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죽느니 퇴사하겠습니다, 이사님!-35화 (35/150)

35화

누군가가 심장을 마구 난타해 대는 것 같았다. 명치 부근이 욱신거려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부자연스러운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고막을 꽉 메운 통에 주변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서진우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황망하게 대로변을 정처 없이 걷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택시를 잡아탔다. 집 주소를 대자 가까운 거리를 택시 타냐며 투덜대던 기사가 백미러로 서진우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서진우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만일 한 번만 더 못된 말을 들었다면, 그의 머리는 자극을 이기지 못하고 펑 터져 버렸을 것이다.

집까지 돌아오는 사이에도 핸드폰은 끊임없이 울려 대고 있었다. 대부분이 강 과장과 여수정의 전화였지만, 간혹 모르는 번호도 보였다. 서진우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충동적으로 핸드폰을 끄고 책상 위에 내던져 버렸다.

참을 만큼 참았다. 말 그대로 죽을 때까지.

전신에 힘이 빠져 서진우는 침대 위에 풀썩 드러누웠다.

불건전한 회식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해도, 기획을 내는 족족 불합리하게 반려당해도, 사람들 앞에서 모욕을 당해도, 울면서 혼자 새벽 사무실을 지키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어도, 심지어는 기획서를 눈앞에서 빼앗겨도 참고 견딘 결과는 결국 서진우 자신의 죽음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살아 보려 노력했다. 정말 다시는 자신이 납작하게 짓밟히는 경험을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랬는데 그 노력의 결과가 결국은 이것이었다.

죽을힘을 다해 발버둥 쳐도 어차피 똑같은데……. 왜 노력을 해야 할까?

익숙해진, 하지만 한동안은 잊고 살았던 체념이 고개를 들었다. 서진우는 멍하니 휑뎅그렁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12월, 끔찍한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눈을 떴을 때도 그는 이 천장을 보았었다.

‘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는 행복했던 것 같은데…….’

회사와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9평 오피스텔은 빈말로라도 크다고는 할 수 없는, 분리형 원룸에 가까운 집이었다. 하지만 막 취업한 20대 중반이었던 당시의 서진우는 희망에 차 있었다. 이곳에서 4년만 보내면 더 넓은 집으로 이사할 수 있으리라. 운이 좋다면 회사 인근, 두 칸짜리 방이 있는 집을 매매할 수도 있겠지. 그런 원대한 꿈을 꾸며 설렘에 의욕을 다지던 시기도 분명 있었더랬다.

눈가가 급격히 뜨거워지더니 별안간 눈물이 터져 나왔다. 서진우는 관자놀이를 타고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거칠게 훔쳐 냈다. 그러나 한 번 터진 울음은 멈출 줄을 모르고 거세지기만 할 뿐이었다. 끝내는 호흡이 가빠 올 정도로 가슴까지 뜨거워졌다.

서진우는 어깨를 떨며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괴로움과 회한, 분노와 서러움 등이 난잡하게 뒤섞여 머릿속이 새까매졌다. 급기야는 서진우조차 제 감정을 모르게 되었다. 그저 결국은 이렇게 엉망으로 끝이 났구나, 하는 생각만이 복잡한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오를 뿐이었다. 서진우는 엉엉 울며 몸을 옹송그렸다. 나약한 스스로가 비참해서 싫었다.

***

언제 잠이 들었던 걸까?

멀리서부터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진우는 서서히 정신이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눈꺼풀이 뜨끈뜨끈하고 무거웠기에 물리적인 의미로 눈을 뜨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얼마나 잔 거지.’

서진우는 퉁퉁 부은 눈을 간신히 떠서 가물가물한 시야를 확보했다. 습관적으로 머리맡을 더듬었지만 핸드폰은 어디로 갔는지 잡히지 않았다. 서진우는 한숨을 쉬며 몸을 뒤척였다. 점차 시야가 뚜렷해지고 마침내 벽에 걸린 시계가 온전히 보였다.

‘……1시?’

새벽 1시인가. 생각하던 서진우는 이내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창 너머로 훤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잠시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누워 있던 서진우는 문득 어제의 기억을 떠올리고는 탄식하며 손바닥으로 눈가를 덮었다.

“미친, 몇 시간을 잔 거야.”

잔뜩 갈라져 듣기 싫은 목소리가 입술을 타고 힘없이 흘러나왔다. 설마 하루를 꼬박 잠으로 날릴 줄은. 잠시 눈을 가린 채 갈등하던 서진우는 겨우 생각을 마치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

책상 위에 던지듯 올려 두었던 핸드폰이 싸늘했다. 서진우는 주저하며 전원이 꺼진 기기를 집어 들었다.

다들 놀라고 당황했겠지. 걱정했을까. 아니, 어쩌면 잔뜩 화가 났을지도 몰랐다. 자신이었더라도 그랬을 테니까.

상사와 다투고 홧김에 잠수 퇴사라니, 요즘 사회 초년생도 하지 않을 짓이었다. 그런데 대리 이 년 차인 서진우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질렀다. 누구라도 어이없어하지 않을까. 서진우는 참담한 기분으로 핸드폰의 전원을 켰다.

한동안 잠들어 있던 핸드폰 액정이 곧 환한 빛을 발했다. 서진우는 초조한 기분으로 부재중 연락을 확인했다. 핸드폰이 켜져 있을 때 걸려 온 전화만 열몇 통이었고, 꺼진 사이 수신한 메시지도 백여 건이나 쌓여 있었다. 서진우는 무거운 손가락을 움직여 메시지를 훑어 내렸다. 어디냐, 왜 전화를 안 받냐, 문자 확인하면 전화를 달라……. 강 과장을 포함, 프로젝트 소속 팀원들이 남겨 둔 메시지가 번갈아 가며 이어졌다.

‘연락……해야겠지.’

서진우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 자신 또한 알고 있었다. 떠날 때 떠나더라도 이런 방식은 잘못되었다. 적어도 팀원들에게만큼은 사정을 설명하고, 인수인계할 시간을 가졌어야 했다.

‘……우선 강 과장님께라도 연락드리자.’

다행히 중요한 일들은 어제 회의 시간에 정리했고, 잡다한 다른 일들은 메일을 통해서 문서로 공유할 수 있을 터였다. 게다가 자신을 믿고 프로젝트를 떠맡아 준 강 과장에게는 제대로 사과해야 했다. 서진우가 머뭇거리며 막 연락처 버튼을 눌러 강 과장의 번호를 찾았을 때였다.

지이잉, 핸드폰이 진동했다.

“!”

서진우는 하마터면 놀라 핸드폰을 떨어트릴 뻔했다. 그도 그럴 것이, 화면 위에 떠오른 이름이 전혀 생각조차 않았던 이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배, 백의현 이사님……?”

저장된 이름을 소리 내어 읽은 서진우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필이면 왜 이 사람이?

‘받지 말자.’

언제 망설였던 적이 있냐는 양 신속한 기세로 결정을 내린 서진우가 불안한 마음으로 핸드폰을 노려보았다. 서진우가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자, 한참을 손 안에서 진동하던 핸드폰이 곧 고요해졌다. 서진우는 한숨을 삼키며 다시 강 과장에게 연락하기 위해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때 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서진우는 반사적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것이 강 과장에게 전화를 거는 버튼이 아닌, 들어온 전화를 받는 버튼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통화가 연결된 후였다.

‘젠장, 뭐냐고!’

흐르기 시작한 통화 시간을 내려다보며 서진우는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한 번 안 받았으면 단념해야지, 왜 바로 다시 거느냔 말인가!

이러한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화기 너머는 고요했다. 서진우는 폭발물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귓가에 가져다 댔다.

“……여, 보세요?”

누가 들어도 잠에서 덜 깬 듯, 갈라지고 새된 목소리가 볼품없이 떨렸다. 서진우는 뱃속이 타들어 가는 듯한 긴장을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드디어 받네요.

들려온 음성은 산뜻하다 못해 호쾌했다. 무단결근을 한 직원을 추궁하는 전화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태평함에 서진우는 제 귀를 의심했다. 뭐지? 아직 소식을 못 들었나? 하긴, 전무이사급 임원에게 일개 사원 한 명이 잠수 퇴사를 한 게 뭐 얼마나 대단한 이슈라고. 일말의 희망과 뒤섞인 의구심이 비죽 고개를 들었다. 서진우는 슬쩍 핸드폰을 곁눈질했다.

“……예, 안녕하세요……. 그런데 그, 무슨 일로…….”

―일어났으면 문 좀 열어 주겠습니까? 서진우 씨 집 앞입니다.

“……네?”

서진우는 멀거니 눈을 깜박였다. 문을 열어 달라니. ……집 앞이라니?!

덜컹, 실수로 책상을 걷어찬 탓에 정강이가 얼얼했다. 서진우는 당황해서 부딪힌 다리를 절며 뛰다시피 현관으로 향했다.

“이게, 무슨…….”

인터폰 통화 버튼을 눌러 화면을 켜자 정말로 문 앞에 누군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비록 다부진 상체가 카메라 앞을 가로막은 탓에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서진우는 그가 백의현임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인터폰 너머에 선 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잘 정돈된 정장 차림이었다. 그리고 서진우가 아는 사람 중 이런 후덥지근한 한낮에도 흐트러짐 없이 의복 격식을 지킬 만한 인물은 백의현뿐이었다.

‘진짜잖아?!’

서진우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현관문을 열어 눈앞에 선 상사를 맞이했다.

“다행입니다. 집에 없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백의현이 싱긋 웃으며 귓가에 대고 있던 핸드폰을 내렸다. 서진우는 통화가 종료된 핸드폰을 여전히 손에 쥔 채 얼떨떨하게 입을 열었다.

“이, 사님께서 여긴 어떻게……?”

“일단 들어가도 될까요? 손이 무거워서.”

백의현이 손에 든 종이 가방을 들어 올려 보이며 서진우의 말을 가로막았다. 서진우는 등 떠밀린 사람처럼 어영부영 모로 비켜섰다. 백의현이 그런 서진우를 지나쳐 자연스레 집 안으로 들어섰다. 갑자기 불쑥 낯선 집을 찾아온 사람답지 않은 태연한 태도였다.

왜 온 거지? 어떻게 여길 알고?

수많은 의문이 머릿속을 꾸역꾸역 채웠다. 서진우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워하며 백의현을 돌아보았다. 백의현은 어느새 손에 들고 있던 종이 가방을 싱크대에 내려놓고 방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아담하고 귀여운 집이네요. 서진우 씨와 어울립니다.”

“아, 감사……합니다. 그런데…… 정말 어쩐 일로……?”

욕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에 어색하게 감사를 표하며 서진우가 초조하게 두 손을 모았다. 백의현이 서진우를 흘끔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아아, 서진우 씨가 사라진 일로 회사가 발칵 뒤집혔거든요. ―라고까지 말하는 건 좀 과장이고.”

서진우의 얼굴에 핏기가 가시는 것을 확인한 백의현이 농담을 거두었다. 그가 책상에 가볍게 허벅지를 기대어 섰다.

“중간 점검차 프로젝트팀을 방문했더니 사원들이 걱정 때문에 일이 손에 안 잡힌다기에, 소식도 전할 겸 살아 있는지 확인도 할 겸 찾아왔습니다.”

서진우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아니, 저게 대체 말이 되는 설명인가? 직속 상사도 아닌 전무이사가 직원 하나 날랐다고 직접 집에 찾아온 것도 황당한데, 그 이유가 고작 그가 살아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서진우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백의현의 말은 질문에 대한 답이 전혀 못 되었다. 서진우의 불만스러운 표정에서 이러한 항변을 읽어 낸 백의현이 어깨를 으쓱 추어올렸다.

“다들 워낙 바쁘잖아요.”

……이사님은 안 바쁘시고요?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35)============================================================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