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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느니 퇴사하겠습니다, 이사님!-33화 (33/150)

33화

“……님, 대리님!”

서진우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누군가가 제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서진우는 비몽사몽인 정신을 힘겹게 깨웠다. 흐린 시야 너머로 안경을 쓴 이의 형체가 보였다.

“여기서 주무신 거예요?”

놀란 듯한 목소리를 듣고서야 서진우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서진우가 무거운 머리를 힘겹게 들어 올리며 허둥댔다.

“수, 수정 씨 왔어요? 지금 몇, 몇 시예요?”

“여덟 시 이십 분이요.”

여수정이 나사 하나 빠진 것처럼 우왕좌왕하는 서진우를 보며 걱정스럽게 대꾸했다. 서진우는 검지로 눈을 문질러 간신히 명료한 시야를 확보했다. 모니터 화면에 디자인 중이던 발표 자료가 한가득 떠올라 있었다.

“아, 이런. 아직 다 못 했는데.”

서진우가 두 손에 푹 얼굴을 묻으며 괴로워했다. 문서 양식을 어찌어찌 맞추고, 발표 자료를 제작하던 중 까무룩 잠이 들어 버린 모양이었다. 등 뒤에 선 여수정이 모니터와 서진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밤을 새워야 할 정도로 일이 많으셨어요? 그럼 어제 말씀을 하시지. 도와 드렸을 텐데요.”

“아니, 그런 건 정말 아니었는데…….”

“그럼 왜 혼자 밤을 새우신 거예요? ……하 대리님은요?”

어리둥절해하던 여수정의 눈빛이 불현듯 날카로워졌다. 서진우는 황급히 고개를 들어 여수정을 돌아보았다.

“아……. 그게, 사정이 좀 있었습니다.”

“무슨 사정이요?”

“설명하기 어려워요. 그냥……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도 중요한 건 다 했으니.”

여수정이 미심쩍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서진우는 간밤의 일을 팀원들에게 이야기할 생각이 없었다. 하성민이 작업하던 파일을 통째로 지웠고, 이로 인해 자신이 그의 멱살을 잡아 몸싸움을 벌일 뻔했다는 이야기는 자칫하면 팀 내에 큰 분쟁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아무도 모르는 게 나았다. 서진우는 어색하게 웃으며 분위기를 돌리려 애썼다. 그런 서진우를 가는 눈으로 탐색하듯 바라보던 여수정이 곧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삼키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기 싫으신 거면 안 물어볼게요.”

예기가 사라진 목소리는 둥글었다. 서진우는 고맙다는 뜻으로 씩 웃어 보였다. 답답하다는 듯 서진우를 흘겨본 여수정이 옆자리에 놓인 빈 의자를 끌어당겼다.

“대신에 도울 일 있으면 알려 주세요. 없다고 하지 마시고요.”

“사양하고 싶지만…… 솔직히 도와주시면 감사하죠.”

이럴 땐 빼는 게 오히려 민폐였다. 서진우는 자리를 조금 비켜서 여수정이 앉을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성큼 의자에 걸터앉은 여수정이 모니터를 향해 상체를 숙였다. 달칵, 달칵. 마우스를 움직여 가며 빠르게 발표 자료를 훑어본 여수정이 서진우를 돌아보았다.

“내용은 다 만드셨네요. 디자인만 완성하면 되는 거죠?”

“네. 그리고 가능하다면 인사이트를 한 번 손볼 생각입니다.”

“알겠어요. 이 파일은 저한테 보내 주시고 서 대리님은 내용상 손볼 부분 채워 주세요. 9시 전까지 끝내 보죠.”

사무적으로 업무 분배를 마친 여수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진우는 곧장 본인 자리로 향하는 여수정을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정말 같이 일하는 보람이 있는 동료였다. 서진우는 여수정에게 고맙다는 말과 함께 파일을 보낸 후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제때 못 끝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덕분에 모두가 출근하기 전까지 충분히 마무리 지을 수 있을 성싶었다.

야무진데다 손이 빠르기까지 한 여수정의 도움 덕분에, 보고서와 발표 자료 모두 그럴듯하게 끝이 났다. 서진우가 전체 메일을 보냈을 때쯤 다른 팀원들도 하나둘 출근을 시작했다. 강 과장과 김기호, 임상하에 이어 하성민까지 출근을 완료하고 본격적인 하루가 시작되었다.

하성민은 오전 내내 아닌 척 은근슬쩍 서진우를 곁눈질해 대며 그의 상태를 살폈다. 그리고 서진우는 그런 하성민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어제처럼 왈칵 화라도 내 주기를 기대하는 모양이지만 절대 뜻대로 해 줄 생각은 없었다.

대신 서진우는 회의 시간에 완벽한 발표 자료를 내세움으로써 하성민을 놀라게 하는 데 성공했다. 구성부터 디자인까지 완벽한 보고서를 손에 든 하성민의 표정이 어찌나 황망해 보이던지. 서진우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능숙하게 발표를 마무리 지었다. 강 과장은 매우 만족한 표정으로 다음 단계로 나아갈 것을 선언했고, 팀원들은 가공된 피드백을 토대로 시제품 구현을 위해 각자 해야 할 역할을 분배했다. 회의가 끝나고 각 부서에 이런저런 요청 메일을 보내는 사이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지옥 같았던 지난밤이 무색할 정도로 평온한 시간이 순탄하게 흐르고 있었다. 만일 김 부장의 갑작스러운 소환만 없었다면, 서진우는 끝까지 기분 좋은 하루를 보낼 수 있었을 터였다.

“서 대리님, 김 부장님께서 찾으시는데요?”

오후 3시를 막 넘겼을 무렵, 전화를 받은 임상하가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돌려 서진우를 찾았다. 가물가물 몰려오던 잠이 순식간에 달아났다. 서진우는 모니터 너머로 눈을 들어 올렸다.

“……왜요?”

“글쎄요. 그냥 빨리 오라고만 하시고 끊으시던걸요.”

부장님 성미 아시잖아요. 임상하가 눈썹을 아래로 휘며 어색하게 웃었다. 서진우는 입가를 매만지며 눈을 내리깔았다. 어쩐지 안 좋은 느낌이 들었다. 한동안 조용하던 김 부장이 왜 갑자기 새삼 눈에 보이지도 않는 서진우를 찾는단 말인가.

“……자리에 없다고 말씀드려 둘까요?”

서진우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임상하가 어깨를 움츠리며 되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서진우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지금 가겠습니다.”

지금 당장 겪게 될 일이 두렵다고 상황을 피하면 김 부장에게 더 큰 떡밥만 던져 주는 꼴이 될 것이다. 자칫 수틀리면 프로젝트 사무실로 찾아와 깽판을 놓을 인간이 김 부장이었다. 다른 팀원들에게 피해를 주느니 자신이 찾아가는 것이 맞았다.

서진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차피 부딪혀야 한다면 빠를수록 좋았다. 임상하가 사무실을 나서는 서진우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새벽과는 달리 활기가 넘치는 복도가 어수선한 소음으로 가득했다. 서진우는 가벼운 두통이 이는 것을 느끼며 눈가를 문질렀다. 밤을 새운 탓에 머리가 잘 굴러가지 않았다.

‘차라리 잘 됐어. 몽롱할 때 김 부장 말을 흘려들을 수 있으니.’

서진우는 자기 합리화를 하며 기획개발부 사무실로 들어섰다. 사원 몇 명이 서진우를 보고 아는 체를 했다. 서진우는 가볍게 그들의 인사를 받으며 김 부장이 있는 사무실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김 부장에게 가까이 다가서던 서진우의 걸음이 멎었다. 데스크 앞에 앉은 김 부장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시선을 올려 상대를 확인한 서진우는 이내 입가가 뻣뻣해지는 것을 느꼈다. 김 부장 옆에 서서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웃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하성민이었다.

설마.

마음 한구석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서진우는 뻣뻣해진 다리를 움직일 생각조차 못 한 채 하성민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서진우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든 하성민이 아, 하고 작은 탄성을 토했다.

“어어, 드디어 왔구만.”

하성민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김 부장이 서진우를 발견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서진우는 본능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거부감을 애써 억눌렀다. 김 부장은 웃는 것도, 화를 내는 것도 아닌 기이한 표정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서진우를 응시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들었길래 저런 표정을 짓는 걸까, 무슨 말을 하려고. 긴장과 불안으로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마침내 서진우가 책상 앞에 멈추어 섰을 때, 김 부장이 입을 열었다.

“서 대리 너 뭐 하는 새끼야?”

“네?”

갑작스러운 욕설에 정신이 멍해진 서진우가 입을 벌렸다. 김 부장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팔짱을 꼈다.

“너 어제 회사에서 하 대리 뺨 갈겼다며?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감히 회사에서 주먹을 휘둘러? 제정신이야?”

“……제가, 요?”

갑자기 하늘로 끌려 올라간 것처럼 귀가 먹먹했다. 서진우는 손을 그러쥐었다. 이 이야기가 나올 거라고는 예상했다. 하지만 뺨을 때리다니, 누가?

서진우는 하성민을 향해 눈을 돌렸다. 시선이 마주친 하성민이 난감한 듯 눈썹을 휘며 김 부장의 팔뚝을 보란 듯이 붙들었다.

“부장님, 흥분을 가라앉히시고……. 정말 그런 게 아니었다니까요, 서 대리님께서 실수로…….”

“아, 자네는 가만히 있어! 사람이 그렇게 순하고 착해 빠져서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거야. 이런 건 제대로 정리해야 해! 서 대리 넌 목구멍이 막히기라도 했어? 왜 대답을 안 해?”

하성민의 만류에 오히려 불이 붙은 듯 점차 목소리를 높이던 김 부장이 끝내 꽥 고함을 질렀다. 갑작스레 터져 나온 노성에 소란스럽던 사무실이 고요해졌다. 서진우는 등 뒤로 사람들의 시선이 꽂혀 드는 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수없이 많이 겪어 봤지만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불편한 이목 집중. 묻어 두고 잊고 지내던 공포가 삽시간에 전신을 휩쓸고 갔다. 서진우는 입술을 깨물고 떨리는 손을 힘껏 말아 쥐었다. 흰 손등 위로 푸른 혈관이 솟았다.

김 부장은 간만에 건수를 잡아 퍽 즐거운 모양이었다. 서진우가 대답 없이 떨고만 있자 그가 보란 듯 손바닥으로 쾅, 쾅 소리가 나게 책상을 때려 댔다.

“아니, 하 대리가 무슨 실수를 했든 잘못했으면 말로 해결해야지, 손찌검은 왜 해. 동료가 우스워? 하 대리가 아직도 네 부하 직원인 줄 알아? 하 대리도 너랑 같은 대리 직급이야. 지금 이게 뭐 하자는 거야, 어? 부사수가 일찍 승진한 게 꼴 보기 싫어서 몰래 괴롭히기라도 하는 거야?”

“……안 때렸습니다.”

서진우가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충분한 소음을 내지 못했다. 김 부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으름장을 놓았다.

“뭐라는 거야, 똑바로 대답해. 말할 줄 몰라?”

“하성민 대리, 안 때렸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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