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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느니 퇴사하겠습니다, 이사님!-34화 (34/150)

34화

그동안 켜켜이 쌓아만 두었던 기억이, 감정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서진우는 홱 고개를 쳐들고 김 부장을 형형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억울하고 분했다. 백 보 양보해서 멱살을 잡은 것은 맞다. 하지만 결코 손을 올린 적은 없었다. 서진우의 눈빛을 마주한 김 부장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서진우는 이를 악문 채 하성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하성민 대리가 뭐라고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어, 어허, 일이 다 밝혀졌는데도 하 대리 탓을 할 생각을 해?”

조금 주눅이 든 것처럼 헛기침한 김 부장이 재차 언성을 높였다.

“하 대리는 그런 이야기 입도 벙끗 안 했어! 보안 팀에서 연락 온 거야, 경비가 새벽에 그런 현장을 발견했다고! 하 대리가 착해서 이대로 넘어갔으면 그냥 묻고 지나갈 생각이었던 거잖아. 그러면서 뻔뻔하게 어딜 눈을 치켜뜨고 대드나!”

김 부장은 자신의 이야기에 스스로 힘을 받는 듯했다. 종국에는 씩씩대며 삿대질을 하는 김 부장을 보며 서진우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어처구니가 없어 가슴이 답답했다. 그야 하성민이 경비 앞에서 맞은 척을 했으니 경비야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진우는 맹세코 결백했다.

서진우의 눈길이 절로 하성민을 향했다. 힐난하는 시선을 마주한 하성민이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서진우는 그가 표정을 감추기 전 분명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고 확신했다. 어이가 없었다. 저 자식이 순하고 착해 빠졌다고? 그러나 하성민의 표정을 보지 못한 김 부장은 그저 서진우가 잘못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하기야, 하성민의 표정을 봤다고 해도 서진우의 말을 믿어 줄지는 모를 일이었다. 김 부장은 그저 서진우를 내쫓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이었으니까.

“서 대리, 그래도 성격은 괜찮은 줄 알았는데 아주 못돼 먹었어, 그냥. 사람을 때리고도 쉬쉬하며 넘어갈 생각이나 하고 말이야. 내가 그런 꼴을 가만히 두고 볼 것 같나? 절대 그렇게는 안 되지.”

김 부장은 급기야 신이 난 것 같았다. 보란 듯이 검지로 삿대질을 해 가며 호통을 치는 꼴이 같잖아서 견디기가 어려웠다. 서진우의 표정이 차가워질수록 김 부장의 얼굴에 뜨거운 열이 올랐다. 이윽고 그가 클라이맥스를 노래하는 연극배우처럼 목에 핏대를 세우며 노호했다.

“서진우 너, 이번에야말로 큰코다치게 해 줄 거야, 알아들었어?!”

하.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서진우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김 부장이 눈을 둥글게 떴다.

“웃어? 이게 웃어?”

김 부장이 왁왁 소리를 쳐 댔다. 하지만 더 이상 서진우의 귀에는 어떤 말도 닿지 않았다.

결국 김 부장의 목적이란 고작, 서진우의 콧대를 꺾어 놓는 것이었다.

손에 힘이 빠졌다. 서진우는 눈을 감았다. 애초에 대단하게 콧대를 높여 보기라도 했으면 이해라도 하겠다. 하지만 이 회사에 다니는 동안 서진우는 단 한 번도 자존심을 세워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대체 뭘 꺾어 놓겠다는 말일까. 하성민도, 김 부장도 서진우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인간들이었다.

“진짜야? 서 대리가 하 대리를 때렸다고?”

“미쳤나 봐……. 왜 그랬지?”

문득 등 뒤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진우의 인내심이 마침내 툭, 끊어졌다.

“제가 때렸다는 증거 있으세요?”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김 부장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뭐? 이게 뻔뻔하게…….”

“CCTV는 찾아보셨어요? 제가 안 때렸다는 건 그것만 보셔도 아실 텐데요.”

김 부장의 말허리를 자른 서진우가 냉담한 눈으로 김 부장을 응시했다. 김 부장이 입을 다물었다. 서진우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안 보셨나 보네요.”

김 부장이 헛기침을 했다. 그 태도를 보아하니 분명했다. 김 부장은 CCTV를 직접 확인하지 않았다. 아마 봤더라도 멱살 잡는 장면이나 좀 확인하고 얼씨구나, 서진우를 소환해 냈을 것이다.

앞뒤 정황을 확인했더라면 서진우가 하성민을 때리지 않았다는 것도, 나아가 하성민이 서진우의 컴퓨터를 함부로 건드렸다는 것도 알 수 있었을 텐데.

자꾸만 웃음이 터져 나와 견디기 어려웠다. 어깨를 떨며 웃는 서진우를 보며 김 부장이 상체를 거칠게 앞으로 디밀었다.

“지금 웃음이 나와? 이게 어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그럼 감고 이야기할까요?”

서진우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말문이 막힌 김 부장이 손가락을 거두며 입을 다물었다. 한 번도 서진우가 이런 식으로 대드는 것을 본 적이 없었으니 그야 당혹스럽기도 할 것이다.

서진우는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저 자극적으로 자신을 물어뜯는 데에만 열중해, 전후 사정 따위는 파악조차 하려 않는 상사에게 진절머리가 났다.

“그냥 까놓고 말씀드릴게요.”

다 싫었다. 프로젝트를 지키고 싶어서 아등바등한 지난밤이 우스워질 정도로. 열심히 하면 뭘 할까, 결국 서진우의 상사가 김 부장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텐데. 서진우가 얼마나 좋은 결과를 내놓든 김 부장은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더더욱 서진우를 끌어내리기 위해 호시탐탐 꼬투리나 잡아 대겠지.

“하성민 대리 멱살 잡은 거, 맞습니다.”

그럼 이 회사를 더 다닐 이유가 있을까?

서진우의 폭탄 발언에 등 뒤에서 헉, 하고 숨 삼키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서진우에게 중요한 이는 등 뒤의 관중이 아니었다. 그가 어안이 벙벙해진 김 부장과 놀란 눈을 한 하성민을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멱살 잡은 건 맞는데요, 때린 적은 없습니다.”

“그럼 멱살은…….”

“왜 잡았냐고요? 저 자식, 아니, 하성민 대리가 프로젝트 데이터 파일을 폴더째로 삭제해 버렸거든요.”

사무실에 소름 끼치는 정적이 일었다. 김 부장을 포함한 모두의 시선이 서진우에게서 하성민에게로 쏠렸다. 이때껏 김 부장의 의자 뒤편에 서 있던 하성민이 황급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선배, 그러니까 그건 오해라고―.”

“내가 오해를 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그거? 일말의 거짓말 없이?”

서진우가 냉담하게 하성민의 변명을 가로채 되물었다. 서늘한 기세에 짓눌린 하성민이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서진우는 다시금 김 부장을 돌아보았다.

“그렇게 제 코를 납작하게 해 주고 싶으시면 CCTV 까 보세요. 그리고 기왕 까는 김에 오후 9시 12분까지 앞으로 돌려서 봐 주십시오. 하성민 대리가 제 컴퓨터에 접근한 기록이 분명 남아 있을 테니까. 그 시간과 데이터가 삭제된 시간을 대조해 보면 답이 나오겠죠. 제가 정말 아무 이유도 없이 하성민 대리의 멱살을 잡았는지, 뺨이라도 올려붙인 적이 있는지!”

냉정하게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점차 화가 났다. 이 불합리한 상황을 만인의 앞에서 해명하고 있어야 하는 자신이 비참하고, 그를 이 지경까지 몰아붙인 두 사람이 증오스럽고 미웠다.

이미 끓어오른 감각들이 활화산처럼 터져 나와 전신을 뒤덮었다. 서진우는 주먹을 말아 쥔 채 소리쳤다.

“애초에 알아볼 생각은 하셨어요? 저를 혼내시기 전에 앞뒤 정황을 확인해 볼 생각은요? 이렇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소리칠 게 아니라, 따로 불러서 면담하시는 게 정상 아닙니까? 하성민이 순하고 착해요? 그렇게 순하고 착한 사람이면, 맞을 짓을 했는데도 안 때린 저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게 어디서 상사한테 소리를 질러!”

김 부장이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빽 화를 냈다. 서진우가 지지 않고 맞불을 놓았다.

“그럼 상사가 아니면 되겠군요!”

고함을 친 서진우가 목에 걸고 있던 사원증을 벗어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달그락, 플라스틱 사원증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뒹굴었다.

싸늘한 고요가 사무실을 몇 초간 가로질렀다.

“너, 너, 지금 이게 뭐 하는…….”

김 부장이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지나치게 화가 난 탓인지, 혹은 너무 놀란 탓인지 그의 안색이 새하얬다. 서진우는 차갑게 대꾸했다.

“두 분이 그토록 원하시는 게 이거 같으니, 제가 그만둬 드리겠습니다. 이제 김 부장님은 제 상사가 아니니까 어떤 말도 할 수 없겠군요.”

냉정한 내용과는 달리 목소리가 떨렸다. 숨을 쉴 때마다 시야가 새하얗게 사라졌다가 되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머릿속은 이러면 안 된다고 외치고 있었지만,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도무지 제어할 수가 없었다.

서진우는 김 부장의 답변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돌렸다. 세 사람을 구경하던 눈들이 황급히 파티션 너머로 사라졌다. 하지만 서진우는 그들이 자신을 구경거리 삼든 말든 상관없었다. 이제 정말 아무래도 좋았다.

“서, 서 대리! 이게 무슨 일…….”

뒤늦게 소식을 들었는지 강 과장이 헐레벌떡 사무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서진우는 제 손을 붙들려는 강 과장의 손길을 피했다.

“……죄송합니다, 강 과장님. 더는…… 못 하겠어요.”

기세 좋던 조금 전과는 달리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린 서진우가 뛰다시피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저, 저, 저!”

“서 대리, 진우 씨!”

뒤늦게 씩씩대는 김 부장과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강 과장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지만 도저히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서진우는 짐도 챙기지 않은 채 도망치듯 회사를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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