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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느니 퇴사하겠습니다, 이사님!-32화 (32/150)

32화

로비에서 당직을 서고 있던 보안 팀 직원이 백의현을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의현은 지나칠 정도로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는 직원에게 가볍게 묵례를 되돌려 준 후 중앙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백의현을 태운 엘리베이터가 빠르게 프로젝트팀 사무실이 위치한 높이까지 솟아올랐다. 몇 초 지나지 않아 명랑한 종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백의현은 여명을 받아 희미하게 밝아진 복도를 여유롭게 가로질렀다. 사무실은 홀로 불이 켜져 있었기에 굳이 찾을 필요도 없었다. 백의현은 굳게 닫힌 사무실 문고리를 조심스럽게 잡아 돌렸다.

‘―불을 끄는 걸 깜박한 건가.’

드러난 사무실 내부가 고요했다. 언뜻 보기에는 아무도 없어 보이는 사무실을 둘러보며 백의현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어제 분명 9시 넘어서까지 일을 하고 있었으니 별일 없었다면 서진우가 가장 마지막에 퇴근했을 텐데……. 그가 사무실 뒷정리를 하지 않고 퇴근했다는 게 어쩐지 이상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말하면 혹자는 ‘서진우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판단한다’라며 핀잔을 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백의현이 그간 봐 온 서진우는 꼼꼼하고 세심한 사람이었다. 막차를 포기할지언정, 시간을 맞추지 못해 허둥대며 마무리를 놓칠 인물이 아니었다.

어쩐지 껄끄러운 느낌에 쉬이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서성이고 있을 때였다. 새근거리는 작은 숨소리가 고요한 정적을 타고 백의현에게 닿았다. 백의현은 소리 나지 않게 조심하며 슬쩍 걸음을 옮겼다.

바깥 창가 측, 모니터 너머에 엎드린 사람이 그제야 시야에 들어왔다. 백의현은 뒷짐을 지고 무방비하게 등을 내보인 이를 내려다보았다. 서진우가 한쪽 뺨을 손등에 기댄 채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불편해 보이는데.’

얼마나 피곤했으면 이런 자세로 자면서도 누가 들어오는 줄도 모를까. 백의현은 답지 않게 망설이며 조심스럽게 서진우의 곁에 다가가 섰다.

밤을 새워야 할 만큼 일이 많았던 걸까? 그야 슬슬 시제품 생산에 들어가야 한다고 언질 준 이는 백의현 자신이었다. 하지만 어젯밤에 만났을 때는 분명 곧 일이 끝날 거라고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밤을 새워야 할 정도로 많은 일을 왜 혼자 하고 있는 거지.’

여러 가지 크고 작은 궁금증이 머릿속에서 비눗방울처럼 솟아올랐다 사그라졌다. 백의현은 눈을 감은 채 곤한 수면에 빠진 서진우의 옆얼굴을 응시했다. 그가 숨을 쉴 때마다 얇은 셔츠 위로 날개 뼈가 드러났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새삼스럽게 마른 몸이다. 서진우는 남자치고는 퍽 왜소한 편이었다. 대학생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때는 주변 대학생들보다 조금 더 호리호리할 뿐, 큰 차이가 없게 느껴졌었다.

‘회사가 그렇게 고됐나.’

사회생활이 힘들기는 해도, 보통은 마르기보다는 찌는 게 정상 아닌가. 백의현의 눈길이 저절로 주변을 훑었다. 거의 빈 쓰레기통 안에 구겨진 포일과 부러진 나무젓가락, 검정 봉투가 들어 있었다. 아마도 지난밤 무릎 위에 덩그러니 올려놓았던 그 김밥의 잔해인 것 같았다. 백의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데스크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텀블러를 제외하면, 서진우가 무언가 먹었거나 마신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밥이라도 잘 챙겨 먹고 다니지.”

쯧, 하고 혀를 차며 백의현이 중얼거렸다. 유능한 직원이 필요하긴 하지만, 자신을 혹사하면서까지 열심히 일하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서진우는 여전히 깰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백의현은 상체를 숙여 조금 더 자세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왜인지 눈가가 조금 붉었다. 설마 새벽에 혼자 울기라도 한 걸까? 눈물 자국 같은 게 보이지는 않는데……. 어쩐지 안쓰러운 마음에 백의현은 검지를 뻗어 서진우의 눈가를 쓸었다.

“……으음…….”

문득 서진우가 눈썹을 찡그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백의현은 흠칫 놀라 재빨리 손을 거두었다. 잠시 끙끙대며 몸을 뒤척이던 서진우가 이내 고개를 돌려 완전히 팔 안에 저를 가두었다. 백의현은 심장이 조급하게 뛰는 것을 느끼며 서진우가 다시 잠에 빠져드는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거참, 사람 놀라게 하네.”

규칙적인 숨소리가 돌아온 것을 확인한 후에야 긴장의 끈을 놓은 백의현이 한숨을 쉬었다. 얼굴이 완전히 가려진 탓에 옆얼굴을 더 볼 수 없게 된 것이 어쩐지 아쉬웠다. 백의현은 어설프게 들고 있던 손을 내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뜨끈했던 타인의 체온이 여전히 검지 끝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그사이 서진우가 재차 몸을 꿈틀거렸다. 추운지 잔뜩 어깨를 옹송그린 꼴이 어린아이 같았다.

‘사무실에 변변한 담요 한 장이 없군.’

눈으로 주변을 훑은 백의현이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시침이 막 숫자 5를 벗어나고 있었다, 미팅까지는 두 시간이 채 남지 않은 시점. 아주 여유롭지는 않지만 급하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백의현은 여전히 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서진우의 뒤통수를 흘긋 돌아보았다. 이윽고 결정을 내린 그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네, 기사님. 이른 시간부터 죄송하지만 부탁드릴 일이…….”

***

멀리서부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퍼뜩, 서진우는 잠에서 깨어났다. 이상하게 상쾌하고 명료한 기분이었다.

“!”

서진우는 번쩍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잔 거지? 잠에 덜 깬 머리로 황망해하며 서진우는 눈을 돌렸다. 잠들기 전까지 어둠 속에 잠겨 있던 창밖이 어느새 훤했다. 서진우는 엄지와 검지로 눈 주변을 문지르며 피로를 몰아내려다 문득 등 뒤에 걸리는 무언가의 감촉에 의아해졌다.

“뭐지……?”

골반에 걸쳐져 있다시피 한 옷을 끄집어낸 서진우가 눈을 깜박였다. 라이트 그레이 색상의 재킷은 서진우의 것이 아니었다. 서진우는 슬쩍 안주머니 옆에 있는 태그를 확인하고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손톱만 한 검은 태그 위에 한평생 돈을 모아도 사 볼 엄두조차 못 낼 고급 브랜드 로고가 금사로 수놓여 있었다.

누구 거지? 서진우는 조심스럽게 재킷을 반으로 접었다. 품이 한 뼘은 더 넉넉해 보이는 재킷은 방금까지 누군가 입고 있었던 것처럼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누가 덮어 주고 간 건가? 설마…….’

잠시 하성민의 얼굴을 떠올린 서진우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뺀질뺀질한 그놈이 이 시간에 출근했을 리 없거니와, 했더라도 제 재킷을 덮어 주는 일 따위를 할 리는 절대 없었다. 게다가 재킷은 하성민이 입기에도 조금 크고 매우 비싸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면 누가 이런 일을……?

재킷을 어정쩡하게 팔에 걸친 채 멍하니 생각에 잠겨 들었을 때였다.

똑똑, 우아하게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서진우는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것인지, 문 앞에 백의현이 서 있었다.

“잘 잤습니까?”

눈이 마주친 백의현이 싱긋 웃었다. 서진우는 한 손에 종이봉투를 든 채 서 있는 셔츠 차림의 상사를 보며 눈을 둥글게 떴다. 항상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차려입은 모습만 보다가 이런 풀어진 모습을 마주하니 어쩐지 현실감이 없었다.

서진우가 멍하니 눈만 끔벅이는 사이 백의현이 특유의 느긋함을 과시하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서진우는 그제야 재킷의 주인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어, 이거…….”

“네. 추워 보이길래 잠깐 빌려 드렸습니다.”

가까이 다가온 백의현이 서진우의 손에서 자연스럽게 재킷을 받아 들었다. 서진우는 그가 재킷을 팔에 꿰는 모습을 멀거니 올려다보았다. 한 동작 한 동작이 매끄럽고 우아했다.

서진우는 문득 백의현이 지난밤과 다른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젯밤에 마주쳤을 때는 짙은 네이비 색상 정장을 입고 있었던 것 같은데. 열두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롭게 단장하고 나온 사내가 생경했다.

‘밝은색도…… 잘 어울리네. 아니, 밝은색이 더 잘 어울려.’

어둡고 묵직한 색상도 나쁘지 않지만, 밝은색 정장을 걸친 백의현은 평소보다 조금 더 어려 보였다. 고작 옷이 바뀌었을 뿐인데 수직적으로 자리한 마음의 거리감이 조금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평소와 달리 앞머리를 다 올리지 않아서일까?

“퇴근하랬더니 밤을 새웠습니까?”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서진우는 퍼뜩 정신을 되찾았다. 백의현은 그사이 다시 완벽한 정장 차림이 되어 있었다. 저도 모르게 눈앞의 사내를 넋 나간 사람처럼 구경하고 있었다. 민망함에 목덜미가 달아올라 서진우는 어색하게 시계를 향해 눈을 굴렸다.

“그게……. 어쩌다 보니.”

5시 30분. 뒤늦게 시간을 확인한 서진우가 입을 다물었다. 목표했던 시간보다 30분이나 더 자 버렸다. 좀 잘 잤다 싶기는 했는데 이렇게까지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니. 그러니 누가 들어와서 재킷을 덮어 줬는지 모를 만도 했다. 서진우는 어쩐지 맥이 빠져 허탈하게 웃었다.

“……그렇게 됐습니다. 그러는 이사님이야말로…… 어제 늦게 퇴근하지 않으셨어요?”

서진우가 시계에서 눈을 떼며 말을 돌렸다. 백의현이 눈을 내리깔고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 회의가 있어서요.”

단순하고 짤막하게 대꾸한 그가 곧 생각났다는 듯 데스크 위에 올려 두었던 종이봉투를 서진우에게로 밀어 건넸다.

“드세요. 어제 김밥 나눠 준 답례입니다.”

“네?”

“대단한 거 아니니 기대하지는 말고.”

백의현이 데스크에 기대어 서며 팔짱을 꼈다. 서진우는 어색하게 봉투를 받아 들었다. 지난밤부터 생각한 거지만 백의현의 말은 참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다.

“무슨……. 아.”

상자 안을 들여다본 서진우가 말을 멈추었다. 종이봉투 안에는 얇은 종이로 포장된 샌드위치와 오렌지 주스 한 병이 들어 있었다.

“이걸 어디서…….”

어안이 벙벙해진 서진우가 눈을 들어 올렸다. 백의현이 고개를 기울이며 평온하게 대꾸했다.

“근처에 일찍 여는 카페가 있더군요.”

“……그렇습니까?”

아무리 일찍 열어도 새벽 5시부터 샌드위치를 파는 가게는 없을 것 같은데. 궁금했지만 서진우는 더 묻지 않기로 했다. 하나하나 캐물을 만큼 친밀한 사이도 아니었거니와, 음식을 보니 급격히 배가 고파졌기 때문이었다. 서진우는 대신 솔직하게 인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서진우가 봉투를 양손으로 움켜쥐며 고개를 꾸벅였다. 그 모습을 말없이 내려다보던 백의현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너무 자신을 몰아붙이지 말고, 쉬엄쉬엄하세요.”

다정한 격려였다. 서진우는 자신을 마주하는 따스한 시선을 마주하며 어설프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누군가 깃털로 문지르기라도 한 양 마음 한구석이 간지러웠다.

이상한 일이었다. 바로 반나절 전까지는 회사가 지옥 같았는데.

나락까지 곤두박질친 기분을 애써 무시한 채 차가운 이성을 일깨워 일에 전념했다. 스트레스를 받아야 일이 더 잘 집중된다고 스스로 채찍질해 가면서. 서진우조차도 저 자신에게 그토록 매정했는데.

고작 타인에게 받은 작은 호의가 주변 풍경을 바꾸었다.

갑갑하기만 했던 사무실 공기가 안온하게 느껴졌다. 서진우는 굳어 있던 마음이 속절없이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형체도 없는 고작 말 한마디일 뿐인데. 사소하게만 여겼던 따뜻한 격려가 날카롭게 일어서 있던 신경을 누그러뜨렸다.

“……네.”

목이 조여든 탓에 서진우는 간신히 볼품없는 대답만 할 수 있었다. 백의현은 그 정도 대답만으로도 만족했는지 그럼 이만, 하며 걸음을 돌렸다. 뚜벅, 뚜벅. 여유로운 구둣발 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서진우는 사무실 바깥으로 사라지려는 백의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충동적으로 외쳤다.

“이, 이사님도! ……건강 챙겨 가면서 일하세요.”

쪼그라든 어미 탓에 호기롭게 외친 것치고는 멍청해 보이는 덕담을 하고 말았다. 민망함에 서진우가 어깨를 움츠리는 사이, 조금 놀란 듯한 표정으로 서진우를 돌아본 백의현이 이내 싱긋 웃었다.

“그렇게 하죠.”

산뜻하게 대꾸한 그가 이번에는 정말로 사무실을 벗어났다. 서진우는 멀거니 앉아 멀어지는 백의현의 발소리를 들었다. 그가 행동할 수 있게 된 것은 엘리베이터의 경쾌한 종소리가 들리고 난 이후부터였다. 온전히 혼자가 된 서진우는 그제야 백의현이 사다 준 샌드위치를 꺼내 들었다. 도톰하고 신선한 샌드위치는 백의현의 재킷만큼이나 따뜻했고 또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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