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아니, 아닙니다. 네, 하하, 퇴근, 네, 해야죠.”
어색하게 웃는 서진우를 의아한 눈으로 내려다보던 백의현이 문득 허리를 숙여 가까이 다가왔다. 갑자기 얼굴이 다가와 당황한 서진우가 같은 극 자석처럼 상체를 뒤로 물렸다.
이윽고 백의현의 눈높이가 서진우와 비슷해졌다. 바람 냄새를 닮은 백의현의 익숙한 향수 냄새가 코끝에서 희미하게 일렁였다.
“이게 그렇게 맛있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나긋하고 담백했다. 서진우는 제 얼굴을 보고 씩 웃는 백의현을 마주하며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이토록 가까이서 그의 얼굴을 본 적은 처음이었다.
‘의외로 속눈썹이…… 길구나.’
가로등 조명 때문에 눈 밑에 긴 그림자를 만든 속눈썹이 바람을 따라 희미하게 떨렸다. 서진우는 문득 이 잘생긴 남자의 얼굴이 낯설어졌다.
“음, 맛있네요.”
백의현이 상체를 일으키자 멀어졌던 현실감이 되돌아왔다. 언제 집어 든 건지, 백의현이 김밥 하나를 들어 올린 손가락을 아무렇지 않게 입으로 가져갔다. 서진우는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느릿하게 김밥을 음미하는 모습을 멀거니 올려다보았다. 이윽고 목울대를 움직여 김밥을 삼킨 그가 눈을 내리깔며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진우 대리가 좋아할 만하군요.”
그가 코끝을 찡긋하며 웃었다. 서진우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벌렸다. 그야 김밥이 맛있기는 하지만, 갑자기 이렇게 나오면 대체 어떻게 대해야…….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서진우가 금붕어처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만 벙긋대고 있는 사이, 백의현이 불쑥 제 손을 내밀었다.
“핸드폰.”
“예?”
“핸드폰 주세요.”
이번에도 뜬금없는 말이었다. 서진우는 어리벙벙해져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여기요…….”
백의현은 서진우가 온순하게 내민 핸드폰을 위엄 있는 얼굴로 받아 들었다. 그 태도가 어찌나 당당하고 우아하던지, 서진우는 백의현이 제 핸드폰을 켜서 무언가를 입력하고 되돌려 줄 때까지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번호 저장하세요.”
아직 허공에 놓인 손에 손수 핸드폰을 쥐여 주며 백의현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서진우는 멀거니 제 핸드폰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발신 목록에 모르는 번호가 찍혀 있었다.
“……이게…….”
“제 개인 연락처입니다. 밥 얻어먹었으니 다음에는 제가 사죠.”
“예?”
백의현의 태연한 말에 놀란 서진우가 퍼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백의현은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밀어 넣으며 뻔뻔한 얼굴로 턱짓했다.
“배고플 때 연락하세요.”
“아니, 겨우 김밥 하나에 무슨…….”
“야근하는 직장인의 소중한 식량인데, 겨우라니.”
백의현의 얼굴이 하도 무표정해서 서진우는 그의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혼란스러움에 넋이 나간 서진우를 구경하던 백의현이 불현듯 손을 뻗었다.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턱을 받치고, 두툼한 엄지가 예고 없이 서진우의 마른 뺨 아래, 오른쪽 입술 가장자리를 가볍게 쓸었다.
“!”
갑작스러운 접촉에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서진우는 고장 난 가전처럼 그 자리에서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입에 밥풀 묻었습니다.”
백의현이 엄지에 묻어난 밥알을 가볍게 문질러 바닥으로 떨구며 빙긋 웃었다. 표정에 아이 같은 장난기가 서려 있었다. 서진우는 제 입술에 묻은 밥풀을 떼어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할지, 말도 없이 왜 만지냐고 성을 내야 할지, 장난친 거냐고 정색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 이, 저…….”
“그럼 수고하고, 빠른 퇴근 기원하겠습니다.”
서진우가 당혹감에 눈만 깜박이는 사이 선뜻 작별 인사를 건넨 백의현이 몸을 돌렸다. 서진우는 결국 제대로 된 반응을 돌려주지 못한 채 멀어지는 백의현의 뒷모습만 멍청히 바라보았다.
어쩐지 입꼬리가 계속 올라가 있는 것 같았는데, 제 착각이었을까? 백의현이 완전히 멀어진 지금에 이르러서는 알 수 없는 생각이었다. 분명한 것은 서진우의 심장이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빠르게 뛰고 있다는 점뿐이었다.
***
심장이 하도 요란하게 요동쳐 대는 탓에 식욕은 오히려 바닥을 쳤다. 서진우는 결국 반도 먹지 못한 김밥을 다시 봉투에 포장한 뒤 사무실로 돌아갔다.
“대체 무슨 밥을 산다고…….”
핸드폰에 저장된 [백의현 이사님]이라는 이름의 연락처를 어색한 눈으로 내려다보며 서진우가 중얼거렸다. 아직도 기분이 얼떨떨했다.
“……무슨 플러팅도 아니고.”
생각 없이 중얼거린 제 말에 되레 놀라 서진우는 퍼뜩 고개를 쳐들었다. 엘리베이터 계기판 숫자가 점차 사무실 층수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서진우는 콩닥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미간을 힘껏 좁혔다.
감히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자의식 과잉도 아니고. 서진우는 속으로 자신을 꾸짖었다. 보통은 남자가 남자한테 번호 좀 주었다고 플러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과한 의미를 부여하는 편이 훨씬 이상했다.
‘게다가 백 이사는 100% 헤테로야. 내가 뻔히 안다고.’
다양한 게이를 만나 보지도 않았고, 수없이 많은 연애를 거쳐 온 것도 아니다. 하지만 서진우는 자신이 게이와 헤테로를 구분할 줄 안다고 굳건히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백의현은 일단 남자한테 관심이 있다기에는 태도가 지나치게 냉담했다. 무심하고 차가운 눈빛, 나긋하지만 단호한 말투. 백의현은 회사에서 제법 인기가 있는 젊고 잘생긴 사원들에게도 가차가 없었다. 그야말로 남자에게는 씨앗 한 톨만큼의 관심도 없는 헤테로 오브 헤테로 그 자체. 그것이 서진우가 알고 있는 백의현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여자에게 관심 있어 보이지도 않았지만.’
그냥 무성애자 아닐까? 제 미간을 긁적이던 서진우가 이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고 푹 한숨을 쉬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개인 번호를 준 건 좀 선을 넘은 것 같은데…….
“외로워서 미쳐 버렸나 보다, 내가. 회사 다닐 만해지니까 아주 배가 불렀지.”
서진우는 마침내 자신이 미쳤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고 보니 솔로로 지낸 지 벌써 십 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대학생 때 했던 두 번의 연애를 끝으로, 서진우는 한 번도 누군가와 사귄 적이 없었다. 게이 클럽은 도무지 성향에 맞지 않아 20대 초반에 몇 번 가 본 게 다였고, 이후에는 곧장 군대다 취업이다 회사다 하며 하루하루를 바쁘게 지내느라 연애는 꿈도 못 꿨다. 특히 김 부장에게 찍힌 이후부터는 살아서 버티는 게 고작이었기에, 외롭다고 생각한 적은 있어도 누군가를 사귀어야겠다는 생각은 해 본 적조차 없었다.
‘프로젝트 끝나면 누구라도 만나 볼까.’
서진우는 멍하니 생각했다. 때마침 사무실이 있는 층에 멈추어 선 엘리베이터가 청량한 종소리를 내며 문을 열어 주었다. 서진우는 낮처럼 환한 엘리베이터에서 어둑한 복도로 걸음을 옮겼다. 거의 모든 사무실이 비어 있었기에 복도의 불도 꺼져 있었다. 빛나는 곳이라고는 서진우가 근무하는 프로젝트팀 사무실과 복도 반대쪽 끄트머리에 걸린 비상구 알림 등뿐이었다. 서진우는 약간 으스스한 기분을 느끼며 걸음을 재촉했다. 사무실이 멀지 않아 다행이었다.
‘……갔나?’
굳게 닫힌 사무실 문을 조심스레 당겨 연 서진우가 빠끔 고개를 내밀어 내부를 살폈다. 다행히 사무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서진우는 괜히 소리가 나지 않게 살금살금 사무실로 들어섰다.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던 하성민은 물론 없었고, 그의 컴퓨터 또한 꺼져 있었다. 서진우는 손바닥으로 가슴을 누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조금 마음 편히 야근할 수 있겠다, 생각하며 제 자리로 걸음을 옮기던 서진우는 문득 옆자리 의자에 놓인 하성민의 가방을 발견했다.
“……두고 갔나?”
서진우가 가방을 곁눈질하며 제 자리에 앉았다.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하성민이 평소에도 매일같이 들고 다니는 가방을 새삼 자리에 두고 간 게 어쩐지 좀 이상했다. 괜한 심술이 묻어나는 눈으로 가방을 노려보던 서진우는 이내 한숨을 삼키며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 가방 챙기는 걸 잊었을 수도 있지.’
아무리 하성민이라도 이 시간까지 단순 데이터 분류나 하고 있으면 지겨워서 빨리 도망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가방을 놓고 갈 수도 있는 일 아니겠는가.
백 이사에게 번호를 받은 일도 그렇고, 최근 생각이 많아져 큰일이었다. 서진우는 상념을 내쫓듯 가볍게 고개를 흔들며 절전 모드에 들어간 컴퓨터를 다시 켰다. 쓸데없는 의심에 빠져 불안해하다 날려 버릴 시간 따위는 없었다. 막차를 타려면 지금부터 빨리 남은 분석을 마치고 보고서를 완성해야 했다.
그래도 확실히 혼자 남으니 마음은 편했다. 서진우는 모니터에 불이 들어오길 기다리며 기지개를 켜고 의욕적으로 소매를 걷어붙였다. 최대한 집중해서 속도를 붙여 볼 요량이었다.
“……어?”
나가기 전에 프로그램을 종료하고 갔던가?
화면 잠금을 해제한 서진우가 곧 떠오른 바탕화면을 보며 눈을 깜박였다. 기본 이미지로 된 바탕화면은 대기 중이 아니라 완전히 껐다 켜진 것처럼 보였다. 서진우는 작업 표시줄로 눈을 내렸지만 실행 중인 프로그램은 보이지 않았다.
……컴퓨터를 끄고 나가지 않은 건 확실한데. 혹시나 자리를 비운 사이 컴퓨터가 마음대로 재부팅이라도 되었던 걸까? 서진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마우스를 쥔 손목을 움직였다. 조금 귀찮기야 하지만, 컴퓨터가 꺼졌다고 해서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보통 공유 서버에 보관된 회사 작업물은 실시간으로 자동 저장이 되었으니까.
“…….”
달칵, 달칵.
마우스를 클릭하던 검지의 움직임이 서서히 멎었다. 서진우는 입을 굳게 다문 채 백색으로 빛나는 모니터를 응시했다. 싸한 감각이 척추를 타고 뒤통수부터 꼬리뼈까지 내달렸다.
있어야 할 파일은 물론, 데이터를 모아 두었던 폴더가 어디에도 없었다.
손바닥 아래로 축축하게 땀이 차올랐다. 서진우는 떨리는 손끝에 힘을 주어 황급히 마우스를 움직였다. 멈춰 있던 마우스 클릭 소리가 다급해졌다. 달칵, 달칵, 달칵, 달칵. 고요한 사무실에 마우스 움직이는 소리만이 계속되었다.
“이게 대체, 어디…….”
서진우가 비어 있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황망하게 중얼거렸다. 고막이 웅웅거리는 느낌이 들더니 곧 귀가 먹먹했다.
자신이 만들었던 다른 폴더는 물론, 프로젝트 폴더와 다른 기획부 폴더를 깡그리 뒤져 보았다. 하지만 파일은 마치 처음부터 없었다는 양 보이지 않았다. 이상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온종일 온·오프라인 데이터를 취합하고 분석했다. 그러니 서진우가 다시 한번 시간을 되돌아온 게 아니라면 파일이 없을 리가 없었다.
혹시 몰라 일말의 희망을 품고 날짜를 확인했지만 당연히 시간은 앞으로 흐르는 중이었다. 입안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서진우는 입술을 잘근거리며 공유 서버 기록을 열었다.
“…….”
손발이 삽시간에 체온을 잃고 차갑게 얼어붙었다. 서진우는 마침내 그곳에서 찾아 헤매던 파일의 흔적을 발견했다.
파일은 약 15분 전, 서진우의 컴퓨터에서 폴더째로 삭제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뚜벅, 뚜벅. 멀리서부터 경쾌하고 느긋한 구둣발 소리가 들려왔다. 오직 서진우만이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있었기에, 그 소리는 지나칠 정도로 노골적으로 들렸다. 이윽고 점차 가까워진 걸음이 사무실 문 앞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어, 선배. 돌아오셨네요?”
하성민의 목소리에 서진우는 제 귀를 의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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