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얼마나 울었던지 눈가에 뜨끈뜨끈 열이 올랐다.
서진우는 얼굴에 찬물을 끼얹었다. 얼음장 같은 물로 세수를 하니 정신이 좀 돌아오는 듯했다. 물기를 닦아 내려 수건을 끄집어 내리다 거울 속 자신과 눈이 마주친 서진우는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전날 밤부터 엉망이었을 꼴이 그야말로 말도 아니었다. 서진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턱 끝에 맺힌 물방울을 훔쳤다.
‘이 얼굴을 하고 이사님을 맞이했다니…….’
자괴감이 들었다. 서진우는 푹 한숨을 쉬며 수건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비록 불쑥 찾아온 불청객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 추레한 모습을 하고 맞이하는 건 용기가 지나쳤다.
왜 백의현에게는 항상 이런 모습만 보이고 마는 걸까.
부끄러움에 귓불까지 화끈거렸다. 서진우는 피부를 벗겨 낼 기세로 마른 수건으로 얼굴을 벅벅 문질러 닦아 냈다. 약간 달아오른 얼굴이 얼룩덜룩 붉었다. 서진우는 망설이다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후 화장실을 나섰다.
“……가시, 게요?”
“아, 그래야지요.”
세수를 하고 나온 서진우가 멈칫했다. 백의현이 어느새 현관 앞에 서 있었다. 반질반질한 구두도 언제 다시 신었는지, 그는 처음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흐트러짐 없는 모습이었다. 서진우는 제 검지를 문지르며 쭈뼛쭈뼛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오늘 일은…… 정말 죄송하고…… 감사했습니다.”
서진우가 어깨를 움츠렸다. 소매를 매만지고 있던 백의현이 서진우를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요즘 서진우 씨에게 감사 인사를 많이 받네요, 내가.”
“……아, 하하.”
백의현의 말이 맞았다. 서진우는 일 주 전 백의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던 순간을 떠올리며 겸연쩍게 웃었다. 그런 서진우를 바라보던 백의현이 이내 현관문 손잡이를 잡아 돌리며 사무적으로 말을 이었다.
“그럼 오늘까지는 쉬는 거로 알고, 내일은 정상 출근하세요. 강원채 과장에게 그렇게 전달해 두겠습니다.”
자신을 도와 회사를 뒤엎어 달라 말했던 남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무뚝뚝한 상사로 돌아왔다. 서진우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백의현이 등을 돌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작게 네에, 했다.
“아, 그리고.”
그대로 집을 나서려던 백의현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서진우를 돌아본 그가 가볍게 턱짓을 했다.
“저거 서진우 씨 거니까 확인하세요. 식사 거르지 말고.”
마지막 당부를 남긴 백의현이 정말로 문을 열었다. 달칵, 현관문이 닫히며 자동으로 잠기는 소리가 났다.
서진우는 백의현이 떠난 자리를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백의현이 머무른 시간은 고작 반 시간 정도였을 뿐인데, 그야말로 폭풍이 휘몰아친 것처럼 정신이 아득했다. 잠시 눈을 깜박이며 생각을 정리하던 서진우는 문득 걸음을 돌렸다. 백의현의 말을 듣고 나니 잊고 있던 허기가 몰아닥쳤다.
‘왜 이렇게 배가 고픈가 했더니.’
그러고 보니 거의 꼬박 하루 반나절을 공복으로 보낸 셈이었다. 집에 먹을 게 있던가, 쓰리기 시작한 위장을 부여잡고 냉장고로 향하던 서진우가 문득 걸음을 멈춰 섰다.
‘……‘저거?’’
싱크대 옆 선반 위에 놓인 종이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백의현이 두고 간 물건이었다. 슬쩍 종이봉투의 입구를 벌려 내용물을 확인한 서진우의 눈이 둥글어졌다.
음식이 담긴 커다란 플라스틱 통 위에 가지런히 정리된 서진우의 사원증이 놓여 있었다. 서진우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가방 안에 든 것들을 꺼냈다.
“……삼계탕이네.”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한 서진우가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뽀얀 살을 드러낸 삶은 닭 한 마리가 여러 약재와 함께 통 안에 담겨 있었다. 사 온 지 시간이 제법 흘렀는데도 그릇이 아직 따뜻했다.
자신이 집에 있을지 없을지도 몰랐을 텐데, 어떻게 이런 걸 사 올 생각을 했을까.
잠시 형언할 수 없는 벅차오름에 서진우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백의현은 기이한 사람이었다. 항상 서진우 자신조차 모르는 부분을 먼저 알아차리고 필요한 것을 건네는 사람.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약한 부분을 파고들어 오는 사람.
“……왜 이렇게 잘해 주시는 거예요.”
서진우는 희미한 김이 피어오르는 식사를 내려다보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의 호의가 기뻤다. 하지만 서진우는 제 감정에 도통 솔직해질 수가 없었다. 자칫 자신이 또 잘못된 희망을 품게 될까 두려웠다.
***
백의현의 말에 설득당해 퇴사하려는 마음을 한 수 접어 두기는 했지만, 그 난리를 피운 후 멀쩡한 척 출근을 하는 데까지는 또 다른 용기가 필요했다.
서진우는 다음 날 아침, 평소보다 약 두 시간가량 일찍 깨어났다. 시간을 때우기 위해 경건하게 구석구석 몸을 씻고 평소에는 안 하던 집 청소도 열심히 했다. 그런데도 시간이 남아 버스 정류장 두어 곳까지는 걸어서 이동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회사에 도착하는 시간을 늦추려는 부단한 노력은 목적지가 회사인 이상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법이었다.
“회사가 원래 이렇게 높았나…….”
사옥 정문 앞에 서서 까마득히 하늘로 솟은 건물을 올려다보며 서진우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일찍 오니 좋은 점도 있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 눈치를 조금 덜 볼 수 있다는 점이 그러했다. 서진우는 아는 사람 눈에 띄지 않기 위해 괜히 어깨를 움츠리고 로비를 가로질렀다. 강 과장과 팀원들에게야 간단하게 죄송하다, 내일부터 정상 출근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내 두기는 했지만 그래도 마음의 준비도 없이 대면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가장 먼저 도착해서 뻔뻔하게 앉아 있자.’
조용한 사무실 복도를 씩씩하게 걸으며 서진우는 주먹을 불끈 쥐고 다짐했다. 태연한 척하면 팀원들도 그냥 넘어가 주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기대가 그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서진우는 사무실 불이 꺼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 덜컥, 부러 힘차게 문을 열어젖혔다.
“…….”
“서 대리 왔어?”
귀에 익은 목소리에 절로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서진우는 눈앞에 앉아 있는 강 과장을 보고 자리에 얼어붙었다.
“……과, 과장님.”
“안 들어오고 뭐 해? 왔으면 불 좀 켜.”
블라인드가 쳐져 있어 어둑한 사무실 속, 빛나는 모니터에만 의지해 얼굴을 밝힌 강 과장의 모습이 퍽 오싹했다. 서진우는 강 과장의 지시에 반응하는 로봇처럼 삐걱삐걱 벽을 더듬어 사무실 불을 켰다. 강 과장이 그제야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의자를 돌려 서진우를 바라보았다.
“일찍 왔네, 잘 됐다. 별일 없으면 잠깐 면담이나 할까?”
“…….”
입이 바싹 말랐다.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지만, 서진우는 얌전히 사무실 문을 닫는 것을 택했다. 갑자기 누군가가 쌀 한 가마를 등에 얹어 두기라도 한 것처럼 다리가 휘청거렸다. 주저하면서도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서진우를 강 과장은 재촉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기만 했다.
“앉아.”
강 과장이 옆자리에 놓아둔 빈 의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서진우는 공손히 의자를 당겨 앉았다. 마침내 면담할 분위기가 만들어지자, 사무실에 잠시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하고 싶은 말, 없어?”
강 과장의 목소리는 감정 없이 차분했다. 서진우는 두 무릎에 양손을 올린 채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회사에 처음 입사했을 때부터 사수와 부사수 관계로 지낸 두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서진우는 지금 강 과장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야 화가 나지 않으면 이상할 만한 상황이었다. 서진우를 애타게 부르던 강 과장의 외침을 무시하고 도망쳤던 순간이 생생했으니.
강 과장의 얼굴을 마주할 면목이 없었다. 서진우는 무릎 위에 올린 손을 꾹 말아 쥐었다. 강 과장에게만큼은 어떤 상황인지 제대로 알렸어야 했는데, 아무리 그럴 정신이 없었다지만 제 행동은 지나쳤다.
“서진우.”
강 과장의 목소리에 감정이 실리기 시작했다. 서진우는 슬쩍 눈을 들었다. 미간을 찡그린 강 과장이 어느새 완전히 몸을 돌려 서진우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가 화를 억누르며 말을 이었다.
“다시는 이렇게 행동하지 마. 업무 중간에 상사한테 보고도 않고 사무실을 이탈한 데다 그대로 무단결근까지 하다니. 너 대리 맞아? 제정신이야?”
“……정말 죄송합니다.”
“억울한 일이 있으면 억울하다고 말을 해야 알 것 아니야. 핸드폰 꺼 버리고 잠수 타는 건 누구한테 배웠어. 사회생활 일이 년 해 봐?”
강 과장의 목소리에 점점 더 힘이 실렸다. 매서운 질책에 서진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당연히 혼이 나야 마땅한 행동들이었기에 변명할 말이 없었다. 강 과장은 씨근덕대며 대답 없이 점점 더 고개를 수그리는 서진우의 정수리를 노려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드륵, 의자가 앞으로 끌리며 바닥에 구르는 소리를 냈다.
“고개 들어.”
“…….”
“서진우.”
엄한 목소리에 서진우는 주춤주춤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차마 강 과장의 눈을 마주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눈 둘 곳을 찾지 못해 흔들리는 동공을 바라보며 강 과장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어휴, 이렇게 팍 기가 죽어 있으니 무슨 말을 더 못하겠다.”
맥이 빠진 목소리로 투덜거린 강 과장이 고개를 젖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생각에 잠긴 듯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 두었던 펜을 느리게 흔들던 그가 이윽고 툭 중얼거렸다.
“걱정했어, 그렇게 가 버려서.”
서진우가 눈을 들어 올렸다. 강 과장이 천천히 고개를 정위치로 되돌렸다.
“다들 궁금해했었거든. 서 대리 일이 많긴 하지만, 그래도 밤샐 정도로 많진 않았는데, 하고. 그런데 누가 봐도 밤샌 꼴이었으니 이상해 보일 만도 했지.”
잠시 착잡한 표정으로 서진우를 관찰하던 강 과장이 시선을 떨어트렸다.
“하 대리가 파일을 삭제했을 줄은 몰랐어. 알아주지 못해 미안하다.”
“……제가 말 안 한 건데요.”
“그래도, 내가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 하 대리가 그런 짓도 할 사람이라는 걸.”
잠시 머뭇대던 강 과장이 서진우의 손을 조심스레 붙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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