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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느니 퇴사하겠습니다, 이사님!-36화 (36/150)

36화

서진우는 목까지 올라온 반문을 애써 억눌렀다. 괜히 따지고 들어 봐야 제 손해였다. 어차피 서민 노동자 체질인 서진우는 백의현처럼 대단하신 분 앞에서는 말도 잘 못 했다. 대신 서진우는 아까부터 궁금하던 질문을 했다.

“그, 저희 집은 어떻게…….”

“인사팀에서 확인해 주더군요. 설마 입사하면서 인적 사항을 가짜로 기재하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아, 네. 그렇죠. 그렇긴 한데…….”

……사원의 개인 정보를 사적인 용도로 조회해도 되는 겁니까……?

서진우는 손바닥으로 목덜미를 문지르며 당혹스러운 웃음으로 말끝을 얼버무렸다. 떨떠름해 보이는 서진우의 얼굴을 마주한 백의현이 팔짱을 끼며 말을 덧붙였다.

“이건 참고로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회사 DB에 사번 치면 보통 주소와 연락처 다 조회됩니다. 일반 사원도 접근할 수 있고요.”

“……아, 그렇죠. 맞네요. 하하…….”

서진우는 굳이, 보통은 함부로 남의 사번을 조회하지는 않는다고 반박하지는 않았다. 어쩐지 말을 하는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힘이 빠졌다. 어깨를 늘어뜨린 서진우를 말없이 응시하던 백의현이 툭, 말을 내던졌다.

“강원채 과장에게 이야기 들었습니다. 김석환 부장과 언쟁이 있었다고요.”

훅, 폐부를 찌르는 돌직구에 서진우가 입을 다물었다.

“원하는 대로 그만둬 주겠다고도 말했다던데, 내가 들은 이야기가 사실입니까?”

백의현의 어조는 조금 전과는 달리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서진우는 허공에 내버려 두었던 시선을 끌어 올려 천천히 백의현을 마주 보았다. 그는 여전히 팔짱을 끼고 책상에 기댄 채 웃음기 없는 얼굴로 서진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 아시는 내용을 다시 확인하실 필요가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서진우가 표정이 사라진 얼굴로 대꾸했다. 백의현이 흠, 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서 이대로 꼬리를 말고 도망치겠다는 겁니까?”

“…….”

서진우가 눈썹을 찌푸렸다. 말의 내용이 불편했다. 백의현이 표현을 조금 이상하게 하는 타입이라는 건 일전 회식 때도 겪어서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도망’이라니. 서진우는 대답하는 대신 입을 다문 채 백의현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백의현은 서진우의 시선이 따갑기는커녕 간지럽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가 여전히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재차 말했다.

“김석환과 하성민에게 갚아 주지도 못한 채 회사 생활 끝낼 생각입니까?”

“그만하세요.”

물에 잠긴 듯 가슴이 갑갑해졌다. 서진우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가라앉은 줄 알았던 감각이 돌을 맞은 흙탕물처럼 단숨에 다시 떠올랐다.

“문제의 CCTV, 제가 직접 확인해 보았습니다.”

백의현이 책상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바로 섰다.

“그날, 그 밤에 있었던 일 전부 찍혀 있었습니다. 서진우 씨의 증언대로, 서진우 씨가 자리를 비운 사이 하성민 대리가 서진우 씨의 컴퓨터를 만지는 장면이 똑똑히 찍혀 있더군요. 그 후 약 15분 뒤 돌아온 서진우 씨가 하성민 대리의 멱살을 잡는 장면도.”

손끝이 떨렸다. 숨이 조금씩 벅차오르며 급격히 속이 메스꺼워졌다. 서진우는 이를 악물고 손바닥으로 가슴을 꾹 눌렀다. 평정심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밀려드는 기억이 자꾸만 신체 제어를 방해했다. 자신을 보며 비열하게 웃던 하성민, 별안간 뺨을 감싸고 비명을 지르던 모습,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던 경비의 경멸이 가득한 눈빛…….

“솔직히 감탄했습니다, 나라면 때렸을 텐데.”

“……?”

숨구멍을 확보하기 위해 가슴을 부여잡고 있던 서진우가 이어진 말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자제력이 대단하더군요.”

초점이 돌아온 서진우와 눈을 마주친 백의현이 씩 웃어 보였다.

“덕분에 일이 쉬워졌습니다.”

“……무슨 일이요?”

“서진우 씨의 복귀 말입니다.”

백의현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충동에 몸을 내맡기지 않은 덕에, 회생할 길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백의현의 말인즉슨, 회사로 돌아오라는 뜻이었다. 서진우에게 그가 겪은 일을 없는 셈 쳐 줄 테니 뻔뻔한 얼굴로 돌아오라고 하는 말이었다.

반발심이 치솟았다. 서진우가 겪은 일을 모두 보았다고 말하면서도 그를 붙잡을 생각을 한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서진우는 대단하신 전무이사님께서 직접 붙잡아야 할 정도로 대단한 인재도 무엇도 아니었다. 이는 뒤집어 말해, 서진우가 회사에 대단하게 충성해야 할 의무 또한 없다는 뜻이었다. 서진우는 백의현을 노려보았다.

“아뇨, 회생 같은 거 필요 없습니다. 복귀하지 않을 거니까요.”

“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 오해를 산 것도 모자라 기어이 불명예 퇴직까지 하겠다는 겁니까?”

백의현이 곧장 되물어 왔다. 서진우의 의사를 짓뭉개는 듯한, 지극히 고압적인 태도였다. 서진우는 반항적으로 백의현을 쏘아보며 대꾸했다.

“어차피 돌아가 봐야 결론은 같을 텐데 버텨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 그러고 싶은 의지도, 기력도 없고요.”

“프로젝트도 이대로 그만두겠다?”

백의현이 낮은 목소리로 폐부를 찌르는 질문을 던졌다. 서진우는 움찔, 입을 다물었다. 백의현이 가라앉은 눈으로 서진우를 탐색했다. 그 시선이 백의현 특유의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주눅이 들었다. 시선을 피하는 서진우에게 눈을 고정한 채 백의현이 고저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이제 시제품 생산 들어가는 프로젝트를 무책임하게 그만두겠다니, 제가 사람을 잘못 본 겁니까? 서진우 씨가 그렇게 책임감 없는 분일 줄은 몰랐습니다.”

“―그건, 그건…… 제 후임을 뽑으시는 동안 어떻게든 인수인계를.”

서진우가 둘 곳 없는 시선을 정처 없이 헤매며 더듬더듬 변명했다. 백의현이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왔다. 저벅, 묵직한 걸음 소리에 서진우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낙천적이시군요, 서진우 씨는.”

백의현의 목소리는 지극히 사무적이었다. 저벅, 그가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서진우는 초조하게 뒤로 물러섰다.

“서진우 씨가 그만두면 서진우 씨 믿고 프로젝트 총괄을 맡아 준 강원채 과장이 가장 먼저 힘들어질 겁니다. 폭행 사건으로 기안자가 불명예 퇴직을 했으니 당장 프로젝트 존속 여부가 불분명해지겠지요. 기껏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엎어지면 강원채 과장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하이에나 같은 윗대가리들이 강원채 과장을 잡아먹으려고 안달이 난 마당에.”

“…….”

“아, 여수정 씨도 어떨지 모르겠군요. 프로젝트팀에 들어오기 위해 조윤기 과장을 들이받다시피 했다고 들었는데. 마케팅부에서 친한 사람도 많이 없다지요? 다 조윤기 과장 눈치 보느라 여수정 씨를 기피하는 분위기라고요. 프로젝트가 엎어지면 여수정 씨는 다시 조윤기 과장 밑으로 돌아가야 할 텐데, 지저분한 조윤기 과장이 얼마나 물어뜯어 댈지 짐작이 잘 가지 않는군요.”

백의현은 느리지만 분명한 걸음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불안함에 심장이 쿵쾅쿵쾅 자꾸만 요동을 쳤다. 서진우는 눈앞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비틀비틀 뒷걸음질 쳤다. 더는 백의현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백의현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김기호 주임과 임상하 씨는 상심이 크겠군요. 한 달간 준비하던 일을 외부 요인 탓에 엎는 게 퍽 기분 좋을 리는 없으니까 말입니다. 당장 다음 분기 인사 평가를 걱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하성민 대리 하나는 괜찮겠네요. 철저히 피해자 입장에 서서 김 부장의 보호를 받을 테니.”

“그만, 그만 좀 하세요…….”

덜컥, 서진우의 등이 싱크대에 부딪혔다. 이제 서진우는 장거리 달리기를 끝낸 사람처럼 헐떡이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이제 한 발자국 더 다가가면 가슴팍이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백의현은 제 목을 부여잡은 채 괴로워하는 서진우를 냉엄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서진우 씨는 불명예 퇴직자로 기록이 남아 다른 곳에서도 취업이 어려워질 겁니다. 정말 그것이 진정으로 서진우 씨가 원하는 결말입니까?”

“…….”

서진우는 고개를 떨군 채 이를 악물었다.

서진우라고 바보가 아니다. 그 또한 백의현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아등바등 버텨 오지 않았는가. 그 자신이 나가면 사람들에게 폐를 끼칠까 봐 미안해서. 불투명한 미래에 자신을 내던질 수 없다는 불안감에.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모욕을 계속 견뎌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건 너무 잔인했다.

“나더러 어쩌라고요.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데, 이대로라면 정말 죽어 버릴 것 같은데…….”

서진우의 발과 발 사이로 툭,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저도 이제 한계입니다, 도저히 버틸 수가 없단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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