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요, 젊은 사람이.”
기어코 서진우에게 한 소리를 한 경비가 쯧, 하고 혀를 찼다. 서진우는 아예 고개를 숙여 버렸다. 죽음 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다시금 하성민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곧장 경비실로 내려오라는 당부를 남긴 후, 마침내 경비가 사무실 밖으로 사라졌다. 충분히 발걸음이 멀어졌다고 판단한 하성민이 그제야 뺨을 가리고 있던 손을 거두었다.
“어떡해요, 일 처음부터 다시 하시려면 진짜 밤새워야 할 텐데.”
하성민이 흠집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얼굴을 서진우에게로 돌리며 물었다. 언제 적의를 드러냈냐는 듯 그의 음성에는 한껏 걱정이 묻어 있었다. 서진우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신경 끄고 가라.”
당장의 감정에 휩쓸려서 시시비비를 가리느라 시간을 낭비하느니 어떻게든 데이터를 원복해 두는 것이 나았다. 빠르게 판단을 마친 서진우가 책상 한 귀퉁이를 꽉 붙들었다.
하성민이 파일을 삭제했다는 증거를 못 잡아 낼 것도 없다. CCTV로 하성민이 서진우의 컴퓨터에 접근했던 시간과 폴더가 삭제된 시간을 대조해 보면 될 일이니까.
하지만 CCTV를 보기 위해서는 보안 팀에 사유를 적은 기안을 올려야 했다.
누가 업무용 폴더를 고의로 삭제했는지 확인이 필요하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어떻게 될까? 게다가 그 뒤에 서진우가 하성민의 멱살을 잡은 것도 모조리 찍혔을 게 뻔한데, 그러면 정말로 문제가 커질 것이다. 자칫하다가는 둘이서 인사팀을 끼고 공방을 벌이는 데서 그치지 않을지도 몰랐다. 프로젝트 자체가 고꾸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떻게 프로젝트는 살린다 쳐도, 나는 확실히 퇴출당하겠지.’
서진우는 이를 악물었다. 퇴출당하고 싶지 않았다. 죽음에서 되돌아오면서까지 지켜 낸 자신의 기획이었다. 어떻게든 끝까지 완수하고 싶었다. 고작 하성민의 방해 공작 따위에 무너지고 싶지 않았다.
서진우의 대답에 구겨진 목깃을 정리하던 하성민이 눈을 끔벅였다.
“혼자서 하실 수 있겠어요? 복구하려면 한 사람이라도 더 붙어 있는 게…….”
“꺼지라고!”
가라앉아 있던 화가 다시금 치밀었다. 당도 섞인 미끈한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혐오감에 소름이 끼쳤다. 서진우는 손바닥으로 두 눈을 짓이기듯 꾹 눌렀다. 진창으로 헤집어진 마음으로는 도저히 하성민을 견뎌 낼 재간이 없었다.
“날을 새우든 어쩌든, 내가 수습할 테니까 넌 그냥…… 가라고.”
하성민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지만 지친 목소리를 숨길 수도 없었다. 서진우는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손바닥으로 가린 시야 끄트머리에, 여전히 자신을 향해 서 있는 하성민의 구둣발이 걸려 있었다. 끔찍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잠시 침묵을 지키던 하성민이 곧 평온하게 말했다. 서진우는 저를 향해 있던 구두가 뒤로 돌아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방을 챙기는 듯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이윽고 뚜벅, 뚜벅, 하성민이 문을 향해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서 선배. 혼자서 어디까지 하실 수 있을지 궁금하네요.”
조소 어린 인사를 남긴 하성민이 고개를 숙인 서진우를 보며 차갑게 웃었다. 곧 달칵, 사무실 문이 닫혔다. 서진우는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힘없이 눈가를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머리가 터질 것처럼 뜨거웠고, 명치가 뜨끔거리며 아팠다. 서진우는 밝은 사무실 한구석에 서서 우두커니 제 잿빛 그림자만 내려다보았다. 허탈함에 눈앞이 캄캄했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인 점이 있다면, 원래도 서진우에게 회사 생활은 지옥 같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서진우는 자신이 퍽 일을 잘하는 사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 그도 자신 있게 제 장점이라고 내세울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제게 주어진 일을 포기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점이었다.
회의 전날 김 부장에게 보고서를 새로 써 오라는 말을 들어도, 말도 안 되는 납기 기한에 괴로워할 때도 늦을지언정 일을 손에서 놓은 적은 없었다. 심지어는 기획안을 빼앗겼던 날에도 어떻게든 다른 기획안을 만들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던가. 그 지랄 맞은 김 부장조차도 서진우가 어떻게든 일감을 마무리하는 모습을 보고 독하다며 기가 질려할 정도였다.
절망스럽고 괴로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 감정에 빠져 애꿎은 시간을 내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누구에게도 변명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어떻게든 결과물을 낼 수밖에.
‘그럴싸한 발표 자료는 못 만들더라도 데이터 복원은 해 둬야지.’
서진우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쳐들었다. 밤은 길었고, 방해만 하는 하성민도 꺼졌으니 아직은 할 수 있었다.
서진우는 의자에 앉아 냉정한 이성을 일깨웠다. 사내 메신저를 켜서 전체 조직도를 펼친 그는 IT팀 리스트를 확인했다. 해외 파견 직원이 시스템 오류를 겪을 일을 대비해 IT팀은 보통 당직제로 24시간 운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잘하면 서버 백업본이 있는지 문의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역시나 불이 들어와 있는 이름이 있었다. 서진우는 해당 직원의 내선 번호로 전화를 걸어 대략적인 상황을 설명했다. 사고가 있어 데이터를 분실했는데 복원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자, 잠시 기다리라고 말한 담당자는 5분도 채 되지 않아 백업 파일을 구해 주었다. 비록 퇴근 시간을 기점으로 백업된 문서였기 때문에 야근하며 쌓아 온 데이터는 모조리 날아간 상황이었지만 서진우는 안도했다. 그야 백지에 처음부터 다시 그림을 그리는 것과 어느 정도 복원된 그림 위에 채색을 덧대는 것은 난이도가 완전히 다른 법이었다. 미가공 데이터를 처음부터 하나하나 다시 쌓아 올리는 것보다는 상황이 백만 배 낫지 않은가. 서진우는 당직자에게 감사 인사를 한 후 다시 업무에 착수했다.
여전히 심장은 불안하게 두근거렸고 뱃속은 얼음을 통째로 삼킨 듯 싸늘했다. 그 분노 덕분에 사기가 오른 서진우는 기이한 각성 상태에 빠져들었다. 그는 차가운 시선을 모니터에 고정한 채 소매를 걷어붙였다. 두다다다,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빠른 타자 소리가 고요한 사무실을 전투적으로 울렸다.
적당한 스트레스가 집중력에 도움이 된다고 하던가. 서진우는 새삼 그 사실을 체감했다. 덕분에 새벽 1시쯤에는 처음 잃어버렸던 데이터가 복원되었다. 심지어는 처음보다 결과물이 나아진 것 같아 보이기까지 했다. 그야 이미 한 번 완성해 보았던 것을 보다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었으니, 결과가 안 좋기가 더 어려울 터였다.
“―됐다.”
탁, 보고서의 마지막 문장을 마무리한 서진우가 파일을 저장하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문서 형식이나 전체 디자인은 전부 나중으로 미뤄 두고, 오로지 분석 결과와 인사이트 도출에만 매진한 결과 어떻게든 끝을 맺을 수 있었다. 서진우는 눈을 들어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새벽 4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었다.
“…….”
택시를 타고 집에 간다 해도 두 시간 정도 자면 다시 출근할 시간이 올 터였다. 서진우는 맥없이 의자 등받이에 상체를 눕히고 목에 힘을 뺐다. 깜깜한 창밖과 대조적으로 희게 빛나는 형광등이 시린 눈을 찔렀다.
“내가 이 짓거리를 또 할 줄은 몰랐는데…….”
잠시 멀거니 누워 있던 서진우가 허허 웃었다. 과거에는 모든 잡다한 일거리가 폭격하듯 서진우 몫으로 쏟아졌기 때문에 회사에서 밤을 새우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일주일에 두어 번은 반드시 택시를 타고 귀가해야 했으니 그야말로 회사에 살았다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였다.
‘다시는 그렇게 호구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사람 팔자는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네.’
서진우가 손바닥으로 피곤한 눈가를 문질렀다. 혹사당한 안구가 뜨끈뜨끈했다. 서진우는 힘겹게 몸을 곧추세워 어수선한 데스크를 둘러보았다.
“김밥 남겨 오길 잘했네.”
서진우는 키보드 옆에 널브러져 있는 봉투와 포일 쓰레기를 움켜쥐었다. 12시를 넘겼을 때부터 슬슬 배가 고파서 한 개씩 집어 먹으며 일을 했더니 어느새 전부 사라졌다. 서진우는 뭉친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넣어 버리고, 어지럽게 널려 있던 문서도 한곳에 모아 정리했다. 그렇게 주변 정리를 끝내자 급격히 피로가 몰려왔다.
“……5시까지만 눈 좀 붙일까.”
그래도 예상보다 일찍 일이 마무리된 덕에 문서 형식이나 디자인 등을 손볼 시간이 확보되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집에 가기보다 회사에서 조금만 자고 마무리를 짓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서진우는 잔뜩 구겨진 제 셔츠와 한껏 풀어진 넥타이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뭐, 꼴이 좀 추레하지만 따로 약속을 잡아 둔 것도 아니고. 팀원들이야 이 정도는 이해해 주겠지.
감정과 이성을 격렬하게 소모한 탓에 너무 피곤했다. 서진우는 키보드를 대충 밀어 데스크에 빈자리를 만들고 그 위에 엎드렸다. 별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이 금세 수마가 전신을 덮쳐 왔다. 서진우는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
어슴푸레한 보랏빛 여명이 밝아 오고 있었다.
차가 거의 지나다니지 않는 고요한 새벽 대로에 검은 세단 한 대가 유연하게 멈추어 섰다. 이윽고 뒷문이 열리며 매끈한 검은 구두가 모습을 드러냈다.
백의현은 제 시계를 매만지며 인도에 곧게 섰다. 퇴근한 지 여덟 시간도 채 되지 않은 사람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는 멀끔한 모습이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어제와는 달리 머리를 완전히 올리지 않아 반쯤 흘러내린 앞머리가 한쪽 눈썹을 가리고 있다는 것뿐이다. 백의현이 완전히 차에서 내리자 이내 세단이 고요히 자리를 벗어났다. 백의현은 멀어지는 자동차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거대한 사옥이 백의현을 덮칠 것처럼 위압적인 모습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북미 측 거래처와 미팅이 있어 평소보다 이른 출근을 한 참이었다. 평소와는 달리 고요한 사옥이 장엄했다.
‘시끄럽지 않아서 좋군.’
생각하며 걸음을 옮기려던 백의현의 시선이 문득 한 곳을 향해 멎었다. 아직 온전히 밝지 않아 푸르스름한 하늘 아래, 불이 켜진 사무실이 보였다. 백의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단순히 누군가 불을 끄는 것을 잊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묘하게 그의 뇌리를 스친 것은 지난밤 홀로 청승맞게 회사를 올려다보며 홀로 저녁을 먹던 한 사원의 모습이었다.
“…….”
그러고 보니 저쯤, 프로젝트 사무실이 있었던 것도 같다. 백의현은 재킷 단추를 고치며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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