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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느니 퇴사하겠습니다, 이사님!-30화 (30/150)
  • 30화

    “너무 늦으셔서 집에 가 버리신 줄 알았어요.”

    유쾌하게 지껄인 하성민이 천천히 벽을 돌아 가까이 다가왔다. 서진우는 여전히 마우스를 쥐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꼭 메두사와 눈이라도 마주친 것처럼 몸이 얼어붙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서진우에게서 이렇다 할 반응이 돌아오지 않자, 자리에 앉던 하성민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서진우는 여전히 모니터 속 파일 삭제 기록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간신히 입술을 떼었다. 누군가 입술에 추라도 꿰어 놓은 것처럼 턱이 묵직하고 뻐근했다.

    “네 짓이야?”

    그렇게 묻는 제 목소리가 꼭 남의 것 같았다. 서진우의 짧은 질문에 하성민이 큼직한 눈을 두어 번 깜박였다.

    “뭐가요?”

    “작업하던 파일이 삭제됐는데……. 네가 한 짓이냐고.”

    서진우는 평정을 유지하려 부단히 애를 쓰고 있었지만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막을 도리는 없었다. 서진우의 말에 하성민이 과장되게 헉, 하고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파일이 삭제됐다고요? 그럼 제가 작업하던 데이터에도 문제가 생긴 건가요?”

    하성민이 선뜻 서진우의 등 뒤에 서서 허리를 숙였다. 그의 얼굴이 필요 이상으로 성큼 가까이 다가왔다. 서진우는 제 어깨를 쥔 채 놀란 얼굴로 모니터를 바라보는 하성민을 향해 눈을 돌렸다. 그는 정말로 화들짝 놀란 것 같았다. 이 일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같았다…….

    ‘내가 정말 괜한 사람을 의심하는 걸까?’

    서진우의 마음속에 망설임이 피어올랐을 때였다.

    “그러게 간수를 잘하셨어야죠. 일하다가 졸기라도 한 거예요? 폴더를 통째로 삭제하다니.”

    하성민이 눈을 굴려 서진우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가에 웃음이 맺혀 있었다. 짐짓 안타까워 보이는 어조, 그러나 지극히 연극적인…… 조롱.

    서진우는 확신했다. 범인은 하성민, 눈앞의 이 개자식이었다.

    “너 이 새끼……!”

    눈앞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왈칵 분노가 치밀어 서진우는 벌컥 자리에서 일어났다.

    “―!”

    충동적으로 손을 내밀어 하성민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챘다. 방심하고 있던 하성민이 비명도 내지 못하고 홱 이끌려 왔다.

    “할 짓이 있고 하면 안 될 짓이 있지!”

    하성민이 덩치도 키도 서진우보다 컸기 때문에, 둘의 모습은 제법 우스꽝스럽게 보일 터였다. 하지만 서진우는 남들 눈에 이 꼴이 어떻게 보일지에 대한 계산 같은 것을 할 겨를이 없었다. 머리끝까지 격노한 탓에 전신을 주체하는 것이 어려웠다. 서진우는 부들부들 떨리는 이를 악물고 하성민을 쏘아보았다. 멱살이 잡혀 어정쩡하게 허리를 숙인 채 하성민은 가증스럽게도 놀란 눈으로 서진우를 내려다보았다.

    “―왜요, 한 대 치시려고요?”

    이내 하성민이 눈썹을 찌푸리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평소의 하성민에게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비꼬는 말투가 그의 미끈한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서진우는 멱살을 틀어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그는 이 말투를 아주 오래전에, 혹은 이미 사라진 미래에서 한 번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단둘이 남았을 때야 비로소 본성을 내보이던 하성민을, 이미 겪어 본 적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경험이 서진우의 이성을 일깨웠다. 서진우는 자신이 주먹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성민의 말대로 까딱 넋을 놓았다가는 그를 후려쳐 버렸을 것이다.

    말아 쥔 주먹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서진우는 이를 악문 채 힘겹게 제 팔을 거두었다. 하성민이 아쉬운 듯 아, 하고 탄성을 터뜨렸다.

    “그냥 쳐 보시지 그러세요. 저 한 대 패고 싶으셨을 텐데.”

    “…….”

    “선배는 진짜 재미없는 사람이야.”

    노골적인 시비에도 서진우가 그를 노려보기만 할 뿐 반응하지 않자, 하성민이 맥이 빠졌다는 양 어깨를 늘어뜨리고 한숨을 쉬었다. 서진우는 그제야 하성민의 의도를 이해했다. 하성민은 처음부터 서진우에게서 폭력적인 반응을 유도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서진우가 그를 정말 때리기라도 하면 폭력 문제로 비화시킬 수 있을 테니까. 애초에 김 부장이 하성민을 이 프로젝트에 꽂아 넣었을 때부터 이런 사고를 일으켜 주길 바랐던 걸까. 그런 작당 모의를 하고 사람 좋은 척, 야근까지 해 가며 기회를 보아 온 걸까.

    하지만 그렇다고 함께 작업하던 프로젝트 파일을 통째로 삭제해 버린다고?

    “너, 진짜, 미친 거 아니냐……?”

    턱이 덜덜 떨려서 서진우는 이를 악문 채 말해야 했다. 여전히 순순히 멱살을 잡힌 채로 하성민이 눈살을 찌푸렸다.

    “미친 건 제가 아니라 서 선배죠. 파일 좀 날아갔다고 애꿎은 후배 멱살을 잡고 있잖습니까.”

    타박을 주듯 가벼운 어투였다. 아직도 일의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한 걸까. 서진우는 입에서 피 맛이 나는 것을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턱에 너무 힘을 준 탓에 입술 안쪽이 찢어진 줄도 몰랐다. 서진우는 핏발 선 눈으로 하성민을 노려보았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내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내가 너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대체 뭐가 문젠데!”

    소리를 지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서진우가 이를 드러냈다. 핏대가 선 목이 뜨끔거렸다. 간신히 다시 잡은 이성을 놓아 버릴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도 없었다. 급기야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하성민은 서진우의 외침에 잠시 생각에 빠진 듯 입을 다물었다.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는 눈동자는 감정이 사라진 듯 멍했다. 여전히 서진우에게 멱살을 잡힌 채였지만, 그딴 상황은 하성민에게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글쎄.”

    서진우의 가슴이 까맣게 타들어 갈 만큼 억겁 같은 몇 초가 흐른 뒤, 마침내 하성민이 시선을 되돌렸다. 유리알처럼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서진우를 향했다. 그 시선은 아주 차가운 얼음 같기도 했고, 너무 뜨거운 불 같기도 했다.

    “기어오르니까 열받아서?”

    속삭임에 가까운 목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서진우는 말문을 잃고 입을 벌렸다. 멱살을 잡은 이는 분명 그인데, 마치 하성민에게 따귀라도 맞은 기분이었다.

    결국 하성민에게 서진우란 그런 존재일 뿐이었다. 등골 빨아먹기 좋은 선배, 다루기 쉬운 호구.

    그랬던 서진우가 ‘감히’ 건방지게 거리를 두고, 제 밥그릇을 챙기려 드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다.

    “……너 제정신이 아니구나…….”

    서진우가 황망하게 중얼거렸다. 비틀, 다리에 힘이 풀렸다. 하성민이 그런 서진우를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그러게 왜 안 하던 짓을 해요, 자꾸. 얌전히 살던 대로 살면 내가 이렇게까지는 안 했잖아.”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가 다리를 옭아매는 것 같았다. 서진우의 몸이 다시금 떨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분노가 아닌 공포 때문이었다. 도무지 눈앞의 남자를 이해할 수 없어서, 몰이해의 공포가 파도처럼 서진우를 집어삼켰다.

    아무리 서진우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대도 하성민 또한 이 프로젝트에 이름을 올린 사람이었다. 비록 가식적으로 좋은 사람인 척하려 일손을 도왔다고는 하지만, 그 또한 서진우와 함께 며칠에 걸쳐 데이터를 분류하고 정리했다. 그런데 그 자신의 노력까지도 오직 서진우를 엿 먹이기 위해 날려 버릴 수 있다고?

    이놈이 인간이 맞기는 한 걸까?

    “아!”

    별안간 하성민이 비명을 지르며 홱 고개를 모로 돌렸다. 마치 허공에서 보이지 않은 손에 얻어맞기라도 한 것 같은 동작이었다. 서진우는 깜짝 놀라 몸을 굳혔다. 그사이 돌아간 뺨을 한 손으로 짓누르며 하성민이 울먹였다.

    “선배, 왜…….”

    이건 또 무슨 개짓거리일까? 별안간 뒤바뀐 하성민의 어조에 서진우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사무실 문이 벌컥 열린 것은 그때였다.

    “무슨 일 있소? 웬 비명이…….”

    “!”

    사무실 문을 열어젖힌 중년 사내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자리에 멈춰 섰다. 반사적으로 문을 향해 고개를 돌린 서진우가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회사 로고가 새겨진 검은 모자를 눌러쓴 사내는 경비원이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주룩 흘러내렸다. 뒤늦게 서진우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지했다. 멱살을 잡은 서진우와 한 대 맞은 것처럼 뺨을 감싼 채 울먹이고 있는 하성민. 누가 봐도 선배가 후배를 일방적으로 손찌검한 상황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서진우가 상황이 어떻게 보일지 이해함과 거의 동시에 경비원도 정신을 차렸다. 사내가 허둥지둥 사무실 안으로 들어와 서진우를 하성민에게서 떼어 냈다.

    “이, 이, 이게 무슨 일이오. 다 큰 어른들이 회사에서……!”

    연배가 꽤 있어 보이는 경비원은 용기 있게 대처했다. 그는 자신보다 큰 서진우의 앞에 서서 그보다 더욱 큰 하성민을 보호하듯 양팔을 벌렸다. 최악이다. 서진우는 창백해진 고개를 숙이고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전 괜찮습니다. 업무 중 잠시 트러블이 있었어요.”

    “아니, 아무리 어떤 문제가 있었대도 그렇지, 사람을 때리면……!”

    “사소한 다툼이었어요, 정말입니다.”

    하성민이 한쪽 뺨을 감싸 쥔 채 경비원을 달래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무척 선량한 청년으로 보일 모습이었다.

    “일 크게 번지지 않게 도와주세요. 중요한 프로젝트라서요.”

    하성민이 눈썹을 휘어 웃었다. 퍽 서글퍼 보이는 미소였다. 서진우는 절망스러운 기분으로 하성민이 경비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쪽 뺨을 감싼 손을 끝내 떼지 않는 모양새가 절묘했다.

    “……거, 맞은 쪽이 이렇게까지 나오니 우선은 갑니다만…….”

    경비원이 떨떠름해하며 두 사람 사이에서 비켜났다. 그러면서도 불안한지, 서진우를 흘끔 돌아보는 시선이 꼭 위험인물을 탐색하듯 의심으로 가득했다. 서진우는 입술을 깨물고 눈을 내리깔았다. 억울했다. 분했다. 때리다니. 멱살은 잡았지만, 물리적인 해를 가하기는커녕 하고 싶은 말도 시원하게 퍼부어 주지 못했다. 그런데도 저 경비원이 보기에는 서진우가 가해자로 보이겠지.

    아니라고, 다 거짓말이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누군가 성대에 돌멩이를 욱여넣기라도 한 양 도무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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