서진우는 창백해진 하성민의 얼굴을 곁눈질했다. 그는 제 거짓말이 이토록 적나라하게 전시된다는 사실이 퍽 견디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그래도 아무래도 멱살을 잡은 것은 위협 행위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 부분에 관해서는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또한 하성민 대리님은 서진우 대리님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서진우 대리님의 컴퓨터를 이용해 데이터를 삭제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이는 보안 위반 행위에 해당합니다. 두 분 모두 각자가 어떤 문제를 일으켰는지 이해하셨습니까?”

“…….”

“네, 이해했습니다.”

쉬이 대답하지 못하는 하성민과 달리 서진우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사과장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서진우와 하성우를 돌아보았다. 이윽고 흠, 하고 목을 울린 그가 안경을 고쳐 쓰며 난감하다는 어투로 말을 이었다.

“두 문제 모두 징계까지 내리기는 모호한 실정입니다. 삭제한 데이터는 복구했고, 멱살을 잡은 것도 실제 폭력까지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기획개발부에서는 두 분이 합의를 하면 이 이상 문제 삼지 않겠다는 의견을 보내왔습니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권유 사항입니다. 만일 두 분 중 한 분이라도 업무에 지장이 있을 것 같다고 말씀하신다면 회사는 사규대로 즉각 두 분의 근무팀을 분리하는 조치를 시행할 예정입니다. 이 경우에는 직속 상사인 강원채 과장님의 요청에 따라, 아무래도 직접적으로 업무에 피해를 끼쳤다고 판단되는 하성민 대리님의 팀 이동을 진행할 겁니다. 하지만 하성민 대리님이 이러한 조치가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신다면, 회사는 서진우 대리님의 팀 또한 교체할 것입니다. 즉, 두 분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두 분 모두 프로젝트 팀에 더 이상 계실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성민이 홱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설마 팀에서 쫓겨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다는 듯, 그의 얼굴이 창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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