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목소리가 벌벌 떨리고, 자꾸만 온몸에 힘이 빠졌다. 서진우는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눈앞의 잔혹한 남자에게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일 대로 보인 상황이었다. 우는 모습까지 보여 주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터져 나온 눈물은 이번에도 뜻대로 마르질 않았다. 제 몸인데도 도무지 통제할 수 없었다. 서진우는 제 옷자락을 구겨 쥐고 울음을 삼켰다. 뺨과 코, 턱을 타고 속절없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흐흑, 윽…….”
맞은편에 선 백의현에게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는 그저 서진우의 얼굴을 말없이 내려다볼 뿐이었다.
조금 전까지는 그만두라고 애원을 해도 무시하고 제 할 말만 했으면서, 왜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까. 차라리 당황해서 물러서거나, 우는 모습이 한심하다고 말한다면 눈물을 그칠 수 있을 것 같은데.
‘예전처럼 내게 실망했다고 말한다면…….’
지금이라면 그런 질타도 기꺼이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나 백의현은 서진우가 우는 내내 그저 가만히 그의 앞을 지키고 서 있을 뿐이었다. 서진우에게는 비난보다도 더욱 무섭고 견디기 어려운 침묵이었다.
한참을 울었는데도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렀다. 서진우는 흐느낌을 참아 보려 이를 악물었지만 그럴수록 가슴만 더 들썩일 뿐이었다. 최악이다. 서진우는 질끈 눈을 감으며 자신을 책망했다. 잇새로 히끅거리는 듣기 싫은 소리가 자꾸만 샜다.
“지난번에 이사실에서 했던 이야기, 기억합니까?”
문득 낮은 목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거의 동시에 단단한 손이 젖은 턱을 부드럽게 붙들어 올렸다.
“왜 기껏 좋은 기획안을 제출해 놓고 퇴사하려 하는지 물었던 것 말입니다.”
“……?”
타인의 손에 의해 고개가 들렸다. 흐린 시야에 빛이 깃들었다. 서진우는 눈을 깜박여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을 흘려보냈다. 백의현이 엄지로 조심스레 서진우의 눈가를 훔쳐 주었다.
“그때의 답변이 아닌, 진짜 이유가 궁금합니다.”
백의현이 서진우와 시선을 맞추며 나긋하게 물었다.
서진우는 코를 훌쩍였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머리가 멍했다. 그 당시 자신이 무어라 대답했던가. ‘그냥’이라고 말했던 것 같다. 그냥 회사에 다니기 싫어서.
잘 모르는 어색한 이에게 섣불리 상사의 험담을 하고 싶지도 않았고, 구구절절 제 상황을 변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이라는 대답은 그저 그때의 상황을 모면하고자 아무렇게나 했던 말이었다. 그런 서진우의 대답을 백의현은 지금까지도 계속 생각해 왔던 모양이었다.
“내게 말해 줄 수 없겠습니까?”
백의현이 재차 서진우의 눈가를 손가락으로 훑으며 물었다. 그의 마르고 단단한 손가락이 뺨과 턱의 물기를 부드럽게 쓸었다. 서진우는 백의현에게 맥없이 얼굴을 내맡긴 채 그의 단정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이렇다 할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제 얼굴을 매만지는 손길은 그 표정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정중하고 다정했다. 잠시 고민하듯 입술을 달싹이던 서진우가 이내 눈을 내렸다.
“……아무리 노력해도 잘하게 될 것 같지 않습니다.”
“이미 잘하고 있는데, 왜?”
백의현이 곧장 대꾸했다. 조금 전 냉랭했던 음성과는 달리 퍽 다정한 질문이었다. 서진우는 쥐고 있던 옷자락을 불안하게 쥐었다 폈다 하며 숨을 골랐다. 갈라져 떨리는 목소리 탓일까, 그의 말이 전에 없이 어눌하고 서툴렀다.
“업무적인, 그런 걸 잘하고 못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직원들과 어울리는 게 힘이 듭니다. 상사의 기대를 어떻게 충족시켜야 할지도 모르겠고……. 맞게 일하는 건지 아닌지 판단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저만 그런 건 당연히 아닐 텐데, 다들 이런 걸 버티면서 일하고 있는 것일 텐데……. 저 혼자만 너무 나약한 것 같고, 다들 당연히 하는 건데 나는 왜 안 되지……하는 생각에 빠져서 자괴감 느끼는 것도 이젠 싫습니다. 도무지 노력으로 극복할 수가 없어서 괴롭습니다. 저는 이 회사에 맞지 않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타인에게 자신을 오랜 시간 부정당하면 원망의 화살은 기이하게도 자신을 향하게 된다. 서진우는 진심으로 김 부장과 하성민이 싫었지만, 그 이상으로 자신이 미웠다.
다른 직원들이라고 모두 김 부장처럼 룸살롱 접대를 즐기는 쓰레기가 아니다. 상사의 폭언을 기껍게 받아들이는 이상 성욕자 또한 없다. 하지만 그들도 서진우와는 달리 이를 악물고 그 불편한 시간을 ‘어른스럽게’ 견뎌 냈다. 다른 사람들과 맞춰 나가는 일이 회사 생활이니까, 자신이 싫어도 견뎌 낼 줄 알아야 진정한 사회인이니까.
서진우처럼 자리를 박차고 도망치거나, 한 소리 들었다고 온종일 절망에 빠져 우울하게 앉아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데 서진우 자신은 대체 왜 이런 것들을 버텨 내기가 이토록 어려운 것일까. 어째서 다음 날 출근이 두려워서 잠 못 들 정도로 나약한 사람인 것일까. 그러면서도 갈 곳이 없어서 자신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 회사에 부득불 매달려 있어야 하는 한심한 사람인 것일까.
서진우는 이제야 깨달았다. 그는 더는 자신을 미워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 것은 타인을 미워하지 않는 것보다 몇 배는 더 많은 힘이 필요했다. 그리고 서진우는 이제 자신을 원망할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서진우는 눈을 감았다. 나이 서른이 다 되어 이런 구차한 이야기를 그다지 친하지도 않은 타인에게 주절주절 늘어놓다니. 심지어 백의현은 서진우의 징징거림을 인내심 있게 끝까지 들어주었다. 그 사실이 못내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하지만 그건 서진우 씨 잘못이 아니잖아요,”
문득 백의현의 고요한 목소리가 방 안에 내려앉은 정적을 깼다. 서진우는 눈을 떴다. 백의현은 여전히 서진우의 맞은편에 서 있었다. 그가 커다란 손바닥으로 서진우의 뺨을 감싸며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잘못된 짓을 하는 사람이 나쁜 겁니다. 그럼 나쁜 사람이 나가야지 왜 서진우 씨가 나갑니까,”
“…….”
서진우는 어쩐지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나쁜 사람이 나간다, 그야 이론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나쁜 사람이 실권을 쥔 관리자라면 일개 부하 직원이 무슨 수로 멀쩡하게 버티는 상사를 내보낼 수 있단 말인가. 서진우가 인사권자라도, 특별한 귀책사유를 찾아내지 못하는 한 직원을 함부로 자를 수는 없었다. 괜히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니니까. 지나치게 이상적인 발상에 서진우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수로…….”
“내가 하성민 잘라 줄까요?”
불쑥, 백의현이 내민 제안에 웃음이 멎었다. 서진우가 놀란 눈으로 백의현을 올려다보았다. 백의현이 고개를 슬쩍 모로 기울였다.
“역시 그 정도로는 안 되겠죠. 그럼 김석환 부장은 어떻습니까?”
“네?”
“김석환 부장, 잘라 주겠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정말로요?”
“나는 일 관련으로는 절대 농담하지 않습니다.”
백의현이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서진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야 혹하지 않을 수 없는 제안이었다. 하성민과 김 부장을 잘라 주겠다니, 그런 매력적인 제안이 다시 있을 수 있을까?
“…….”
서진우는 입술을 떼었다 다시 닫았다. 차마 그렇게 해 달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임원이라 한들 사유 없이 직원을 해고할 수는 없다. 게다가 만일 백의현이 정말 해고를 실행에 옮긴다 한들,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성민과 김 부장이 사라진들, 어차피 같을 겁니다.”
근원은 김 부장과 하성민 개인에게 있지 않았으므로.
“왜요, 김석환 부장이 황치택 사장 라인이라서?”
서진우의 체념 어린 중얼거림을 들은 백의현이 툭 되물었다. 서진우는 홱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서진우의 생각을 정확히 짚은 백의현이 놀라웠다. 소위 ‘황 사장 라인’. 김 부장이 떵떵대며 기획개발부에 군림하고 남의 기획서를 입맛대로 휘둘러 대도 아무도 반항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그 라인 때문이었다. 만일 김 부장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러 퇴출당한대도 그 빈자리는 또 다른 황 사장 라인이 채울 것이 뻔한 실정이었다. 그러니 말단 라인 두 사람이 빠진다 해서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으리라는 것이 서진우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이토록 직접적으로 입에 담을 줄은.
서진우의 굳은 표정을 마주한 백의현이 씩 웃었다. 그가 한쪽 팔을 찬장에 기댄 채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그럼 황치택 사장도 없애면 되겠습니까?”
백의현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꼭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경쾌하면서도 은밀한 음성이었다. 등줄기로 소름이 내달렸다. 서진우는 멍청히 입을 벌렸다.
‘지금 이 사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아는 건가……?’
YK그룹은 황 회장의 아버지가 세우고, 황 회장이 승계했으며, 그 손자인 황 사장이 경영권을 이어받은 전형적인 족벌 기업이었다. 즉 지금 사장직에 앉은 황치택은 황 회장이 직접 후계자로 키워 낸 친자라는 뜻이다. 그런 사람을 외부 영입 임원인 백의현이 무슨 수로 밀어내겠다는 말일까.
할 말조차 잊은 채 놀라 굳어 버린 서진우를 내려다보던 백의현이 상체를 더욱 깊숙이 숙였다. 서진우는 반사적으로 물러서려다 이 이상 뒤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잔뜩 긴장한 서진우의 얼굴을 잠시 말없이 관찰하던 백의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뿌리부터 썩은 이 회사를 뒤집어엎을 계획입니다.”
진중한 음성에 웃음기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서진우는 홀린 듯 시야를 가득 채운 백의현을 마주 보았다. 맑은 눈빛에 강렬한 힘이 있었다. 단단한 기둥이 내면에 세워진 사람처럼 단호한 백의현의 시선을, 서진우는 차마 피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을 잘하면서도, 권력에 아부하지 않을 인재가 필요합니다. 강원채 과장, 여수정 사원, ―그리고 서진우 씨. 당신 같은 사람 말입니다.”
크고 길쭉한 손이 맥없이 늘어져 있던 서진우의 손을 꽉 붙들었다. 엄지를 단단히 얽고 손바닥을 단단히 부여잡은 백의현의 손은 물에 빠져 지푸라기를 찾는 간절한 손길 같기도, 혹은 길을 잃은 어린아이를 인도하는 성인의 든든한 손길 같기도 했다. 서진우는 한 손을 옴짝달싹할 수 없이 붙들린 채 백의현을 바라보았다. 아니, 아마 백의현이 손을 잡지 않았더라도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을 터였다.
서쪽으로 기운 햇살이 창 너머로 가느다란 길을 내었다. 백의현이 햇빛에 한쪽 뺨을 내어 준 채 서진우를 응시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서진우 씨, 나를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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